#49
재겸이 무표정한 얼굴로 탈을 쓴 남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얼굴을 가린 기괴한 탈이 낯설었지만, 장신의 체격과 선이 딱 떨어지는 진회색 슈트는 어딘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윤곽을 그려내고 있었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느리게 훑어보던 시선이 어느 순간 깊게 가라앉았다.
“역시 그랬구나.”
재겸이 별반 놀란 기색 없이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탈 너머 윤태희의 눈가 한쪽이 경련했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태희가 결국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안녕.”
체념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태희는 손을 들어 탈을 벗었다. 여기서 더 숨기려고 해 봤자 꼴만 우스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해가 더 쌓이기 전에 순순히 정체를 드러내는 편이 나았다. 우스꽝스러운 전통 탈을 벗겨 내자 그림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어…?”
처음 보는 윤 수석의 얼굴에, 이영신을 제외한 다른 제구부 나자들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끔 오늘처럼 운 좋게 몇 번 대면한 적은 있었어도, 그때마다 윤 수석은 탈을 쓰고 있어서 맨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뭐야? 아는 사이야?”
재겸과 윤태희를 번갈아 쳐다보던 이영신이 물었다.
“뭐, 조금….”
윤태희가 탈에 눌려 있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애매하게 대꾸했다. 이영신이 눈을 껌뻑거렸다. 아는 사이라니, 그럼 태희 녀석이 불러서 온 건가? 교복을 입은 소년을 힐끔거리던 이영신이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쟤 뭐 하는 앤데?”
윤태희가 내키지 않는 듯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전에 얘기한, 후임으로 들이고 싶다는 사람.”
“에엥? 그 포악하고 사납다던 걔?”
이영신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교복 차림의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누구길래 윤태희가 그렇게 공을 들이고 있는 건지, 안 그래도 얼굴 한번 보고 싶었건만 뜻밖이었다.
잘생겼네, 엄청 까칠해 보이긴 하지만….
이영신은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소년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겉으로 봐서는 아주 평범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윤태희가 탐내는 재목이라고 하기엔 느껴지는 기운이 아주 밋밋해서 눈에 띄는 특이점은 없어 보였다.
그때, 소년이 입을 열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혹시나 했어. 어쩌면 네가 데려갔을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설마 했었는데, 역시 너였구나. 네가 그런 거였어.”
그에 윤태희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이건 내가 한 짓이 아니라….”
뭐라 설명하려던 윤태희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동자삼이 그렇게 부르짖던 ‘나리’가 누군가 했다. 윗전을 부르는 호칭이라 누군가를 모시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인간일 줄은 상상 못 했다.
아니, 설사 인간이더라도….
“그게 너일 줄은 몰랐어.”
재겸은 지금 이 납치극을 자신이 벌인 일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다. 어딜 봐도 그렇게 보일 터였다. 눈썹을 매만지던 윤태희가 자조적인 한숨을 흘렸다. 낭패였다. 이미 충분히 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쯤 되니 완벽하게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이야. 이건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아니, 차라리 잘됐어.”
재겸은 문득 혼잣말을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거든.”
앞에서는 정주를 걸고넘어지면서 자기가 지켜 주겠다느니, 같은 편이 되자느니, 저를 이용하라느니, 온갖 회유를 늘어놓더니 결국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이고 있었던 거다.
이번엔 메산이였다.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발뺌하는 모양새가 조소를 불러일으켰다. 얼굴까지 가리고 치밀하게 일을 꾸몄다. 하긴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정주의 존재를 알았다면 메산이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을 법했다.
정주에게 시선이 쏠리도록, 일부러 정주만 운운해 가며 정신을 빼놓게 만든 것이다. 저는 저대로 이용하고, 동시에 뒤로는 은밀히 메산이를 빼돌려서 따로 이용할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척, 모르쇠하며 시치미를 뗐을 것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너랑 같은 나자라는 거지?”
윤태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어딘지 심란한 기색으로 재겸을 물끄러미 응시할 따름이었다. 재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대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때, 이영신이 미간을 찌푸리며 불쑥 끼어들었다.
“야, 태희야. 둘이 지금 뭔 얘기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여기로 부른 거야? 용건이 있으면 따로 만나든가 하지, 지금 뭐 하는 거야. 태평하게 이러고 있을 때가….”
