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66)화 (66/348)

#66

그날은 사내에게 활을 선물 받은 날이었다.

소년과 사내는 이날도 어김없이 조반을 챙겨 먹고 산에 올랐다. 쾌청한 하늘엔 뭉게구름이 넉넉하였고, 살찐 토끼 몇 마리가 풀숲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여린 잎을 뜯어먹는 입이 바쁘게 움직인다. “겸아. 뭐 하니.” 앞서 걷던 사내가 토끼에 한눈이 팔려 걸음이 늦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토끼 고기.” 소년이 눈을 빛내며 손짓하자 사내가 에휴, 한숨을 쉬었다.

“수련을 하러 온 것이지. 사냥을 하러 온 것이 아니지 않느냐.”

요사이 소년과 사내는 무술을 연마하는 데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조그맣기만 하던 제자의 몸집은 점점 자라서, 사내의 허리춤에 오던 키는 이젠 가슴팍까지 닿았다. 잘 먹고 잘 자고, 날 때부터 까칠한 성미는 어디 가지 않았어도 웃기도 잘 웃었다.

“우리 제자가 달밤이 뜰 때까지 수련을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상냥한 협박에 소년이 툴툴대며 얌전히 뒤를 따랐다.

어느덧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소년과 사내는 일 년에 적으면 한 번, 많으면 일 년에 서너 번씩 수시로 거처를 옮겨 생활했다. 새 둥지를 틀 때마다 사내는 주변의 지형을 살펴 수련하기 좋은 곳을 찾아내곤 했다. 소년과 사내는 산을 하나 넘어서 평소 수련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땅이 평탄하고 인적이 없는 곳이라 수련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오늘은 검으로 실제 대련을 하기로 했다.

“덤벼, 이 찌끄래기야. 나부랭이야.”

검을 든 소년이 호기롭게 외치며 자세를 잡았다.

“…….”

칼집에서 칼을 꺼내던 사내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어허, 이 녀석이. 스승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어허어? 어디서 스승 흉내냐! 자네와 나는 지금 적일세!”

“…….”

사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그런 거였니… 그러니까, 역할 놀이를 할 거면 미리 상의라도 좀 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정신을 집중한 소년이 눈앞에 선 스승을 또렷이 응시했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이제 소년은 제법 강해졌다.

처음엔 금세 끝나던 대련이었다. 그러나 사내를 곧잘 상대하게 되면서 갈수록 대련이 길게 이어졌다. 지금의 소년은 혼자서도 부적을 술술 쓰고, 어쩌다 귀찮게 구는 잡귀가 있으면 손쉽게 물리칠 줄 알았다. 기운을 갈무리하는 데 애를 먹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기운을 감추는 것은 물론이요, 귀기를 아주 능숙하게 다뤄서 더 이상 사내의 지적을 받지 않게 되었다.

가끔은 민가로 내려가서 소소한 의뢰도 해결할 정도였다. 물론, 당연히 스승 몰래 벌이는 일이었다. 종종 나무를 해 오겠다며 뻥을 쳐 놓고 마을로 가서 돈을 벌었다. 그래 봤자 푼돈이었지만, 그래도 소년은 언젠가 차곡차곡 이 돈을 모아서 저의 스승에게 무언가 값진 선물을 해 주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몰래 마을로 쏘다닌다는 사실을 들켰다간 혼쭐이 날 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내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대련이 시작되자마자 검이 맞붙었다. 챙! 날카로운 금속성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소년이 땅을 박차며 검을 휘둘렀다. 사내는 거칠고 강인한 손길로 소년의 검을 막아 냈다. 소년이 상체를 숙이며 한 번 더 발돋움을 했다. 다가올 공격을 피해 사내가 뒤로 훌쩍 물러섰다.

“이야아, 내 칼을 받아라.”

소년이 달려들며 장난기 가득한 기합을 내질렀다.

“내 부모를 죽인 원수!”

검을 휘두르던 사내의 팔이 멈칫했다. 빈틈이 생겼다. 사내가 한 호흡 뒤늦게 몸을 틀었다. 사내가 틈을 파고드는 소년의 검을 매섭게 쳐 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소년의 손에서 검이 튕겨 나갔다. 잘 벼린 장검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몇 번 돌더니 땅바닥에 꽂혔다.

