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나례청을 부수기 위한 밑그림은 이미 오래전에 완성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그려 온 그림은 어느덧 화룡점정(畵龍點睛)만을 앞두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하게 세운 계획이었다.
남은 것은 단 하나, 눈동자를 그리는 일.
마침내 눈을 얻은 용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지축을 뒤흔들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었으나, 이 일만큼은 유일하게 윤태희의 소관을 벗어나는 일이므로 마땅한 적임자가 필요했다.
윤태희는 보통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할 때면 인간보다는 귀신에게 일을 맡기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이번엔 예외였다. 대단원의 서막을 열어 줄 문지기는 반드시 인간이어야 했다.
그 문은 나례청 내부, 깊숙한 곳에 있으므로. 나례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나자뿐이다. 그것이 바로 ‘후임’이 되어 줄 귀재를 찾아내야만 하는 이유였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능한 장기 말. 자칫하면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일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니 나례청의 나자여서는 안 됐다. 오로지 나를 위한, 나에게만 충성하는.
‘나’의 나자.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소년은 윤태희의 시선을 단숨에 앗아 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 세월의 타성에 젖은 앳된 얼굴. 윤태희는 소년을 집어삼킨 권태와 무기력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처음엔 그저 목표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윤태희는 점차 출처를 알 수 없는 희미하고도 기이한 열의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건 바로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이 궁금증은 욕심이 생겨나려는 징조라는 것을, 윤태희는 모르지 않았다.
인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잘해 주거나 겁을 주거나. 윤태희는 웃음을 가장하는 데 능했다. 그러나 상냥하고 친절한 가식은 소년에 의해서 너무도 손쉽게 벗겨져 버렸다.
나자라는 사실을 들킨 순간부터 소년은 모든 접근을 불허했다. 엄청난 적대감을 드러내며 말을 섞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윤태희는 깔끔히 포기하고 목표를 약간 수정했다.
‘나’의 나자가 되어 주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나례청’의 나자만 되지 않으면 된다.
소년이 자신 스스로를 위해 나자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윤태희는 간신히 틈새를 열어서 소년에게 위기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협박. 회유. 차선책은 각자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서로를 이용하고 움직이는 관계였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게 무용했다.
‘이걸로 네 협박은 무효야, 이 씹새끼야.’
그 순간, 윤태희는 이상한 전율을 느꼈다. 소년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리 달아났고, 공들여 설계한 판은 몇 번이고 뒤집어졌다. 그만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그러니 현명하게 물러나자고. 이영신 말대로 널리고 널린 게 귀재니까….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자꾸.
“너였으면 좋겠어.”
윤태희가 선명한 시선으로 소년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이 역모(逆謀)에 가담해 줄 사람이.”
어둠 속에서 소년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다랗게 변했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게. 원래 이건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윤태희가 조용히 혼잣말을 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자꾸 인력(引力)에 휩쓸리는 느낌이었다. 나례청을 부술 것이라는 계획을 털어놔 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제 발로 약점을 드러내는 꼴이다. 그걸 제일 잘 아는 건 윤태희 자신이었다. 소년이 탐이 났지만, 신뢰할 수 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윤태희는 본디 인간을 믿지 않았다.
“너한테 맞아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윤태희가 관자놀이를 검지로 톡톡 건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뒷일부터 계산하고 생각하고 수를 가늠하는 설계자의 머리는 아까부터 멍했다.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피식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쌤쌤해 줘.”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재겸이 인상을 구겼다.
“내 약점을 줬으니까, 나 좀 지켜 줘.”
상황 파악을 안 하는 건지,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 와중에 윤태희는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재겸은 순순히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더 이상은 속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사람을 가지고 노네.”
평정심을 되찾은 재겸이 낮은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메산이를 납치한 건 네가 한 일이 아니라고? 그래. 그건 믿어 줄게.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오해받은 게 그렇게 억울했어? 내내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꼬리 자르고 선 긋는 시늉 하면 넘어올 것 같았냐?”
윤태희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대꾸했다.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섣불리 누구의 편을 들 수도 없었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동자삼을 풀어 줬다면, 혹은 재겸을 상대할 때 눈에 띄게 훼방을 놨다면, 틀림없이 나자들은 윤태희를 수상히 여겼을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나자’답지 않으므로.
“웃기지 마.”
