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53)화 (53/348)

#53

“그거, 그러니까. 흑망조 있냐고!”

윤태희는 순간 멈칫하는가 싶더니 “잠시만.” 하고 중얼거리며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있어.” 슈트 재킷 안주머니 너머로 종이 새를 보관해 둔 사각 케이스의 형체가 만져졌다.

“봐, 지금 여기서 저 녀석을 쓰러트리고 동자님을 데려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쟤, 분명히 당장에 본청까지 쫓아올 거야. 본청에 뽀록 나면 그땐 전부 망하는 거라고. 그렇다고 쟤를 뭐, 어떡할 거야? 지금 그럴 시간도 없어.”

가만히 듣고 있던 윤태희가 반문했다.

“…지금 흑망조를 쓰라는 거야?”

“그래, 그걸로 쟤 기억을 날려.”

“범인한테만 쓸 수 있는 거 아니었나?”

“아니야, 귀재한테도 똑같이 통해.”

흑망조는 본디 범인을 대상으로 쓰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비밀 유지를 위해서 한정 지은 것이고, 귀재는 이 바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므로 딱히 숨길 필요가 없으니 굳이 쓰지 않는 것일 뿐이다.

“확실해? 귀재한테도 써 봤어?”

윤태희가 낮게 물었다.

“당연하지, 그거 만든 사람이 나야. 처음에 개발했을 때 정화부 애들 데려다가 다 실험해 봤어, 그니까 좀 믿어!”

이영신은 지금 이 순간 하늘에 감사했다. 윤태희가 흑망조를 가지고 있는 게 천운이었다. 처음엔 아까워서 주기 싫었다. 한참을 내빼다가 결국 갈취당하다시피 넘겨줬더랬다. 헌데 지금 보니 그때 윤태희에게 흑망조를 내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여기서 흑망조를 쓴다면 굳이 성가시게 상대하지 않아도 소년은 쓰러지고 말 것이다.

소년이 처음 나타난 순간부터 산중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흑망조는 하루 치, 어두웠을 때의 기억을 도려내므로 이후 동자삼의 행방뿐만 아니라 이곳에 동자삼을 구하러 왔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것이다. 오늘 산중에서 있었던 모든 기억이 전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다.

“굉장한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

마침내 탈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윤태희는 슈트 안쪽에서 사각 케이스를 꺼냈다. 메모지 한 장을 떼어 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감탄하듯 입을 열었다.

“흑망조로 기억을 지우면 오해도 사라져…. 거기다 동자님을 무사히 데려갈 수 있고, 우리 무서운 나으리를 따돌릴 수도 있는 거네. 산에서 있던 일은 전부 잊으니까.”

재겸의 눈동자가 거세게 경련했다. 슈트에 피를 닦던 윤태희가 고개를 돌려 재겸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탈 너머로 보이는 서늘한 눈매가 재겸을 예리하게 훑었다.

“들었지?”

윤태희가 손에 든 메모지를 팔랑거렸다.

“어때, 정말 기발하지 않아?”

“…….”

“말했잖아, 넌 나례청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있다고.”

“…….”

윤태희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런 곳이야, 나례청은.”

숱한 상념이 둔해진 머릿속을 파도처럼 휩쓸었다.

안 돼.

재겸은 눈을 돌려 메산이를 쳐다보았다. 메산이는 아까부터 조용했다. 뭔가를 직감한 것처럼. 재겸과 눈이 마주치자, 메산이는 입술을 꾹 다문 상태에서 웃으려고 했다. 아니,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두워서 표정이 잘 보이질 않았다. 메산이가 아주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하세요, 나리.”

재겸이 잇새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안 돼.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화살 끝에는 여전히 윤태희가 서 있다.

“손을 놔, 놓으라고. 놔, 놔. 놔….”

재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부르튼 입술에서 억눌리고 격양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저 자신을 향해 악을 썼다. 채찍을 후려치듯 스스로를 때리는 말이었다. 다친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 손만 놓으면, 이 손을 놓을 수만 있다면.

“놔. 놔. 놔. 놔, 제발 놔, 놓으라고, 놔!”

윤태희가 손바닥 위로 메모지를 올렸다. 후, 부드럽게 숨을 불자 종이가 허공 위에 두둥실 떠올랐다. 이영신이 미간에 쥐어 짜내듯 힘을 주었다. 하지만 초점이 영 흐렸다. 긴장이 풀렸는지 이젠 한계였다. 무너지는 시야에서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낸 종이 새가 태어나고 있었다.

“윤 수석, 나 죽겠….”

“그래, 이제 다 됐어.”

윤태희가 손등을 갖다 대자 완성된 흑망조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흑망조가 살랑거리며 날갯짓을 했다. 손끝을 까딱이자 흑망조가 날개를 접고 튀어 나갈 준비를 했다.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야. 그냥, 운이 좀 나빴다고 생각해. 나로선 이게 최선이니까.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재겸이 눈을 떴다.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섬뜩한 눈동자가 윤태희가 쓴 탈을 노려보았다. 눈에 눈물처럼 피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놔. 놔. 놔. 놔. 제발, 놔….

탈 너머의 시선이 또렷하게 박혀 들었다.

“나자의 이름으로….”

시위를 잡은 손끝이 흔들렸다.

“밤을 몰수합니다.”

흑망조를 발동하는 주문과 함께 윤태희가 엄지와 중지를 딱, 부딪쳤다. 흑망조가 허공을 가르며 돌진하는 순간이었다. 거의 동시에 멈췄던 화살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윽!”

불시에 화살을 맞은 윤태희가 나무에 쾅, 부딪쳤다. 재겸의 발목을 묶고 있던 밧줄이 뚝 끊어졌다. 틀어 막혔던 귀기가 자욱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붉은 귀기. 폭주였다.

“나리, 안 돼….”

메산이가 철퍼덕, 땅바닥에 엎드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굳어 있던 재겸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활을 들고 있던 팔이 힘없이 늘어지더니, 이내 손에서 활이 툭 떨어져 내렸다.

“…….”

털썩 주저앉은 재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한 적막에 휩싸였다. 흑망조가 열심히 날갯짓하며 기억을 쪼아 먹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윤. 수석, 너, 왜….”

흑망조가 향한 곳은 이영신의 머리 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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