사내의 검이 그대로 다가와 소년의 목을 겨눴다. 서슬 퍼런 칼날이 금방이라도 목을 파고들 듯했다.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싸늘한 눈빛이었다.

“…….”

“…….”

소년은 굳은 낯으로 예리한 칼날을 곁눈질하다가,

“아, 이번엔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끝내 분한 기색으로 땅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부모를 죽인 원수라 하였느냐?”

화풀이 반, 애교 반, 손에 잡히는 자잘한 돌멩이를 던져 대며 투덜거리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대련은 끝났다. 하지만 사내는 아직도 소년에게 겨눈 검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냉랭한 음성에 소년이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어디까지나 역할 놀이의 연장선에서 꺼낸 말이었다.

“왜 그래? 화났어?”

소년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상대로 너는, 칼을 놓치자마자 곧바로 포기하였다. 그런 물렁한 마음가짐으로 앙갚음을 하겠다는 것이냐? 방금 손을 늦추지 않고 그대로 찔렀다면, 칼은 놓쳤을지언정 내게 상처 하나쯤은 냈을 것이다.”

차가운 눈동자가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자신이 손을 늦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주저한 것이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사내는 그 망설임을 놓치지 않고 읽어 냈다. 내가 그랬나? 매서운 질책에 소년이 긴가민가하며 자신의 행동을 복기할 때였다. 사내가 말했다.

“복수할 기회를 잡거든,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말거라. 알겠느냐?”

장난인데 뭐 저리 심각해… 소년이 뚱한 얼굴로 사내를 올려다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어?” 무언가를 발견한 소년이 대뜸 삿대질을 했다. 흙바닥에 앉아 있던 소년은 환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더니, 사내가 입고 있던 흑색 장포의 옷고름을 덥썩 움켜쥐었다.

“이거. 이거 내가 한 거지? 그치? 맞지?”

사내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내려 옷고름을 살펴보았다. 고름 자락 끄트머리가 사선으로 살짝 잘려 나갔다. 소년이 찔러 넣은 검에 베인 것이었다.

“어? 맞지! 맞지? 내가 한 거지?”

소년이 사내의 가슴팍을 퍽! 퍽! 때리며 물었다.

“…….”

묵묵히 소년을 바라보던 사내가 결국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런 모양이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퉁하던 소년은 만세를 하듯 양팔을 벌리며 신나 했다. 사내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휙, 옆으로 내던졌다. “잘했다.” 사내는 손을 들어서 제자의 뒤통수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 좋으냐?”

“당연하지. 더 칭찬해. 더 칭찬하라고.”

소년은 지금껏 사내를 상대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그래도 오늘의 패배는 어제의 패배와 달랐다. 비록 졌지만 손끝 하나 대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오냐. 장하다.”

소년은 키득거리며 사내의 옷고름을 가지고 손장난을 쳐 댔다.

그때였다.

“움직이지 마라.”

바로 뒤에서 처음 들어보는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화들짝 놀란 소년이 옆을 돌아봤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누군가 사내와 저 사이에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칼날은 사내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소년이 들고 있던 검이었다. 이를 데 없이 고요하면서도 매서운 살기였다. 미소를 머금고 있던 사내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도대체 어느 틈에….

소년의 눈동자가 거세게 경련했다. 낯선 자가 접근해 올 때까지 전혀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스승은 강한 이였으므로 적이 노리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저야 그렇다 쳐도, 스승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상대는 상당한 실력자인 것이 분명했다. 소년이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사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내가 항복하듯 양손을 어깨높이로 천천히 들었다.

낯선 객은 삿갓을 쓴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객은 행색이 깔끔하였고 커다란 행낭을 메고 있었는데, 장신인 사내와 비교하면 다소 몸집이 왜소했다. 그러나 기백만은 용맹한 범과도 같았다. 목덜미를 겨눈 검은 금방이라도 스승의 숨통을 꿰뚫을 것 같았다. 소년의 손이 덜덜 떨렸다. 뼛속까지 위기감이 엄습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다.

