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65)화 (65/348)

#65

“됐으니까 용건이나 말해.”

재겸이 짜증을 억누르며 쏘아붙였다.

“이사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어?”

재겸이 무표정한 얼굴로 윤태희를 흘겨보았다.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윤태희는 벌써 행보를 읽어 내고 있었다. 역시 상황 판단이 뛰어난 녀석이다. 당연히 거처를 옮길 것이라는 전제로, 거처를 옮겨야만 안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우치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동자님한테 전해 들었겠지만, 그때 그 나자들은 당분간 잠잠할 거야. 기억은 확실히 날아갔어. 혹시 몰라 떠봤는데 널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네가 말했던 내용들도 새어 나갈 일 없을 거야.”

제구부 제1팀은 나례청 치료실에서 불철주야 씻김을 받는 중이었다. 몸을 회복하고 다시 동자삼을 찾아 나서면 된다며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열심히 치료에 전념하고 있었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행적은 끊겨 있을 것이다.

재겸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나한테 그걸 말해 주는 이유가 뭔데?”

윤태희는 본인도 나자이면서 ‘나자들’이라고 멀찍이 떨어져서 지칭하고, 묻지도 않았건만 스파이를 자처하여 친절하게 나자들의 동태를 살펴 주고 있었다.

“그냥. 네 비밀들 잘 간수해 놨으니 안심하라는 뜻에서.”

“그러니까 뭘 바라고 그런 얘길 하는 거냐고 묻잖아.”

재겸이 삐딱한 눈으로 윤태희를 응시했다. 물론, 재겸으로선 알 수 없는 그쪽 상황을 짚어 주면 확실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안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재겸은 여전히 윤태희를 불신했다.

“나는 그냥 순수하게 걱정 덜어 주려고 한 말인데….”

윤태희가 비스듬히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다른 의도는 없었어. 왜? 못 미더워?”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너 같으면 널 믿겠냐?”

“나? 나야 당연히 날 믿지. 믿어야 하고.”

윤태희가 웃으며 대꾸하자 재겸이 눈을 치켜떴다.

“아침에 분명히 얘기했지. 한 번 봐줬다고 해서 네가 한 짓이 전부 없던 일이 된 건 아니라고. 적당히 눙치고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재겸이 싸늘하게 선을 그었다. 이렇게 마주 앉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둘 사이에 없던 신의가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말을 섞어 준다고 해서 같은 편이 되었다고 착각하면 곤란했다. 꼴같잖은 아군 행세를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날 속여 놓고, 내가 믿어 주길 바라는 거야? 네가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던 놈인지도 모르는데, 메산이를 도와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재겸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윤태희가 선뜻 수긍했다.

“아, 그러네. 너한텐 정보가 너무 부족한가….”

새삼스럽다는 투로, 윤태희는 상체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는 긴 다리를 꼬아 앉으며 뭔가 골똘히 궁리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는 고개를 숙인 채로 발끝을 살랑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차근차근 말을 꺼냈다.

“이름은 윤태희, 서류상으로 나이는 스물여섯. 소속은 나례청 축역부 제1팀. 직급은 수석. 집은 자가, 차는 세단 몰고. 연봉은 기본급 팔천에 생명 수당, 특활비, 성과급에 각종 상여 포함하면 평균 2억 정도. 음, 그리고 가족 관계는 없음.”

“…….”

세단에 상여에 갑자기 뭔 소리야. 윤태희가 나열한 신상 명세는 재겸의 귀에 영 난해하기만 했다. 짧은 정적을 깨고 윤태희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키랑 몸무게도 말할까?”

그럴 리가 있겠냐?

“그럼 그밖에. 뭐 또 궁금한 거?”

말을 말자. 재겸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팽팽하게 날 세웠던 경계심과 긴장감이 한순간에 탁 풀려 버렸다. 윤태희가 픽 웃더니 말을 건넸다.

“없어? 그럼 이제 내 차례.”

“뭐.”

“나한테 궁금한 거 없다며.”

“어.”

“난 궁금한 거 많거든, 너한테.”

재겸이 뭐라 할 틈도 없이 곧바로 질문이 날아왔다.

“나 동티 안 났어. 알고 있어?”

그렇게 물으며, 윤태희가 화살에 꿰뚫렸던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재겸은 멈칫하며 윤태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익히 전해 들었던 내용이었다. 화살에 맞아 검게 물들었어야 할 살갗이 깨끗하기만 했다고, 메산이가 말했었다.

“알아.”

재겸이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이유가 뭐야?”

“몰라. 나도.”

재겸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직접 화살을 쏘신 분인데, 모를 리가 있나?”

