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정주는 모든 스케줄을 잠정 중단했다. 난데없이 촬영장을 뛰쳐나간 뒤 그대로 연락이 두절된 톱스타에 대한 추측 기사는 포털 메인을 장식했다. 당황한 소속사는 정주의 행방을 뒤쫓는 한편, 건강 악화를 이유로 들어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허사였다.
‘정주 잠적’이라는 키워드는 연일 검색어 상위권을 오르락내리락했으며, 기자들과 파파라치는 정주가 사는 레지던스 앞에 장사진을 쳤지만, 그들은 정주의 머리털 하나 목격할 수 없었다.
정주는 레지던스가 아니라 산 밑에 자리한 이층집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산이를 통해 전후 상황을 전해 들은 정주는 스스로를 모질게 자책하며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이들이 위험에 빠졌는데 마음대로 구하러 가지도 못했다. 촬영을 하고, 메이크업을 받고, 대사나 외우고 있었더랬다. 정주가 원한 삶은 이런 게 아니었다.
지난밤, 집으로 돌아온 정주는 침입자의 무례한 발자국이 가득한 거실 풍경에 사색이 되었다. 한번 표적이 되었으니 더 이상 이 집은 안전하지 않았다. 위기감이 엄습했다. 집을 옮겨야만 했다. 정주는 재겸이 깨어나기만 하면 당장 이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재겸이 스스로 눈을 뜰 때까지 정주와 메산이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게다가 재겸은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밤만 되면 악몽에 시달리느라 몸을 뒤척이고 신음했다. 정주와 메산이는 재겸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말을 걸어 보기도 하고, 땀에 푹 젖은 몸을 정성껏 닦고, 악몽에 허우적거리며 헛소리를 내뱉는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 울고 아파했다. 둘은 어서 빨리 비마와 약속한 사흘이 지나가기를,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게 1년 같은 하루가 지났다. 앞으로 두 번의 밤을 더 견뎌야 했다. 저녁이 되자 정주는 얼굴을 가리고 외출 준비를 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재겸을 위해 죽이라도 끓일 생각이었다.
메산이는 제가 곁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식재료를 사러 나가는 정주를 씩씩하게 배웅했다. 그리고는 방으로 들어가 하염없이 저의 나리를 바라보았다. 아직 악몽이 시작되지 않았는지, 재겸은 평온한 표정으로 미동조차 없이 누워 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똑똑….
어디선가 희미하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에 메산이가 멈칫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벌써 오신 걸까? 메산이는 방에서 나와 부리나케 현관으로 향했다.
손에 짐이 많으셔서 문을 못 여시나? 현관 앞에 선 메산이는 평소처럼 문을 열려다가 흠칫, 손을 멈췄다. 정주 님이라면 문을 열어 달라고 말하셨을 텐데. 한 번 당한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문득 의심이 들었다. 혹시 문을 열었다가 저번처럼 나자들이 들이닥치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덜컥 겁이 났다. 메산이는 잔뜩 숨을 죽인 채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더 이상 노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메산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거봐! 정주 님이 아니야! 덕분에 확신이 섰다. 필시 나자들이 또 오고야 만 것이다.
메산이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메산이는 입을 틀어막고 뒷걸음질을 쳤다. 문을 주시한 상태로 현관 복도를 지나 거실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문득 기이한 소름이 들었다.
마치 누가 쳐다보고 있는 듯한….
메산이는 삐걱거리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당과 이어지는 거실 한 면의 커다란 미닫이창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메산이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밖에 누군가 서 있었던 것이다.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상대는 입 모양으로 ‘안녕.’ 하더니 손끝으로 창문을 톡톡 건드렸다.
‘나예요.’
정체는 한쪽 팔에 반 깁스를 한 윤태희였다.
하얀색 브이넥 반팔 티를 입고 어깨에 검은색 블레이저를 걸친 윤태희는 한눈에 보기에도 수척해 보였다. 멀쩡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해 온다. 까칠해진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예민해 보였다.
어찌나 놀랐는지 심장이 벌렁거렸다. 메산이가 주춤거리며 미닫이창에 가까이 다가갔다. 유리창에 찰싹 달라붙어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마당 곳곳을 열심히 살펴볼 때였다.
