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나 씻는다.”
닷새 만에 눈을 뜬 재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샤워를 하는 것이었다. 며칠 내내 악몽에 시달렸더니 개운하게 씻고 싶었다. 재겸은 쫄래쫄래 뒤따라오는 메산이를 물리치고 욕실로 향했다. 그 사이, 정주는 애써 침착한 척을 하며 요리에 열중했다.
큰 사건을 겪었음에도 재겸은 여느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날 밤의 일에 대해서 일언반구조차 없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정말 아무렇지 않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그대로 묻어 두려는 건지. 재겸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듣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정주는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재겸이 지금 당장이라도 떠난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어. 맞다. 계란.”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뒤적이던 정주가 멈칫했다. 계란을 사 온다는 것을 깜빡했다. 정주가 모자와 겉옷을 챙겨 입을 때였다. 때마침 샤워를 마친 재겸이 욕실에서 나왔다.
“어디 가?”
재겸이 물었다.
“아, 요 앞에 가게. 깜빡하고 계란을 안 사 와서.”
재겸이 정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에 정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마주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냥 있어. 내가 갔다 올게.”
뜻밖의 말에 정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뭐?”
“계란 내가 사 온다고.”
“…….”
정주가 얼떨떨한 얼굴로 재겸을 바라보았다. 재겸은 젖은 머리를 털며 방으로 들어가더니 지갑을 챙겨 들었다.
“계란만 사 오면 돼? 더 필요한 건?”
“아… 어, 어. 계란만… 있으면 돼.”
“알았어. 금방 다녀올게.”
재겸이 그대로 현관으로 향하다가,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메산아.”
정주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던 메산이가 화들짝 놀라며 “니예?!” 하고 대답을 했다. 그에 재겸이 피식 웃었다. 정주고 메산이고, 왜 저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구는지 모를 일이다.
“같이 갈래?”
“예?”
“같이 가게에 가겠느냐고.”
메산이가 눈을 깜빡이며 정주를 올려다보았다. 멍하니 서 있던 정주가 황급히 눈짓을 했다. 메산이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해졌다. 메산이가 재겸을 따라 부랴부랴 신발을 신었다.
“네!”
재겸과 메산이는 나란히 대문을 나섰다. 걷는 내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호젓했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지나자 포장된 도로가 나왔다. 저의 나리와 집 앞 가게에 가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멀리 구멍가게가 보이자, 평소처럼 재겸의 손을 잡으려던 메산이가 멈칫하며 손을 내렸다.
나리는 평소와 같으신데. 왠지 어려웠다. 오늘따라 손을 잡자니 용기가 필요했다. 메산이는 망설이다가 손 대신 재겸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에 재겸이 무표정한 얼굴로 힐끔, 옷자락을 움켜쥔 작은 손을 곁눈질했다.
가게 앞에 도착하니 저번처럼 노인 두세 명이 평상 위에서 화투를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 걸터앉아 있던 가게 주인이 재겸과 메산이를 발견하고는 돋보기안경을 추켜올렸다.
“왔어?”
오늘로 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는데 주인은 지난번에 그랬듯이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인사를 해 왔다. 마찬가지로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인자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겸은 간단히 묵례하며 대충 아는 척을 끝낸 뒤, 미닫이 문을 열고 계란을 가지러 갔다. 그 사이, 메산이는 까치발을 들고 냉동고 안을 구경했다. 계란을 가지고 나오던 재겸이 물었다.
“왜. 사 줘?”
메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겸이 냉동고 문을 열었다. 이번엔 메루나는 없고 쭈쭈바만 있었다. 뿡따와 빠삐꼬. 일전에 조영우와 함께 나눠 먹었던 그 쭈쭈바였다.
걘 잘 지내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학교에 안 간 지 꽤 됐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흘려보내며, 재겸은 정주 몫까지 쭈쭈바 세 개를 골라 값을 치른 뒤, 메산이에게 뿡따를 넘겨주었다. 뿡따는 저번에 먹어 봤으니 이번엔 빠삐꼬를 먹어 볼 생각이었다.
“나, 나리. 이게 뭐예요?”
저번과 다른 생경한 형태에 메산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뿡따. 난 빠삐꼬.”
잘 봐. 재겸이 조영우에게 배운 그대로 허벅지에 쭈쭈바를 퍽, 부딪쳤다. 포장지 위쪽이 뜯어지며 꼭지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메산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우아, 감탄사를 내뱉었다.
“봤냐?”