그때, 얌전하던 사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객의 손목을 붙잡고 메치듯이 몸을 틀었다. 한순간에 중심을 잃은 객의 몸이 넘어질 듯 앞으로 쏠렸다. 객은 날렵하게 한 손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지탱하더니 그대로 사내의 오금을 걷어찼다. 그 충격에 다리 힘이 풀린 사내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객이 다시금 사내의 목에 검을 겨눌 때였다. 그 틈을 타서 사내가 바닥에 굴러다니던 남은 검 하나를 주웠다. 객이 멈칫했다. 그러나 객과 검을 겨루기엔 사내의 자세는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다. 사내는 곧바로 소년을 향하여 허공으로 검을 던졌다.

“겸아!”

소년이 숨을 들이키며 뒷걸음질을 했다. 소년의 손에 칼자루가 정확히 잡혔다. 그러자 객이 사내에게 검을 겨눈 채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애송이한테 빌붙는 거야?”

사내는 객의 조롱에도 아랑곳없이 가만히 소년을 응시했다. 소년이 후들거리는 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때, 객이 대뜸 허리를 숙이더니 사내에게 뭐라 귓속말을 했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사내가 그대로 잠잠해졌다.

객이 소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실력 좀 보자, 애송아.”

객이 삿갓을 고쳐 쓰며 검을 들어 올렸다. 범이 노리는 토끼의 처지를 십분 이해한 순간이었다. 지독한 공포감이 뇌중까지 들어찼다. 마음만 같아선 당장이라도 도망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침착해야 했다. 필시 스승에게 무슨 수가 있을 것이다. 저렇게 자포자기할 리 없었다. 분명히, 일부러 저에게 시선을 끌게 해 놓고 뒤에서 허점을 노리려는 거다.

마침내 소년의 떨림이 멎었다.

그와 동시에 객이 나비처럼 뛰어올랐다. 검이 사정없이 쇄도하였다. 챙! 소년이 필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뒤에서 나서 줄 거라고 생각했던 스승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사내의 검술이 거칠고 투박하다면 객의 검술은 아주 유려하고 매끄러웠다. 마치 검무를 추는 듯했다. 미끄러지는 듯 신묘한 보법이었다.

객의 검이 뱀처럼 소년을 제압했다. 사내와 대련을 할 때도 이렇게까지 무력하진 않았다. 하지만 객을 상대론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소년의 손에서 칼자루가 허무하게 떨어져 나갔다. 소년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면전으로 살벌한 칼끝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소년의 눈에서 독기가 흘렀다.

“흐음, 눈빛은 살아 있네.”

객이 삿갓을 눌러 쓰며 중얼거렸다.

“죽는 게 무섭지 않은 거야?”

객의 질문에 소년이 이를 악물고 뇌까렸다.

“그래, 무섭지 않아. 나는 죽어서 어마어마한 악귀가 될 거거든. 원한을 품고 이 세상 끝까지 널 쫓아가서 하는 일마다 그르치게 할 거야. 네 주변 사람들 전부 괴롭힐 거고, 후손들 대대로 고통스럽게 만들어 줄게. 그러니까 죽여. 나와 내 스승을 죽인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 줄 테니까, 죽이라고.”

뭐라. 객이 삿갓 속에 가려져 있던 눈을 멍하니 끔뻑거렸다. 소년은 마치 귀신에 씌인 것처럼 흰자위를 희번덕거리며 온갖 저주와 쌍욕을 철철 늘어놓고 있었다. “세상에.” 객이 칼을 거두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고개를 틀어 뒤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를 향해서 시선을 던졌다.

“…….”

“…….”

객과 눈이 마주치자 사내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꾹 눌러 참는 표정이었다. 객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땅에 푹 꽂았다. 삿갓 속에서 작게 큭큭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 참. 살다 살다….”

마침내 객이 삿갓을 벗어 던지며 활짝 웃었다.

“묘정, 뭐 이런 애가 다 있습니까?!”

햇살처럼 빛나는 따스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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