그 이유를 눈치챈 윤태희가 뭐라 말을 건넸으나 잘 들리지가 않았다. 메산이가 창틀 틈새로 귀를 바짝 대자, 윤태희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메산이가 하는 대로 창틀에 입술을 가까이 붙였다. 창틀에 대고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듯이.
“그 사람들은 여기 못 와요. 당분간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할 테니까. 적어도 한 달 동안은 움직이지 못할 테니 안심해요.”
메산이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이유는 몰라도 그냥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날의 상황을 비추어 봤을 때, 어찌 됐든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저의 나리가 화살을 비껴 쐈으니, 괜찮을지도….
‘열어 줘.’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메산이와 마주 선 윤태희는 씩, 웃으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메산이는 조심스럽게 미닫이창을 열었다. 윤태희가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왔다.
“잘 지냈어요?”
윤태희가 상냥히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태연히 고개를 돌려 가며 집 내부를 구경한다. 메산이가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여, 여긴 어쩐 일로….”
“뭐 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대답과 동시에 윤태희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블레이저로 손을 가져갔다. 블레이저를 살짝 젖히더니, 깊게 파인 브이넥 티셔츠를 옆으로 당기듯이 벌렸다. 길게 뻗은 쇄골 옆으로 탄탄한 어깨가 드러났다. 재겸이 쏜 화살에 맞았던 쪽이었다.
어리둥절해진 메산이가 눈을 깜빡거릴 때였다. 다친 어깨는 치료를 받았는지 흰 붕대가 감겨 있어서 꿰뚫린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잘 봐요.” 윤태희가 턱짓으로 어깨를 가리켰다.
“흉이 들었어야 하는데. 깨끗하죠.”
윤태희의 말에 메산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그랬다. 자세히 보니, 검게 물들어 있어야 할 주변 살갗이 깨끗했던 것이다. 어깨를 내보이던 윤태희가 흘러내린 블레이저를 추슬러 올렸다.
“혹시 동자님이 정화해 줬어요? 아니죠?”
“예? 저, 저는 아무것도 안, 안 했는데….”
“그래요, 그러면 더 이상하잖아요. 똑같이 화살에 맞았는데 나만 멀쩡한 거니까.”
이틀 전, 힘겹게 상황을 정리한 윤태희는 학교 출퇴근을 위해 임시로 마련해 둔 거처로 돌아왔다.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왔는지도 모를 만큼 몸이 아팠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손가락 세 개가 부러지고 이마가 찢어졌다. 가장 큰 문제는 어깨였다.
화살에 맞아서 생긴 상처는 둘째 치고 흉부터 씻어 내야만 했다. 정화부의 손을 빌릴 순 없는 상황이니 알고 지내는 만신에게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며 힘겹게 옷을 벗고 상처를 확인했을 때였다. 검게 물들었어야 할 어깨는 깨끗하기만 했다.
흉에 들어 아픔을 호소하는 나자들과 매한가지로, 윤태희 역시 금기를 어긴 대가로 혹독한 고통을 느끼고 있던 와중이었으므로 어깨를 확인하기 전까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똑같이 화살에 맞았으니 응당 남들처럼 동티가 났겠거니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의문을 뒤로한 채 윤태희는 하루를 꼬박 앓았다. 눈을 떴을 땐 어느덧 해질녘 무렵이었다. 극악스럽던 고통은 비로소 물러난 상태였다. 윤태희는 병원에 들러 간단한 처치를 받은 뒤, 곧바로 소년을 만나러 왔다.
어쩌면 간밤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틈을 타서 동자삼이 정화를 해 주고 떠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자삼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럼 직접 화살 쏜 사람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왜 나한테는 통하지 않았는지.”
윤태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메산이가 고개를 돌려 닫힌 방문을 힐끔, 보더니 황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안 돼요.”
“왜 안 돼요?”
“나리께선 지금 몸이 안 좋으셔요.”
윤태희가 멈칫하며 방문에 시선을 던졌다..
“치유 안 했어요?”
