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52)화 (52/348)

#52

긴 세월을 함께한 만큼 메산이는 재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메산이는 재겸이 활을 꺼내는 순간이 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가장 큰 이유는 당장 저의 나리가 큰 고통을 느껴야 하기에, 또 다른 이유는 활을 꺼낼 때마다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기 때문이었다.

재겸은 메산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위를 당기는 손아귀가 미세하게 풀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잡았다.

“아니면, 아니면요. 피, 피라도 멎게 해 드릴게요. 제발요, 피라도 멎게요. 네? 저한테 먼저 치유를 받으시고….”

저의 나리는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강해진다. 왜냐하면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귀기가 날뛰기 때문이다. 흘린 피의 양이 많아질수록 귀기 또한 날뛴다. 만약 여기서 더 피를 흘리면 그땐 틀림없이 귀기가 폭주할 것이다.

메산이는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귀기가 폭주하고 나면 재겸은 반드시 몸져눕는다. 몇 날 며칠이고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맨다. 문제는 그런 상태가 되면 메산이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재겸도 메산이도 알지 못했다.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몸을 씻은 듯이 낫게 해도 소용이 없었다. 재겸이 자력으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제 재겸의 발밑엔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메산이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재겸은 요지부동이었다. 태평하게 치유나 받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느덧 산중으로 어둠이 깊숙하게 내려앉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비마와의 거래를 이행해야 한다. 달이 뜨는 순간부터 의지와는 무관하게 수마가 몰려올 것이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전에 쥐새끼들을 처리해야 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거의 다 끝났어.”

재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상 남은 건 윤태희뿐이었다. 화살에 스친 쥐새끼는 더 손대지 않아도 머지않아 기력을 잃고 쓰러질 것이다. 어둑어둑한 주변은 전쟁을 치른 듯 처참했다. 피를 흘린 채 쓰러진 나자들은 패잔병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앙상한 초목은 뿌리가 뜯긴 채 흙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턱까지 팽팽하게 시위를 당긴 재겸이 윤태희를 향해 활을 겨눴다. 윤태희가 아까처럼 손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바람에 꺾인 화살은 나무로 가서 박혔고, 윤태희가 뭔가를 가늠하듯이 나무에 꽂힌 화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화살에 희미하게 귀기가 실렸다.’

언뜻 보기엔 잘 막아 낸 것처럼 보였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화살이 방향을 튼 각도가 눈에 띄게 좁아져 있었다. 분명 똑같은 힘으로 쳐 냈으나 아까보다 훨씬 근접한 것이다.

‘귀기라면 밧줄에 틀어 막혔을 텐데, 어째서….’

시선이 자연히 소년의 발목으로 향했을 때였다. 윤태희의 눈동자에 일순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발목을 옭아맨 밧줄이 사정없이 꿈틀대며 요동치고 있었다. 날뛰는 귀기를 견디지 못하고 주술이 저절로 풀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주술이 완전히 깨질 것이다. 귀기를 봉쇄당한 탓인지, 멀리서 느껴지는 소년의 기운이 몹시 불안정했다. 게다가 활을 꺼내던 순간부터 소년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분명히 같은 사람이건만 그 전과 비교하면 훨씬 더 어둡고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가면 큰일 나겠는데.”

가장 큰 문제는 저 활이었다. 어떻게 얻은 물건인진 모르겠으나 아무리 봐도 인간의 손에 있을 물건이 아니었다. 거기다 주술이 풀리고 밧줄이 끊어지면 소년의 움직임은 자유로워진다. 귀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화살에 본격적인 귀기까지 실린다면 그땐 화살을 막을 수 없을 거다.

“원랜 가만히 있을 생각이었어. 제구부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자가 다섯씩이나 되니까. 거기다 수석까지 있는데 설마 무슨 일이라도 날까 싶었거든. 물론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내가 벌인 일이 아니라서 딱히 별 관심도 없었고.”

나자들의 편에 서면 그땐 정말 변명할 여지가 없는 거였다. 그래서 웬만하면 끼어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만약에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그땐….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볼게.”

윤태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내 편 안 할래?”

피 칠갑을 한 소년이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안 해.”

“알았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흘러나온 대답에 윤태희가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들어 탈을 단단히 고쳐 썼다. 다시 화살이 날아들었다. 윤태희는 보란 듯이 손을 휘둘렀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돌풍이 일었다.

“영신아. 이제 어떡할까.”

이영신은 말이 없었다. 결국 기절했나. 혀를 차던 윤태희가 돌풍에 몸을 싣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감췄다. 발이 묶인 재겸이 주변의 기척을 날카롭게 훑을 때였다.

“일단 이건 압수.”

뒤쪽에서 손이 쑥 튀어나왔다. 아직 화살이 만들어지기 전이었고, 활을 쏘기에도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윤태희는 짧은 시간, 정확하게 활의 허점을 간파하여 틈을 노렸다.

