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56)화 (56/348)

#56

비마가 하품을 하듯이 우렁찬 투레질을 했다.

“공자. 이쯤에서 상황을 마무리하는 것이 어떻소. 어서 뜻대로 그자를 처리하시오. 이미 밤이 깊었소.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재미난 구경을 했으니 그 보답으로 왔던 곳까지 데려다주겠소.”

비마는 달이 뜨면 잠자리에 든다. 말없이 서 있던 재겸은 손에 든 활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붉은 귀기가 파도처럼 너울대고 있었다. 귀기가 폭주한 이상 윤태희의 숨통을 끊는 것은 쉬웠다. 거기다 때마침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기회라면 좋은 기회였다. 귀기가 한층 살벌해졌다.

“나, 나리….”

메산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재겸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했다. 죽음과도 같은 끔찍한 고통쯤이야 놀랍지도 않다. 자신도 많이 겪어 봤던 것이니 대수로울 것은 없었다. 윤태희로부터 몇 걸음 뒤로 물러선 재겸이 발을 멈췄다.

비마가 태연히 물었다.

“죽일 생각이오?”

“응. 죽일 거야.”

재겸은 숨을 크게 내쉬고 손에 들고 있던 활을 들었다. 화살을 메기고 시위를 당겼다. 최적의 사정거리. 화살 끝엔 윤태희가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믿자. 윤태희가 나자라는, 증명된 사실에만 집중해야 했다. 그에 걸맞은 협잡꾼에 쓰레기였다. 윤태희는 저를 속이고 협박했다.

‘죽음과도 같은 끔찍한 고통.’

마침내 붉은 귀기를 두른 화살이 튀어 나갔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박혀 들었다. 화살이 날아간 방향에 시선을 두고 있던 비마는 한참 만에 고개를 돌려 재겸을 응시했다. 재겸은 무표정한 낯으로 팔의 길쭉한 자상 안으로 활대를 넣었다.

“…….”

“…….”

멍하니 얼어붙어 있던 메산이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모든 게 끝났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치유를 하기 위해 메산이가 손바닥을 펼쳤다. 재겸은 아까와 다르게 메산이의 손길을 내치지 않았고, 메산이가 내보내는 빛무리를 받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공자는 성미가 고약하오. 알고 있소?”

비마가 말했다. 어둠을 활보하는 귀마의 예리한 눈은,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윤태희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화살은 바로 옆 나무를 뚫고는 그대로 통과했다.

“아니, 모르겠는데.”

“화살이 빗나갔잖소.”

“…….”

침묵하던 재겸이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실수.”

그렇게 말한 재겸이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폭주가 길어지며 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치유에 돌입했던 메산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뒤꽁무니를 부랴부랴 따라왔다.

재겸은 윤태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윤태희의 넥타이 자락을 험하게 잡아당겼다. 화살을 피할 겨를도 없이 가만히 휘몰아치는 고통을 삭여 내던 윤태희가 힘없이 끌려왔다. 윤태희가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느리게 떴다. 시선이 정확히 맞물렸다.

“그리고 나는, 두 번 실수는 안 해.”

“…….”

재겸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었다. 물론 역할은 반대였지만. 윤태희는 소년의 말을 알아들을 정신은 남아 있었다. 까무러치는 고통 속에서도 윤태희의 눈동자는 선명하고 고요했다.

“다음엔 여기야.”

“…….”

재겸이 손가락을 튕겨 윤태희의 이마 정중앙을 때렸다. 가벼운 손길이었는데도 머리가 띵했다. 윤태희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웃음이 흘러나왔다. 미련 없이 넥타이를 놓자 윤태희가 그대로 쓰러졌다.

손을 떨쳐 낸 재겸이 한두 걸음 물러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걸음이 휘청거렸다. 재겸의 허리춤에 답싹 달라붙어 정신없이 빛무리를 쏟아 내던 메산이가 울먹거렸다.

“나, 나리! 괜찮으세요?”

재겸이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어지러워.”

까만 밤하늘이 가물거리는 시야로 쏟아져 내렸다. 어느새 꽉 찬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약속대로라면 달을 보는 순간 잠에 빠져야 했다. 하지만 아직 비마가 깨어 있어서인지 졸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째선지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캥캥! 캥! 캥캥!

어둠 너머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메산이가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 나리! 저기 뒤에…!”

풀숲에서 황소 크기에 버금가는 여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신비로운 은색 털을 가진 여우는 가볍게 땅을 박차고 허공을 날아올랐다. 몇 번이나 연달아서 재주를 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인간의 형상으로 변해 그대로 땅을 밟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정주 님!”

“메산아! 재겸아!”

정주가 경황없는 발걸음으로 허둥지둥 달려왔다. 메산이의 전화를 받자마자 곧바로 출발했으나 제일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건물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한테 붙잡혔던 것이다.

이층집으로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재겸과 연락을 시도해 봤으나 허사였다. 간신히 뿌리치고 차에 올라탔으나 그대로 꼬리가 따라붙어서, 어떻게든 기자들을 따돌리느라 같은 곳을 빙빙 돌아야 했다.

결국 나중엔 참다못해 차를 버리고 달렸다. 야산에 곧바로 몸을 숨기고 산맥 줄기를 따라 달리고 또 달려서 올 수 있었다. 분투의 여정을 증명하듯 정주의 꼴은 엉망이었다. 정주가 주변을 살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정경은 끔찍했다. 인간 몇 명이 시체처럼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통째로 꺾여 나간 나무며, 여기저기 꽂혀 있는 화살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멀쩡해 보이는 건 메산이뿐이었다.

“재겸아…!”

정주는 피를 뒤집어쓴 채 누워 있는 재겸을 보더니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정주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붉은 귀기가 온몸을 감싸고 있다. 구태여 상황을 묻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갔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어. 전부 나 때문이야.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너희들 곁에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정주가 무릎으로 걸어 재겸에게 다가왔다. 떨리는 손이 피로 얼룩진 뺨에 닿았다. 환한 달빛을 받으며 대자로 누워 있던 재겸은 멀뚱멀뚱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울음 섞인 사과를 멍하니 흘려들었다.

“나중에 얘기해. 지금은,”

재겸이 허공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집에 가고 싶어.”

일으켜 달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정주는 눈물을 닦으며 메산이를 쳐다보았다. 메산이가 울먹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피에 젖은 재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여태껏 허공에 떠 있던 비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땅에 내려왔다. 올라타기 쉽게 앞다리를 구부려 상체를 숙여 주었다. 뒤늦게 비마를 발견한 정주가 눈을 크게 떴다.

“비마? 설마… 너, 악몽을 샀어…?”

비마는 서둘러 대답했다.

“올 땐 그랬으나 갈 땐 공짜요.”

두 발로 선 재겸은 실없이 웃었다. 평소엔 근엄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괜한 불똥이 튈 것 같으니 부랴부랴 대꾸하는 꼴이 재밌었다. 웃을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웃기네……. 그렇게 생각하던 재겸이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정주가 황급히 재겸을 받쳐냈다.

“나, 나리?”

“재겸아!”

재겸이 느릿느릿 턱짓을 했다.

“공짜니까 쟤나 데려다 줘….”

정주와 메산이, 그리고 비마의 시선이 재겸이 가리킨 방향으로 꽂혀 들었다. 나무에 비스듬히 기댄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진회색 슈트. 메산이가 눈을 크게 뜨고 재겸을 쳐다보았다.

정주가 물었다.

“저 사람, 누군데?”

재겸은 눈을 감으며 느리게 대답했다.

“…우리 학교 사서.”

그 말을 끝으로 재겸은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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