메산이는 금세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힘없이 웅얼거렸다. “치유는 했는데 의식이 없으세요.” 윤태희가 물었다. “왜요?” 그에 메산이가 우물쭈물하며 그 이유를 말해 주었고, 윤태희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설명을 끝낸 메산이가 울적한 얼굴로 말했다.
“그, 그러니까 나중에 나리께서 깨시거든 그때….”
“그래요. 그럼.”
윤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병문안.”
“예에… 예?”
메산이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나리 병문안 온 걸로 해요.”
“하, 하지만….”
메산이는 말문이 막혔다. 왜냐면 윤태희가 더 아파 보였다….
“오늘은 그냥 얼굴만 보고 갈게요.”
윤태희가 닫힌 방문을 향해 몇 걸음을 다가서자, 당황한 메산이가 허둥지둥 윤태희의 앞을 막아섰다. 일단 집에 들이긴 했지만 의식이 없는 저의 나리와 대면시키자니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하필 정주 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사달이라도 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앞을 막아선 메산이가 안절부절못할 때였다.
윤태희가 불쑥 손을 들었다. 메산이가 흠칫 놀라며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예상과는 달리 뒤통수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밀어 내려는 줄 알았는데. 메산이가 얼떨떨한 얼굴로 윤태희를 올려다볼 때였다. 윤태희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지난번처럼 무릎을 굽히며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긴 아쉬워서 그래요.”
메산이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정 안 된다면 어쩔 수 없고요.”
다정한 목소리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메산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금, 금방 나오셔야 해요….” 걱정 어린 당부와 함께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윤태희가 “고마워요.” 웃으며 말했다.
윤태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섰다. 불이 꺼진 방 안은 어두웠다. 윤태희는 문을 닫고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침대 앞으로 다가가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소년이 보였다. 윤태희는 소년의 고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창문을 반쯤 가린 커튼 틈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었다.
윤태희는 옅은 어둠 속에서 소년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앳된 소년은 평온해 보였다. 불현듯 팽팽히 시위를 당기던 표정이 생각났다. 수세에 몰렸음에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 지킬 수 없다면 버리고 되찾아 오겠다는 당돌함, 그리고 흔들림 없이 또렷한 눈동자는 윤태희를 전율케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방비하게 풀어진 얼굴을 보니, 윤태희는 왠지 묘한 기분이 되었다.
“…….”
고요한 재겸의 낯을 찬찬히 살펴보던 윤태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깃털처럼 얼굴에 닿았다. 윤태희의 손끝이 소년의 얼굴 옆선을 따라서 아래로,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둥근 이마에서 시작해 미간에서 떨어지는 곡선. 반듯한 콧날을 지나 묘한 입체감이 느껴지는 인중. 그리고 입술에 이르자 희미하고 따듯한 숨결이 느껴졌다. 홀린 듯이 얼굴선을 훑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윤태희가 문득 숨을 멈췄다.
소년의 얼굴에 손을 가져간 건 순간의 충동이었다. 손을 대 보고 싶다고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생각해 보면 이영신에게 흑망조를 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윤태희는 언제나 뒷일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타입이었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산을 끝낸 뒤에야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흑망조를 날린 것은 계산을 마치기도 전에 움직인, 한 호흡 앞서간 도박이었다. 물론 수습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벌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자칫하다간 소년의 손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삶을 지탱하는 욕망이랄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례청을 부수는 것. 목표는 오직 그 하나였다. 그러기 위해 끌어들일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윤태희는 소년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되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신에게 흑망조를 날려 보낸 스스로의 행동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윤태희에게 ‘충동’이란 낯선 감각이었다. 자꾸만 전에 없던 충동을 느끼는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설계자의 머리를 보란 듯이 배반하는 이 불가사의한 충동이 거슬렸다. 충동의 진원지는 오롯이 소년. 소년이었다. 마찬가지로 불가사의한.
윤태희는 불현듯 깨달았다. 굳이 소년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지만 굳이 소년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충동을 만들어 냈음을. 불현듯 소년의 얼굴선을 만져 보고 싶었고, 찰나의 순간에 휩쓸려 버렸다. 그렇다면 충동을 빚어내는 이 마음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으….”
그때, 재겸이 갑자기 눈썹을 찌푸리며 신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