“진짜 모른다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성의라곤 느껴지지 않는 쌀쌀맞은 답변에 윤태희의 눈썹이 비뚤어졌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눈을 하던 윤태희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불쑥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다물기를 반복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망설인 끝에 윤태희가 말을 던졌다.

“혹시 나 봐줬어?”

어딘지 모르게 묘한 기대감이 묻어나는 질문이었다.

“아니, 죽일 생각으로 쐈는데.”

뭔 소리냐는 듯, 소년이 멀뚱멀뚱 대답했다.

“원랜 이마에 쏘려고 했는데 네가 한 발자국 움직였어.”

“…….”

“정 그렇게 궁금하면 한 번 더 맞아 볼래? 말만 해. 언제든지 다시 쏴 줄 테니까.”

“…….”

이번엔 재겸의 눈에서 묘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아니, 꼭 그럴 필요까지는… 윤태희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재겸은 보기보다 실험 정신이 투철한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실험 정신이었다.

“어때? 해 볼래?”

재겸이 대답을 재촉하자, 윤태희는 시선을 돌려 다시 한번 시계를 쳐다보는 척을 했다.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윤태희는 발끝을 까딱이며 조용히 눈썹 끝을 매만졌다.

“근데, 너 그 활은 어디서 난 거야?”

정적이 깊어지기 전에 윤태희가 말을 돌렸다.

“어딜 봐도 인간의 손에 있을 물건이 아니던데.”

화제가 바뀌자 재겸의 기세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활의 출처를 묻자마자 도서실 분위기가 살짝 싸해진 느낌이었다. 윤태희는 재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팔을 갈라서 끄집어낸 볼품없는 나무 활대. 처음엔 뼈를 꺼내는 줄 알고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피에서 저절로 생겨나던 화살이며, 화살촉이 파고든 자리에 먹물이 번지듯 흉이 들던 광경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건 내 스승이 쓰던 활이야.”

재겸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에 윤태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막상 질문해 놓고도 재겸이 선뜻 대답해 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겸은 예상외로 순순히 대답을 내놨고, 그 활의 출처란 놀랍기만 했다.

“네 스승… 인간 아니었어?”

윤태희가 상체를 가까이 숙이며 물었다.

“아니. 인간 맞아.”

재겸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네 스승은 어떻게 그 활을 가졌지?”

“본인 말로는 선물로 받은 거라고 했어.”

윤태희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선물로 받았다니… 대체 누구한테?”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말을 안 해 줬으니까.”

재겸이 무미건조한 억양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나한테 물려준 거야.”

“근데 너는 그 활을 왜 굳이 팔 속에 넣어 둔 거야?”

“네 말대로 그건 인간의 손에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니까.”

스승과 관련된 모든 흔적을 내버리고 싶었으나 활을 버릴 수 없었던 이유는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흉이 든다는 것은 신벌의 영역으로, 다시 말해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권능이다. 따라서 이 활은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남의 손에 들어갔다간 필시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없애 버리면 좋았겠지만, 스승이 물려준 활은 보통의 활대치곤 제법 가늘었음에도 아무리 힘을 줘도 부러지지 않았고, 심지어 불 속에 집어넣어도 멀쩡했다. 도무지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데나 보관할 수도 없고, 평소에 쓸 일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되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네 손안에 있는 건 괜찮다는 거야?”

윤태희가 턱을 괴며 물었다.

“뭐, 어쨌든 이 활의 주인은 나니까.”

“그래서 네 스승은 지금 어디에 있지?”

무감하던 재겸의 낯이 일순 싸늘해졌다.

“우문(愚問)이네.”

재겸의 대답에 윤태희가 픽 웃었다.

“네 스승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건 당연히 어리석은 질문일 거야. 하지만 네게 저주를 걸었다고 했잖아. 자기 제자를 불로불사로 이 세상에 남겨 둔 사람이라면 충분히 통할 법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몇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행방을 묻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상대는 소년의 스승이다. 여지껏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상식선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눈앞의 소년이 그 산증인이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널 가르친 스승이라면 당연히 강한 귀재였을 거고, 그럼 만약에 죽었다고 하더라도 영귀가 되었을 가능성이 남아 있지.”

이성적이고도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재겸이 윤태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 머리 잘 돌아간다.”

윤태희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코를 찡긋거렸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

재겸이 떨떠름하게 눈을 흘기다가 입을 열었다.

“내 스승은 죽었어.”

“죽었다고?”

“영귀가 되지도 않았고.”

“확신해? 어떻게 알아?”

재겸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 손으로 죽였으니까.”

윤태희가 짧게 멈칫하더니 묘한 눈으로 재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내 손으로 죽였다? 과연, 직접 봤으니 안다는 건가….

“역시. 우리 나으리시네.”

윤태희의 낯에 매력적인 웃음이 번진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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