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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9)화 (59/348)

#59

그때, 재겸이 갑자기 눈썹을 찌푸리며 신음을 했다. 그에 윤태희가 곧바로 손을 떼며 뒤로 물러섰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킨 것처럼,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의식이 없다고 들었는데….

옅은 어둠 속에서 소년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볼 때였다. 다물렸던 입술이 달싹이며 그 틈으로 희미한 목소리가 잠꼬대처럼 흘러나왔다.

“안 돼, 어디 가….”

윤태희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고요하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재겸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반듯하던 이마 위로 어느새 축축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알 수 없는 애원에 윤태희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대체 무슨 꿈을 꾸길래.

“가지 마. 왜. 왜 그러는데….”

재겸이 천천히 팔을 들었다. 마치 뭔가를 붙잡으려 하는 듯, 허공에 대고 손을 허우적거리는 모양새가 무척 간절해 보였고, 또 괴로워 보였다. 꿈결 속에서 재겸이 작게 흐느꼈다.

“…….”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서늘하고 큼지막한 손바닥이 축축해진 재겸의 이마를 덮었다. 그러자 신음하던 재겸이 스르륵 팔을 내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잔뜩 찡그려진 얼굴이 점차 펴졌다.

“꿈….”

한참 만에 윤태희는 손을 물렸다. 손바닥에 따듯한 물기가 묻어났다. 심장을 울렁이게 만드는 기묘한 온기였다. 블레이저 주머니에 넣어 둔 물건이 떠올랐다.

악몽. 악몽이라. 공교롭게도….

윤태희는 소년의 이마에 닿았던 자신의 손바닥을 얼마간 바라보았다. 문득 손목에 걸치고 있던 팔찌로 시선이 내려갔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흑진주가 반짝거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태희가 팔찌를 손으로 옮겼다.

윤태희는 눈을 감고 영롱한 흑진주 알을 차분히 헤아리기 시작했다. 팔찌에 꿰인 흑진주를 차례대로 매만지다가, 어느 순간 팔찌를 입술에 갖다 대고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흑제야.”

윤태희의 부름에, 꽁꽁 닫힌 방 안으로 난데없이 미풍이 스며들었다. 커튼 자락이 나부끼는가 싶더니 커튼 아래로 난 그림자에서 희미한 형체가 솟아 나왔다. ‘흑제’라고 불린 영귀는 이름과는 정반대로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다. 창문으로 번져 드는 희미한 달빛이 흑제의 백의를 요요히 비췄다.

“부르셨습니까, 태희 님.”

흑제가 그대로 무릎을 꿇어앉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윤태희가 입가 근처로 검지를 세웠다. 쉿. 그리고 손짓을 했다. 이리 와. 그러자 흑제가 몸을 일으켰다. 기척을 죽인 터라 발걸음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윤태희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악몽을 거둬 내.”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흑제가 눈을 들었다. 누구라고 지칭하지도 않았는데, 시선이 침대 위로 향했다. 윤태희의 손길에 잠잠해졌던 소년은 또다시 울먹이며 꿈결을 헤매고 있었다.

흑제는 그림자 속에 기생하는 영귀로, 꿈을 주무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꿈이야말로 현실의 그림자였다. 낮 동안엔 그림자의 형태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어둠이 내리고 밤이 되면 타인의 꿈속을 왕래하고, 엿보고,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대부분의 귀신 또한 인간의 꿈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하지만 흑제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원하는 대로 꿈을 만들거나 조종할 수도 있었다. 언젠가 주경건설 도련님의 혼을 빼돌렸을 때, 부친에게 의미심장한 꿈을 꾸게 하여 암행부 나자에게 일부러 단서를 흘렸던 것도 흑제의 능력 덕분이었다.

윤태희의 말에 흑제는 “예.” 하고 고개를 숙였다. 흑제는 새로나 패현에 비하면 말수가 아주 적은 편이었다. 윤태희가 불러내도 그 이유를 묻는 일이 없었고, 패현과 새로가 으르렁거리며 다툴 때도 늘 방관하며 침묵을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이 소년은 누구이며, 어째서 악몽을 거둬 내려고 하는지, 흔히 할 법한 질문들도 흑제는 하지 않았다. 그저 하라는 대로 받들 뿐이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게 해.”

윤태희는 손끝을 이용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소년의 앞머리를 덧그리듯 넘겨 주고는, 소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을 감고 있을 때만이라도.”

말을 마친 윤태희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

재겸이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나흘이 지나서였다.

“집이네.”

익숙한 천장을 멀뚱멀뚱 응시하던 재겸은 어느 순간,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 반동에 침대가 출렁거렸다. 가만히 앉아 있던 재겸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거렸다. 비마의 악몽을 꾸면 정신이 흐리고 몸이 무겁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번만큼은 정신이 맑았고, 몸도 개운했다. 마치 오래 앓던 열병을 털어 낸 것처럼.

기분 탓인가?

창밖을 보니 산자락을 타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재겸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몸을 더듬거렸다.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러니까, 그날 밤에 폭주를 했고. 정주가 왔었지…….

차분히 기억을 되짚어 보던 재겸이 멍한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때, 침대 머리맡에 있는 협탁으로 시선이 닿았다. 수면 등 옆에 웬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못 보던 물건이었다.

“뭐지?”

