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잠시 정신을 놓았던 윤태희가 눈을 뜬 것은 장대한 밤하늘 위에서였다. 손만 뻗으면 금세 닿을 듯한 거리에서 또렷한 하현달이 따라오고 있었다. 숨통을 조르고 심장을 난도질하는 듯한 선명한 고통에 윤태희가 이를 악물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부드러운 갈기가 뺨을 쓸고 지나갔다. 비현실적인 감각 속에서 윤태희는 자신이 말의 잔등에 올라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을 난다는 귀마.’ 윤태희는 비마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아찔한 높이에 놀랄 법도 하건만 윤태희는 고요했다.
“깼소?”
밤하늘을 달리던 비마가 아는 척을 해 왔다. 아득한 발밑을 내려다보던 윤태희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비마가 대답했다.
“당신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는 길이오.”
그러면서 자신은 원래 아무에게나 잔등을 내어주지 않으며, 특별히 소년의 요청이라 이번에만 태워 주는 것이라며 고고하게 생색을 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비마의 생색이 무색하게, 윤태희는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 줄 것을 부탁했다. 나자들이 자신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사라졌다간 틀림없이 추궁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곁에 함께 있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현장에 다시 돌아온 윤태희는 제일 먼저 땅을 굴러다니는 종이쪼가리부터 치웠다. 나자들의 몸을 비롯해 곳곳에 박혀 있던 화살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소멸된 듯했다. 흑망조의 잔해를 비롯해 정황을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될법한 단서들은 전부 없앤 뒤, 윤태희는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나자들이 알아야 되는 사실은 동자삼이 사라졌다는 것. 오직 그것뿐이어야 한다. 당연히 윤태희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나무에 기대어 앉은 윤태희는 밤새 몇 번이고 정신을 잃었으며, 혼절했다가 깨어나길 반복했다.
나자 한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을 상대로 귀기를 썼다. 거기다 수석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금기를 어긴 대가는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었다. 심장을 난도질하는 듯, 간헐적으로 찾아오던 끔찍한 고통은 아침이 되어서야 아주 조금씩 잦아들었다.
시간이 흘러 나자들이 하나둘씩 눈을 떴다. 나자들은 눈을 뜨자마자 몸에 흉이 들었음을 알아차렸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제구부 나자들이 끙끙 신음하며 혼란스러워했다. 이영신을 비롯한 나자들의 기억은 신 주임이 동자님의 발목을 자르기 위해 도끼를 들던 그즈음에서 뚝 끊겨 있었다.
나자들은 아무래도 동자님한테 당한 것 같다며, 노한 동자삼이 모두에게 신벌을 내리고 도망친 것 같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영신은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신 주임 혼자만 저렇게 얻어맞아 피떡이 됐냐며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다고 했다.
“동자삼은 인간을 해하지 않는 영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영신의 말에 나자들이 술렁거릴 때였다.
“모르지. 언제나 예외는 있으니까.”
내내 침묵하던 윤태희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내놨다. 그러나 어디에 붙여도 그럴듯한 말이었다. 아리송한 한마디에 무수한 가능성의 지평이 열렸다. 이영신은 할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을 붙잡고 늘어져 봤자 힘만 빠졌다. 어차피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영신과 나자들은 본청으로 복귀하기로 했다. 그냥 다친 것도 아니고 흉이 들었으니 정화부의 씻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동자삼을 데려가려던 계획은 실패했고, 이 상태로 동자삼의 행적을 좇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동자님을 너무 만만히 봤나 봐.’ 이영신은 아픈 몸을 간신히 꿈틀거리며 본청 상황실에 연락해 지원을 요청했다.
“저어, 나례청 제구부 제1팀 소속, 나자 이영신입니다….”
이영신은 실수로 신목(神木)에 손을 댔다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뻥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에 휴대폰 너머로 상황실 나자가 황당하다는 듯이 ‘예?’하고 소리를 냈다. 마치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느냐고 묻는 듯한 어투였다. 이영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억울했지만 사건을 묻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쪽팔림은 한때일 뿐이다. 무려 동자삼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숨겼고, 독단적으로 움직이다가 보기 좋게 동자삼을 놓쳤으며, 결국엔 동티까지 옮았다는 사연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다면 본청은 제구부 제1팀을 그대로 해산시킬 게 불 보듯 훤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모두가 고통을 호소하며 본청의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윤태희가 작게 신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 어디 가? 너도 본청 가서 치료받아야지.”
“안 돼. 그럼 내가 같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잖아.”
“그게 왜?”
“영신이 네가 실수하는 건 안 이상하지만, 내가 실수하는 건 이상하거든. 나까지 당했다는 걸 알면 본청에서 의심해.”
묘하게 기분이 나쁘면서도 동시에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제구부 제1팀은 평소 본청 안에서도 구멍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기 때문에 그런대로 핑계가 통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윤태희가 끼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축역부 수석이 신목 정도에 당할 리는 없으니까.
윤태희가 휘청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같이 덤터기 쓰긴 싫으니까 입단속이나 제대로 해 줘.”
이영신이 면구스러운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당, 당연하지. 너한텐, 절대 피해 가는 일 없도록 할게….”
“그래, 나중에 연락할게.”
“진, 진짜 가려고? 어? 그 몸으로?”
흉이 든 몸으로는 웬만해선 꿈쩍도 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윤태희는 본청 나자들과 마주치기 전에 가겠다며 기어코 자리를 떴다. 나자들은 두 다리로 비틀비틀 산을 내려가는 축역부 수석의 뒷모습을, 흡사 괴물을 보듯이 쳐다보았다.
“저게 사, 사람이냐….”
구조 인력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이후 본청 치료실로 긴급 이송된 제구부 제1팀은 정화부 나자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최소 2주는 씻김을 받아야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절망적인 진단이 내려졌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제구부 부장은 길길이 날뛰며 사자후를 내질렀다.
“그래, 결국 너네가 일을 쳤구나. 응, 이 무법자 새끼들아!”
제1팀은 사이좋게 병상에 누워 한 시간 가까이 상사의 쌍욕을 들어야 했다.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하다니 제정신이냐, 언제 한 번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상부에 허가받으라는 말은 언제쯤 들어 처먹을래, 부적은 어따 두고 국 끓여 먹었냐….
그 결과, 이영신을 비롯한 제구부 제1팀 전원에게 시말서 제출과 더불어 1개월간의 근신 명령이 떨어졌다. 한동안은 꼼짝없이 누워 지내게 생겼으나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망나니들은 서로를 다독였다. 동자삼을 놓친 게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후일을 기약하며 구호를 지켜 낸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우리 사랑 영원히♡’
그렇게 동자삼 납치 사건은 일단락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