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그러니 나를 닮은 내 제자에게 이것을 물려주마.”
소년이 흠칫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옷고름을 베어 냈으니 그 상으로 주겠다.”
“진짜? 좋은 거라며. 내가 가져도 돼?”
묘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다루기 까다로운 물건이나 차근차근 알려 주도록 하마.”
우와! 소년이 활짝 웃으며 양손으로 활대를 쥐고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이건 내 거다. 묘정이 내게 준 활이다. 덜 자란 소년이 쓰기에 나무 활대는 다소 길었지만, 그래도 소년은 기쁘기만 했다. 검에 둔치여도 상관없다. 나는 스승을 닮았으니 이 활로 더 강해질 것이다.
“이야, 잘됐다. 나는 검에 능해도 활은 잘 못 쏘는데, 네 스승은 검도 잘 다루고 활도 아주 잘 쏜단다. 열심히 배워 봐. 묘정은 무엇이든 못하는 게 없으니까.”
휘림이 소년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응원해 주었다. “알면 됐어.” 소년이 웃으며 말하자, 휘림이 어이없어하며 대꾸했다. “내가 너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묘정이 고개를 돌려 휘림을 빤히 바라보았다. 먼 데서 불어온 산들바람이 휘림의 짧은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갔다.
“…….”
잠시 말이 없던 묘정이 행낭 안에서 빈 수통을 꺼냈다.
“겸아. 샘터에 가서 마실 물 좀 떠 와 주련?”
묘정이 태연히 부탁했다. “어? 응. 알았어.” 소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통을 받아 들 때였다. 휘림이 곧바로 바지춤에 매달아 놓은 간이 행낭을 뒤적이며 소년을 만류하려고 했다. 미리 챙겨 온 수통에 물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여기….”
휘림이 뭐라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뒤에 서 있던 묘정이 휘림의 소맷자락을 확 잡아당겼다. 휘림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묘정을 돌아볼 때였다. 묘정이 눈을 빠르게 떴다 감더니, 아주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
휘림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묘정과 휘림은 수통을 들고 총총 멀어져 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근처에 오가던 샘이 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터였다. 마침내 소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묘정은 울창한 나무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휘림이 휘적휘적 그 뒤를 따랐다.
“묘정. 아이와 아주 잘 지내 온 모양입니다?”
휘림이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로만 듣던 소년은 성미가 까칠하고 악바리 기질이 있었다. 검을 겨눴을 때 바락바락 쌍욕을 해 대서 휘림은 깜짝 놀랐다. 온화한 묘정 아래서 어찌 저런 녀석이… 여간해선 손을 태우긴 힘들 것처럼 보였는데, 소년은 묘정을 아주 잘 따랐다.
“아이의 이름은 손수 지으신 겁니까?”
“그렇지요, ‘재겸’이라고 지었습니다.”
무언가 떠올린 묘정이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는 왜 저는 성이 없냐고 따져 묻더이다. 저도 성씨가 가지고 싶다며 졸라 대기에, 길가에 나가서 마음에 드는 성씨가 있거든 주워서 붙여 보라 하였더니, 김씨가 마음에 든다며 그때부터 스스로를 김재겸이라 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휘림이 푸하하, 박장대소를 했다. “귀여워라.” 다소 포악하고 사납긴 하지만… 아이는 본디 맑고 따듯한 성정을 지녔으리라. 직접 보고 나니 묘정이 소년에게 각별한 정을 붙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앞으로는 저 아이를 어쩌실 작정입니까.”
한참을 웃던 휘림이 웃음기를 지워 내며 물었다.
“…….”
묘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휘림의 질문을 끝으로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묘정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휘림을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참으로 무정도 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묘정의 말에 휘림이 멀뚱멀뚱한 눈으로 대꾸했다.
“알면 되었습니다. 6년 전에 뒤도 안 돌아보고 그리 사라져 놓고는….”
묘정은 고개를 내밀고 소년이 사라진 방향으로 슬쩍 눈길을 주었다가, 이내 마주 선 휘림을 내려다보았다. 몇 년 만의 재회였다. 나례청이 무너진 그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휘림은 그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휘림은 지난 6년간 어찌 지냈습니까.”
묘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산천을 여행하다가 얼마 전에야 오랜 객지 생활을 마쳤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요. 세상이란 참으로 넓더이다. 참, 근래에 꽤나 걸출한 재주를 지닌 영귀 하나를 알게 되었는데 아주 물건입니다. 하하, 묘정 또한 귀여운 제자를 보여 주었으니 나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소개를 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휘림이 미소를 지으며 묘정의 등을 토닥거렸다.
건재하던 나례청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그날로부터 어느덧 6년의 시간이 흘렀다. 6년. 묘정과 소년이 처음 만나 지금껏 함께 산 세월이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어리기만 하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소년이 되었다.
“내게 할 말은 그것뿐입니까?”