재겸은 손을 뻗어 물건을 가져왔다. 반원 모양으로 된 투명한 유리 안에 작은 오두막이 들어 있었다. 이리저리 만지작거리자, 갑자기 돔 안에서 펄펄 눈이 내린다.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물건에 재겸이 눈을 휘둥그레 뜰 때였다. 받침대 근처로 작은 태엽이 삐죽 솟아 있었다. 이건 또 뭐냐. 재겸이 태엽을 잡아당겼다.

띠로롱, 띠로롱, 별안간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재겸이 화들짝 놀라 오르골을 침대 위로 떨어트렸다. 이불에 파묻힌 오르골에선 여전히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작은 오두막으로 펄펄 휘날리는 함박눈은 그칠 줄을 몰랐다. 재겸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오르골을 다시 집어들 때였다.

문 바깥에서 쿠당탕,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닫혔던 방문이 활짝 열렸다. 재겸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메산이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저를 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정주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손에는 웬 대파 한 뿌리가 들려 있었다.

“…….”

“…….”

“…….”

모두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문밖에서 무언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다정한 오르골 선율에 섞여 들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마침내 정주의 손에서 대파가 툭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재겸아-!”

“나리-!”

정주와 메산이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재겸을 향해 다이빙을 하듯이 양팔을 벌리고 와락 안겨 들었다. 하마터면 침대가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에 재겸이 인상을 쓰며 달라붙는 둘을 밀어 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재겸아, 나 누구야? 어? 알아 보겠어?”

“나, 나리, 기다렸, 으허엉, 헝, 엉엉….”

재겸이 결국 짜증을 냈다.

“이거 안 놔? 좀 떨어져.”

재겸의 짜증에도 정주와 메산이는 굴하지 않고 오히려 훨씬 더 힘껏 재겸을 끌어안았다. 오히려 눈물 나게 반가웠다. 평소의 까칠하던 성격 그대로였다. 진짜 깨어난 것이다. 비로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나리! 정신이 좀 드세요?”

“재겸아. 몸은 어때? 응?”

재겸이 심드렁한 얼굴로 눈을 비볐다.

“새삼스럽게 왜들 이래.”

그때, 부엌에서 뭔가 끓어 넘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침대 위에 엎어져 있던 정주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부엌으로 허둥지둥 뛰쳐나갔다. “안 돼!” 그 틈을 타 재겸은 느릿느릿 침대를 빠져나왔다.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서자 비로소 현실감이 느껴졌다.

“나리, 정말로 괜찮으신 거죠? 네?”

메산이가 훌쩍거리며 재겸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응. 괜찮아. 멀쩡해.”

재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나 며칠 만에 깬 거야?”

“오늘로 닷새째예요.”

“닷새밖에 안 지났는데 유난은….”

재겸이 멋쩍게 중얼거렸다. 한 달이라도 된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일찍 눈을 떠서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침대가 아니라 집이 무너졌을지도. 고작 닷새인데 뭐가 그리 반갑다고…….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려고 해서, 재겸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근데 이건 뭐야?”

재겸이 협탁 위에 올려 둔 오르골을 가리켰다.

“아! 그거….”

재겸의 허리춤에 달라붙어 볼을 비비적거리고 있던 메산이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우물쭈물하며 슬쩍, 재겸의 눈치를 보더니 부엌으로 나간 정주의 눈치도 한 번 살폈다.

“그, 그분이 주고 가셨어요.”

메산이는 며칠 전에 정주로부터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크게 혼이 났다. 허락도 없이 ‘그분’을 집에 들였기 때문이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정주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자가 왔다 갔다는 사실을 알고 무섭게 화를 냈다. 문을 열어 줬다고?!

억울한 마음에 그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며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고 말했으나, 메산이는 한 시간 동안 손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어!’ 정주는 재겸과 자신 말고는 절대 믿지 말라며 밤새도록 훈계를 했고, 불청객이 남겨 두고 간 물건을 내다 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메산이는 그러지 못했다. ‘꼭’ 전해 달라고 부탁을 받았으니까.

재겸이 설핏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그분? 누구?”

초대한 적 없던 손님은 메산이와 약속한 대로 잠깐 사이에 방을 나왔다. 그리고는 블레이저 주머니에서 미리 챙겨 온 뭔가를 꺼내더니 메산이에게 전해 주었다. 메산이는 이것이 뭐냐고 물었고, 불청객은 “스티커를 모은 선물이라고 하면 알아들을 거예요.”라는 말을 남겼다. 메산이가 토씨 그대로 말을 옮겼다.

“스, 스티커를 모은 선물이라고 하셨어요.”

재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

말없이 오르골을 바라보던 재겸이 아까처럼 태엽을 건드렸다. 그러자 멈췄던 선율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손에 쥐고 가볍게 흔들었더니 또다시 눈이 펄펄 내린다. 기묘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노랫소리였다. 가만히 노래에 귀를 기울이다가, 재겸이 슬쩍 입을 열었다.

“이거 무슨 노랜데?”

메산이가 눈을 굴리며 기억을 되짚었다. 안 그래도 뭐라고 설명을 해 주셨는데. 뭐라고 하셨더라……. 열심히 머리를 쥐어 짜내던 메산이가 어느 순간 눈을 빛내며 펄쩍 뛰어올랐다.

“<사랑의 꿈>이요!”

“뭐? 뭔 꿈?”

“<사랑의 꿈>이라고 하셨어요.”

재겸의 낯이 오묘해졌다.

“…….”

어느 순간 선율이 끊겼다. 눈이 펄펄 내리는 작은 오두막을 말없이 바라보던 재겸이 다시 태엽을 만졌다. 띠로롱, 멎었던 음악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재겸이 한참 만에 중얼거렸다.

“미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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