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64)화 (64/348)

#64

5교시가 끝난 직후, 재겸은 가방을 챙겨 일어서는 조영우를 따라 1층까지 따라 내려왔다. 재겸이 조영우를 이끈 곳은 매점이었다. 재겸은 조영우를 매점 앞에 세워 두고, 빵이며 봉지 과자며 온갖 주전부리를 거의 쓸어 담다시피 한 아름 사 들고 나왔다. 전부 조영우의 몫으로 산 것들이었다.

조영우는 대체 이게 뭐냐며 어리둥절했지만, 재겸은 “돈이 남아돌아서 그래.” 하고 이상한 핑계를 대며 조영우의 품에 간식을 몽땅 안겨 주었다. 받네 마네 가벼운 실랑이가 이어졌다. 하지만 정문 앞에서 어머니의 차가 대기 중인 것을 발견한 조영우는 하는 수없이 간식을 받아들고 손을 나풀나풀 흔들었다.

“재겸아, 잘 먹을게. 그럼 내일 봐!”

“그래. 조심히 잘 가라. 건강하고….”

재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조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교문으로 뛰어갔다. 사실 재겸은 아주 잠깐 고민을 했었다. 휴대폰이 생겼으니 번호라도 알려 주고 연락이나 주고받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이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그냥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조영우의 세월과 재겸의 세월은 달랐다. 아무것도 밝힐 수 없고, 솔직할 수 없는 관계는 아무렴 한 달이 적당했다.

“건강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재겸은 조영우가 없는 2학년 3반으로 돌아갔다.

마침내 하루 수업이 전부 끝이 났다. 재겸은 가져갈 만한 짐들을 가방에 챙겨 넣고, 아이들과 인사를 나눈 뒤 세월아 네월아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조영우를 보러 온 건데 왜 도서실에 가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를 일이다. 운과 때라는 것이, 사람 간의 연이 이토록 얄궂을 노릇인가.

문을 열고 도서실에 들어선 재겸은 바로 옆 데스크부터 곁눈질했다. 재겸과 시선이 마주치자 사서 청년은 예전에 하던 ‘왔어요?’라든지, ‘또 보네요.’라는 인사 대신 입 모양으로 말했다.

‘거기 잠깐 앉아 있어요.’

재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도서실을 배회했다. 책장을 옮겨 다니며 책 구경을 했다. 교내 봉사를 명목으로 몇 번 드나들었던 탓에 낯설거나 어색한 느낌은 없었다. 도서실은 여느 때처럼 평화롭고 나른한 분위기였다.

윤태희는 모니터 앞에 앉아 학생들의 책 대출을 도와주고 있었다. 오른손에 반 깁스를 한 상태여서 그런지 움직임이 꽤나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쌤. 쌤. <오후의 밤> 읽어 보셨어요?”

“아, 데인 스코필트가 쓴 거 말하는 거죠.”

“와! 맞아요. 지난달에 나온 신간이요.”

“네, 읽어 봤어요. 음, 그런대로 재밌었어.”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후루룩 훑어보던 재겸이 저도 모르게 쫑긋 귀를 세웠다. 학생들과 윤태희는 꽤나 허물없이 대화를 주고받았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꿍꿍이를 숨기고 학교에 잠입한 주제에 진짜로 사서 선생님 같다. 게다가 애들하고 제법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다.

“쌤, 근데 어쩌다 계단에서 넘어지신 거예요. 조심 좀 하시지….”

계단? 홀린 듯이 대화를 엿듣고 있던 재겸이 눈을 깜빡였다.

“나? 계단에서 넘어진 거 아닌데, 누가 그래요.”

그에 윤태희가 재밌다는 투로 웃으며 대꾸했다.

“진짜요? 8반에 준혁이 아시죠, 걔가 그랬는데?”

“어? 난 우리 담임 쌤한테 들었는데. 아니에요?”

“헐! 쌤. 그럼 어쩌다가 그렇게 다치신 거예요?”

마구 뒤엉킨 소문의 출처에 아이들이 혼란스러워할 때였다.

“아, 패싸움했어요.”

순간, 책을 꽂아 넣던 재겸의 손이 삐끗했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패싸움을 했다는 허세 어린 주장을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한 나이는 아니었다. 사서 선생이 건넨 농담에 반응이 뜨거웠다.

“아, 대박. 이건 진짜 예상 못 했다.”

“으하하! 쌤, 몇 대 몇이었는데요?!”

윤태희가 눈을 감고 숫자를 되짚어 보았다.

“몇 대 몇이었지, 아. 6 대 1이었어요.”

“혼자서 여섯 명이요? 와, 그니까 그렇게 다치죠!”