묘정이 넌지시 묻자, 휘림이 대뜸 손뼉을 쳤다.
“아! 묘정, 혹시 수향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까? 얼마 전, 어찌 연이 닿았는지 수향이 내게 찾아와 묘정의 행방을 묻기에 그 까닭을 되물었지요. 수향은 나례청을 재건할 계획으로 뜻이 맞는 나자들을 소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향은 묘정을 애타게 찾아 헤매고 있다, 이 말입니다. 잠깐… 묘정? 내 말 듣고 있긴 합니까?”
묘정과 휘림, 수향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오랜 지기이자, 나례청에서 함께 동고동락한 사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례청이 해체됨에 따라 기존에 소속되어 있던 나자들은 전부 뿔뿔이 흩어져 각자 도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휘림과 수향도 마찬가지였다. 나례청 생활을 청산한 뒤로 묘정은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고, 지금껏 전국 팔도를 돌며 방랑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니, 모르겠는데….”
묘정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휘림의 한쪽 어깨에 이마를 툭 박았다.
발길이 닿는 대로 떠돌다 보면 원치 않았음에도 지나간 나자들의 소식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누구는 절에 들어갔다고 하고, 누구는 신령을 모시는 만신이 되었다고 하고, 누구는 그저 평범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딱히 궁금하지 않았던 소식은 귀에 잘도 들렸다. 반면에 내심 바라고 또 바라고, 애타게 기다린 소식은 가뭄철의 소나기만큼이나 찾아오질 않으니 얄궂을 따름이었다.
“무정한 건 내가 아니라 그대가 아닌지…. 지난 세월 동안 내 몇 번이고 서신을 보냈는데… 지금껏 단 한 번도 답을 보내 주지 않았으면서….”
묘정은 휘림의 어깨에 이마를 박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휘림이 다소 머쓱한 얼굴로 짧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어쨌든 이렇게 만나러 왔으니 된 거 아니요?” 묘정이 웅얼거리는 투로 대꾸했다. “응, 아니요.” 휘림이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알았으니 일단 좀 비킵시다!”
멀리서, 샘에서 돌아온 소년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묘정… 어디 갔어….
그날 소년은 제 스승을 부르고 또 불렀다.
***
“내 스승은 죽었어.”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서, 소년이 대답했다.
“내 손으로 죽였으니까.”
윤태희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소년은 믿고 따르던 스승에게 배신을 당했고, 스승은 제자에게 불멸이라는 저주를 선물했으며, 제자는 스승에게 죽음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복수를 해낸 기분은 어때?”
윤태희가 비스듬히 턱을 괴며 물었다. 재겸이 무표정한 얼굴로 윤태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도서실 창가로 노을빛이 번져 들었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으며, 커다란 서가마다 빽빽이 꽂혀 있는 책들이 차분하고 묵직한 내음을 만들어 냈다. 복수라. 내가 한 게 복수였나. 보통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를 물을 법도 하건만, 윤태희는 엉뚱하게도 복수를 하고 난 뒤의 ‘기분’을 묻고 있었다. 윤태희는 언제나 방점을 이상한 곳에다가 찍는다.
“그냥 그랬어.”
내내 말이 없던 재겸이 한참 만에 대꾸했다.
“왜? 나라면 후련하거나 짜릿했을 것 같은데.”
“몰라. 후련하지도 않았고 짜릿하지도 않았어.”
윤태희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레 속삭였다.
“역시 마음씨가 착하신 분이라.”
윤태희가 곧고 단정한 손가락을 테이블에 튕기며 덧붙였다. “원수를 죽였으니 충분히 기뻐해야지.” 다정한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조언이었다. 재겸은 무미건조한 낯으로 윤태희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도 처음엔 기뻤어. 아니, 기쁜 줄 알았어. 근데 원수를 죽이고 나서 알았지. 내 진짜 원수는 따로 있다는 걸. 그래서 기쁘지가 않았어…….”
윤태희가 설핏 눈가를 찌푸리며 되물었다.
“원수가 따로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재겸이 상념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내 원수였던 거야. 이 생(生)이 원수였어.”
배신감, 증오, 분노, 피로 물든 감정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소년의 가슴을 억눌렀다. 명치끝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처음엔 사내에게 앙갚음을 하고 나면 이 무게감을 떨쳐 내고 홀가분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손으로 사내를 죽인 뒤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음을. 원수라고 생각했던 사내가 사라지면서, 사내가 남겨 둔 이 삶 자체가 저 자신에게 원수로 남았다.
‘네 삶의 주인은 나란다.’
사내가 남긴 그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정말이지 뼈저리게 이해했다. 복수는 끝났으나 복수의 잔여물로 남은 이 삶은 영영 끝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이것을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다. 모든 것이 스승의 그늘 안에 있다.
스승은 이 세상에 없지만 이 삶의 주인은 여전히 스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