시위를 메기던 재겸이 몸을 옆으로 틀었으나 발목이 묶여 뒤로 완전히 도는 것은 무리였다. 윤태희는 시위를 잡은 재겸의 손목을 단숨에 비틀었다. 엄청난 악력이었다.

당장은 잡은 시위를 놓치게 만들어 화살을 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인 듯했다. 그에 손목이 꺾이며 팽팽하게 당겼던 시위가 허무하게 풀렸다. 재겸은 시위를 놓친 쪽의 팔꿈치로 뒤에 서 있는 윤태희의 명치를 가격했다.

아니, 가격하는 척했다. 공격을 예상한 윤태희가 그대로 몸을 물리며 팔꿈치를 피할 때였다. 재겸은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활대를 길게 잡더니 냅다 후려쳤다.

빠악-!

활대가 머리를 강타했다. 흡사 배트를 휘두르듯 무자비한 스윙이었다. 그에 윤태희가 미끄러지듯 뒤로 멀찍이 밀려났다. 얼굴에 쓰고 있던 탈이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

휘청거리던 윤태희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오만상을 쓰며 머리를 짚었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발이 묶인 상황에서 활대가 부러지면 끝이다. 사려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무모하게….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골이 띵했다. 귀에서 강렬한 이명이 울렸다. 윤태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재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시위를 힘껏 당길 때였다.

찰칵.

엉뚱한 셔터음과 함께 난데없이 플래시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재겸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화살을 메긴 시위는 팽팽하게 당겨져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했다. 아니, 진작에 튀어 나갔어야 했다. 하지만 시위를 움켜쥔 손은 그대로 멈춘 상태였다. 윤태희를 겨누고 있는 지금 이 상태에서 손을 놓기만 하면 되는데, 어째서….

“…….”

손이 꿈쩍도 하질 않는다.

“나, 나리…?”

메산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재겸을 불렀다. 하지만 재겸은 메산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입을 열고 눈을 깜빡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활시위를 당긴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팔을 타고 뜨거운 피가 콸콸 흐르고 있었고, 고통 또한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만은 불가능했다.

그때, 휘청이던 윤태희가 뒤늦게 몸을 바로 세웠다. 골이 울려 눈앞이 핑핑 돌아 고개를 내저었다. 얼굴을 찡그린 채 눈가를 타고 흐르는 피를 거칠게 문질러 닦을 때였다.

“윤, 윤 수석…!”

나무 뒤에서 팔만 내민 채 흙바닥에 엎드려 있던 이영신이 힘겹게 입을 달싹였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제구를 쥐고 있던 왼손이 사시나무처럼 경련하고 있었다.

손에 든 제구는 일회용 필름 카메라였다.

셔터를 누른 카메라에서 위잉, 소리와 함께 따끈따끈한 폴라로이드 한 장이 인화되어 나왔다. 하얗기만 하던 배경이 점차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사진 속에 담긴 것은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재겸의 흐릿한 모습이었다. 실제의 재겸 역시 사진 속에 찍힌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이영신이 사용한 카메라는 사진에 찍힌 모습 그대로 결박하는 제구였다. 하지만 찍는 사람도 셔터를 누르는 순간 그대로 멈춰 버린다는 반동 때문에 위험 부담이 따랐다. 해서, 이영신 역시 팔만 내민 채 흙바닥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굳은 상태였다. 마지막 보루로 남겨 둘 생각이었으나 판단 착오였다. 그냥 처음부터 이걸 썼어야 했다.

“너….”

인상을 찌푸린 채 재겸을 바라보던 윤태희가 이영신의 손에 들린 카메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아, 하고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영신이 뭘 했는지 단번에 눈치챈 것이다. 윤태희가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피식거리는가 싶더니, 떨어진 탈을 주우려 상체를 숙였다.

“역시 우리 이 수석님이시네.”

이영신이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

“웃지 말고 빨리 좀, 어떻게 해 봐.”

이영신은 필사의 정신력을 발휘해 의식을 놓지 않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그대로 시야가 가물거렸다. 게다가 온 귀기를 실어 셔터를 눌렀던 터라, 저렇게 붙잡고 있을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서둘러 끝내야 했다.

“그래, 이제 뭐 어떻게 하면 돼?”

“일, 일단은 저 활부터 뺏, 아니, 아니야. 그 전에 먼저 동자님을, 아니. 아니다. 아니야.”

당장 뭐부터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가능한 최선의 판단으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최대한 깔끔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아!”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이영신이 눈을 번쩍 떴다.

“윤 수석! 너 지금, 그거 가지고 있어?”

윤태희가 주운 탈을 얼굴에 쓰며 “그거라니?” 하고 물었다. 그에 이영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골랐다.

“그거, 그러니까. 흑망조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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