“와. 그래서 이겼어요? 네? 맨주먹으로요?”

“아니 아니, 내가 6이었어.”

윤태희가 웃으며 내용을 정정해 주었다. 쌤 진짜 웃겨! 10대 후반의 소년들은 손뼉까지 쳐 대며 웃어 댔다. 물론 책장 뒤에 동떨어져 있던 소년 한 명만은 예외였다. 쟤 진짜 미쳤나.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너넨 뭐가 그렇게 웃기냐…. 재겸은 입술을 깨물며 책장 옆으로 고개를 쓱 내밀었다. 데스크 한쪽에 걸터앉은 윤태희는 뒤통수만 보였다. 한 명한테 여섯 명이 덤볐다가 쪽도 못 쓰고 얻어터졌다는 감동 실화 스토리는 어느덧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하마터면 죽는 줄 알았는데. 그분이 마음씨가 착하셔서….”

저 새끼 지금 일부러 저러는 거 같은데?

재겸이 애써 침착하게 책 페이지를 넘겼다.

***

“잘 가요.”

학생들은 대출한 책을 품에 끼고 한참 만에야 도서실을 나섰다. 윤태희는 곧바로 데스크에서 걸어 나와 도서실 문부터 걸어 잠갔다. 철커덕, 무거운 쇳소리가 나는 것을 확인한 윤태희가 조용히 뒤를 돌았다.

“거기, 마음씨 착하신 분?”

재겸이 책장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재겸과 윤태희의 시선이 마주쳤다. 역시, 일부러 저 들으라고 한 소리가 맞는 것 같았다. 그날밤 화살을 저 주둥이에 쐈어야 했는데….

“입으로 매를 버는 거 보니까 살 만한가 보네.”

재겸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마음씨 착하신 분이 봐주신 덕분인 것 같아요.”

“까부는 것도 정도껏 하는 게 좋을걸.”

무심한 경고에 윤태희가 말없이 웃었다. 단둘만 남은 도서실은 고요했다. 조용한 가운데 기묘한 긴장감이 들어찼다. 재겸은 가방을 어깨에 멘 채로 평소 앉던 자리에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용건만 끝나면 이곳을 뜰 것이다, 라는 강경한 의지가 엿보이는 자세였다.

“와 주셔서 고마워요, 나으리.”

윤태희가 재겸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뾰로통하게 앉아 있던 재겸이 신경질적인 말투로 쏘아붙였다.

“내가 왜 네 나으리야? 나으리라고 하지 마.”

“왜요? 나는 나으리라고 부르는 거 좋은데.”

네가 좋다니 그럼 더 싫거든. 재겸이 눈꼬리를 세웠다.

“놀리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제가요? 그럴 리가요….”

윤태희가 느슨하게 턱을 괴더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럼 나으리 말고 뭐라 부를까요? 아니면, 어르신?”

뭐? 어르신?! 윤태희가 내뱉은 단어를 듣자마자 재겸의 표정이 기묘하게 굳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예상치 못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얼, 어르. 어르신….”

댕, 이상한 타격감에 재겸이 말을 더듬거렸다.

사실 재겸은 자신이 늙었다거나 나이가 많다고 ‘자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일단 외양 자체가 늙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겸은 저 스스로를 ‘늙었다’가 아니고 ‘멈춰 있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거울을 봐도 언제나 한결같은 얼굴인 데다가, 함께 생활하는 메산이와 정주 역시 인간의 흐름과는 달라 오래 전부터 그 모습 그대로였으므로 변화를 체감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자각과 늙었다는 자각은 결이 살짝 달랐다.

“내가 왜 어르신이야? 얼굴은 네가 더 늙어 보이거든?”

재겸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네? 갑자기 얼굴 얘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하시면….”

윤태희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재겸이 윤태희에게 반말을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은 허물없이 친한 척을 해 대는 게 괘씸하고, 또, 아무튼 그냥 괘씸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존대를 받으려니 이건 이거대로 기분이 나빴다. 똑같은 존대였지만 전과는 느낌이 살짝 달랐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말투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였다. 예의 바르고 정중한 말씨가 오히려 더 불손하게 느껴지니, 같은 말이라도 존댓말이 더 재수없게 느껴졌다.

“어차피 넌 뭘 해도 짜증 나니까, 그냥 하던 대로 하라고.”

잠시 고민하던 윤태희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도 되나요? 나으리에 비하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제가 어떻게 감히 반말을 찍찍….”

끝내 욱한 재겸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윤태희가 한발 빠르게 상체를 뒤로 물리며 “응, 해야지.” 순순히 납득했다. 재겸이 반쯤 내리깐 눈으로 윤태희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러자 윤태희가 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별안간 시계 보는 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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