나례청을 부순다는 터무니없는 소리에 혹할 정도로 재겸은 바보가 아니었다. 말 한마디에 휘둘리는 것은 사양이었다. 재겸이 시위를 고쳐 잡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저를 꾀어내기 위해 꾸며 낸, 동료들까지 동원해서 함께 짜고 치는 연극이라면….
그때, 윤태희가 대뜸 고개를 숙였다.
“잠, 시만.”
대화를 중단한 윤태희가 갑자기 술 취한 사람처럼 정신없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재겸이 손에 쥔 시위를 고쳐 잡을 때였다. 윤태희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마주 선 재겸을 향해 기울었다.
“뭐 하는 거야.”
윤태희가 재겸의 어깨에 이마를 박았다. 딱딱한 탈이 어깨에 부딪치며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귓가에 거친 숨결이 흘러들었다. 그에 재겸이 흠칫하며 윤태희를 밀어 냈다. 윤태희가 재겸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윤태희의 손은 하얗게 질려서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 으….”
윤태희가 신음하며 다른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마구 쥐어뜯었다. 다친 손이었지만 부러진 손가락이 아픈 줄도 몰랐다. 피 묻은 손아귀 안에서 진회색 슈트가 구겨졌다. 재겸이 윤태희를 거칠게 밀어 내려는 순간이었다. 그보다 한발 빠르게 윤태희는 알아서 재겸의 발치로 무너졌다.
“…….”
재겸은 무감정한 시선으로 윤태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윤태희가 무릎을 꿇고 양팔로 땅을 짚더니, 흙을 움켜쥐듯 괴롭게 땅을 긁었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윤태희는 갑작스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윤태희가 땅을 짚고 있던 손 하나를 입가 근처로 가져갔다. 덜덜 경련하는 손끝은 살갗이 까져서 피가 맺혀 있었다. 윤태희가 희미하게 신음을 흘리는가 싶더니 낮게 잔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컥, 쿨럭….”
윤태희가 갑자기 울컥, 피를 토했다. 탈 안쪽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나왔다. 순간 재겸은 멈칫했다. 윤태희에게 겨누고 있던 활을 거둬 내고,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나, 나리. 혹시 아까 전에 화살에 맞아서…?”
놀란 메산이가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아니. 화살을 맞는다고 피를 토하진 않아.”
재겸은 윤태희가 쓰고 있던 탈을 벗겨 냈다. 반듯하던 맨얼굴은 고통으로 인해 힘겹게 일그러져 있었다. 얼굴을 확인하자 꾸며 내거나 흉내를 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계약을 위반했기 때문이라오.”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재겸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옆에 있던 메산이도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재겸의 시선이 밤하늘로 향했다. 여태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비마가 천천히 윤곽을 드러냈다.
“너, 안 갔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비마가 허공에서 둥실거렸다.
“진귀한 구경을 눈앞에 두고 어찌 그냥 돌아갈 수가 있겠소.”
재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싸움 구경처럼 재미난 일도 없지. 하물며 다른 이도 아닌 공자가 직접 나서는 투전이니, 당최 발길이 떨어져야 말이오. 얌전히 엿보기만 했으니 성내지는 마시오. 나로선 공자를 상대할 재간이 없소.”
비마가 갈기를 살랑이며 말했다.
“계약을 위반했다는 건 무슨 소리야?”
다행히 소년은 비마의 눈요기를 딱히 꾸짖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신 화두를 틀어 비마가 거들었던 말에 질문을 던졌다.
“나례청에 귀속되는 모든 나자는 피의 계약을 맺는다고 알고 있소. 그 내용인즉슨, 같은 나자를 상대로 위해를 가하거나, 예고 없이 귀기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오.”
재겸이 비마를 올려다보았다.
“만약 이 금기를 어길 경우엔 죽음과도 같은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된다고 들었소. 자세한 내막은 아는 바가 없으나 일단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요.”
재겸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
메산이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는 재겸의 옷을 움켜쥐었다. 재겸은 고개를 틀어 피를 토하고 있는 윤태희에게 시선을 던졌다. 윤태희는 숨죽인 채 앓고 있었다.
설마 모르고 벌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냥. 개수작.’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던 것치고는 꽤나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셈이었다. 딱히 동정심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그저, 조금 혼란스러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