재겸이 장난기가 묻어나는 표정으로 눈짓을 했다. 너도 해 봐, 라고 말하는 듯했다. 메산이도 입을 앙다물고 저의 나리가 알려 준 대로 따라 해 봤다. 퍽! 그러나 힘이 약해서인지 허벅지만 얼얼하고 꼭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메산이가 울상을 지으며 허벅지를 문지르자, 재겸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리 줘, 내가 해 줄게.”
결국 재겸의 도움으로 빠삐꼬의 포장지를 뜯을 수 있었다. 역시. 저의 나리는 뭐든지 다 잘하신다. 포장지를 뜯은 건 재겸인데 뿌듯한 건 메산이였다. 쭈쭈바 유경험자답게 재겸은 꼭지를 바꿔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둘은 사이좋게 서로의 꼭지를 주고 받았다. 꼭지를 맛본 메산이가 감동받은 얼굴을 했다. 재겸이 피식거리며 물었다.
“맛있냐?”
메산이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평상에 앉아 화투를 치는 데 여념이 없던 주인은 어느 순간부터 슬쩍 목을 빼고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동상인가?”
저번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이로써 주인은 재겸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했다. 주인과 눈이 마주친 메산이는 파드득 놀라 재겸의 뒤로 숨었다. 고개를 돌려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겸은, 이내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동생 아닌데요.”
“형제 아니여? 그럼 누구여?”
토씨 하나 달라지지 않은 대화였다.
“그냥 아는 애요.”
재겸이 짧게 대꾸했다.
“그려어.”
주인은 더 묻지 않고 다시 화투판으로 시선을 던졌다. 재겸은 손에 든 빠삐꼬를 만지작거렸다. 바스락 바스락,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
전해져 오는 냉기에 손바닥이 시렸다. 메산이는 평상에 앉은 노인들을 틈틈이 곁눈질하며 열심히 쭈쭈바를 먹었다.
“넌 손 안 시리냐?”
재겸이 문득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나리, 손 시리세요?”
메산이의 물음에 재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응. 나 손 시려.”
재겸의 손에 들려있던 쭈쭈바가 툭, 떨어졌다. 그러자 메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닥에 떨어진 쭈쭈바를 쳐다보았다. 평상에 앉아 있던 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화투를 치다 말고 재겸을 응시해 왔다. 메산이가 의아한 눈으로 재겸을 올려다볼 때였다.
“왜, 왜 그러세요?”
재겸이 차가운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손이 너무 시려서 그래.”
작게 중얼거리며 눈가에 손바닥을 대고 있던 재겸이 갑자기 평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게 주인이 눈을 끔뻑이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재겸이 팔을 내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맞아요.”
“으응?”
뜬금없는 말에 가게 주인이 돋보기안경을 고쳐 썼다.
“제 동생이에요.”
재겸이 중얼거렸다.
“아까 거짓말한 거예요. 그냥 아는 애가 아니고요….”
재겸의 목소리가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냥 아는 애가 아니라요, 제 동생이라고요….”
푹 숙인 고개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턱 끝이 덜덜 떨리는가 싶더니 소년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그에 메산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토끼 눈을 뜨고 저의 나리를 쳐다보았다.
“제 동생이에요… 제 동생이에요….”
평상에 앉아 있던 노인들은 우는 소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제 동생이에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소년은 서럽게도 울었다. 둑이 터진 것처럼 참았던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발치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포장된 도로에 동그란 물기 자국이 어룽어룽 생겨났다. 소년은 팔에 눈가를 묻고 엉엉 흐느꼈다.
“그려어.”
가게 주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한참 뒤에야, 멀찍이 떨어져 있던 메산이가 머뭇머뭇 재겸에게 다가왔다. 메산이가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재겸은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서둘러 눈물을 닦아 냈다. 목에 걸린 울음기를 간신히 삼키며 재겸이 떨리는 숨결을 뱉었다.
“집에 가자.”
재겸이 메산이의 손을 움켜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왔던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재겸은 이를 악물었다. 진정하기 위해, 진정하고 싶어서 애쓰는 것 같았다. 메산이는 말없이 재겸의 손을 힘껏 맞잡았다. 다른 한 손에 들려 있던 뿡따는 어느새 반쯤 녹아 있었다.
“나중에.”
재겸이 훌쩍이며 말했다.
“또 먹고 싶으면 말해. 또 사 줄게.”
“네에.”
메산이도 훌쩍이며 대답했다.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이든지. 재겸과 메산이는 잡은 손을 흔들거리며 산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풀벌레 소리는 여전히 호젓했다.
다정한 저녁이었다.
<끝,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