재겸이 이영신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나자가 되어 달라고 했었지. 내가 생각을 좀 해 봤어.”
딱히 주어는 없었지만, 윤태희는 재겸이 저에게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윤태희와 재겸이 시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지금부터 말할 테니 너네도 잘 들어.”
나무 위에 올라서 있던 재겸이 훌쩍 땅으로 내려왔다. 나자들을 찬찬히 훑어보는가 싶더니,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나는 김재겸이고, 나이는 안 세어 봐서 정확히 모르는데 대충 한 이백 년쯤 살았다. 난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아.”
그 순간, 윤태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모든 시선이 일제히 재겸을 향했다. 메산이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의 나리는 아주 평온해 보였다. 딱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예전에 내가 스승으로 삼았던 사람이 아마 저주를 건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건지 나도 정확히 이유는 모르겠어.”
뭐? 이영신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 쟤 갑자기 뭔 소리 하는, 뭐라냐?”
한눈에 보기엔 별다른 특이점이 없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느껴지는 기운 또한 밋밋하고 차분했다. 그런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지도 않는 허무맹랑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윤 수석의 얼굴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렸던 나자들도 서로를 바라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겸은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정주라는 녀석이 내 외삼촌 흉내를 내 주고 있어. 참고로 정주 직업은 연예인이고, 진짜 정체는 호족이다. 걔도 대충 한, 백 년은 넘게 살았을 거야. 그리고 잘은 몰라도 걔가 뭐 어떻게 몰래 위조하고 날조해서 우리 둘 다 평범한 사람인 척 살고 있어.”
“…….”
“…….”
“…….”
이번엔, 나자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뭐? 쟤 방금, 뭐. 뭐라고….”
“잠, 잠깐. 누가 호족이라고?”
호족? 윤태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저 녀석은 메산이라고 하는데, 오래전부터 나랑 같이 살고 있어. 너네도 대충 알고 있겠지만, 겉모습은 저렇게 어린아이여도 알맹이는 몇백 년 묵은 산삼이야.”
메산이는 사색이 되어 재겸을 올려다보았다.
“나, 나리! 어, 어째서….”
그 순간, 소년의 말에 당황하고 있던 나자들이 고개를 틀어 동자님을 쳐다보았다. 방금 분명히 ‘나으리’라고 불렀다. 동자님이 내내 부르짖었다는 호칭이었다. 지금까지 소년의 입에서 나온 믿기 어려운 모든 말들이 전부 사실임을 보증하는 셈이다.
“너, 돌았어?”
잠시 얼빠진 채 서 있던 윤태희는, 이내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쏘아붙였다. 재겸과 동자삼이 연관이 있다는 예상 밖의 사실만으로도 윤태희는 충분히 골치가 아팠다.
나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니 방심해선 안 된다고, 덜미를 잡히면 그걸로 끝이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그게 불과 반나절 전이었다.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정체를 꽁꽁 숨겨도 모자랄 판에 제 발로 정체를 드러내다니,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자들 앞에서….
윤태희는 재겸이 무슨 생각에서 저러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침착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실상은 수세에 몰려 이성적인 판단을 잃은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어리석은 자충수를 둘 리가 없다.
윤태희가 저도 모르게 주변 나자들을 곁눈질할 때였다.
“약점을 잡혔으면 그 약점은 내버리면 그만이야.”
“이제 날 아는 건 너만이 아니야. 지금 이 순간부터 사수해야 할 비밀은 없어졌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던 윤태희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순간 스쳐 지나간 생각 하나가 윤태희의 발목을 잡았다.
설마….
윤태희의 시선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남의 손에 망하느니 내 손으로 망칠 거야.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너 같은 새끼한테 지켜 달라고 하느니 내가 해. 앞길을 막든,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든, 마음대로 해. 나도 내 마음 가는 대로 할 거니까.”
깊게 가라앉은 시선이 윤태희를 꿰뚫었다.
“알겠냐?”
재겸이 살벌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걸로 네 협박은 무효야, 이 씹새끼야.”
윤태희의 얼굴이 기묘하게 굳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발끝까지 한차례 전류가 흐른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불쾌하고 짜릿한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