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69)화 (69/348)

#69

“자기 자신이 진짜 원수였다, 라….”

곰곰이 되새기던 윤태희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스승을 죽인 걸 후회해?”

예전엔 종종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 안 해.”

“그럼 된 거야.”

재겸이 간결하게 대꾸하자 윤태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재겸의 대답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윤태희가 옅은 볼우물을 머금고 말을 덧붙였다.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자 감정만 낭비할 뿐이니까.”

둘의 시선이 또렷하게 맞물렸다. 내내 무감한 얼굴로 앉아 있던 재겸은 어느 순간 미간을 구겼다. 문득 이 얘길 얘한테 왜 하고 앉아 있나, 정신이 들었다. 새삼 심기가 뒤틀렸다. 저도 모르게 휩쓸려서는, 윤태희가 이끈 불유쾌한 화제에 졸졸 따라가 버리고 말았다.

“야.”

재겸이 눈을 치켜뜨며 쏘아붙였다.

“넌 아까부터 뭘 잘했다고 그렇게 당당해?”

맞는 말이라도 윤태희가 하니 괘씸했다. 사과를 받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으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구는 게 영 거슬렸다. 지난 일에 대해 미안해하거나 뉘우치는 기색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넌 후회 좀 해야 되지 않겠냐?”

윤태희가 가만히 턱을 괴고 대꾸했다.

“후회하는 건 뭔가를 잘못했을 때 하는 거잖아.”

“그래, 근데?”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재겸이 미간을 힘껏 모은 채로 “뭐?” 하고 되물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서 일주일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너한테 똑같이 할 거거든. 그래서 후회하지 않아. 내 선택은 언제나 최선이니까.”

“…….”

재겸의 낯이 한층 험악해졌다.

“넌 나를 속이고 협박했어. 그런데도 잘못이 없어?”

“그래. 말했듯이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거야.”

윤태희가 테이블 위로 상체를 걸치며 팔짱을 꼈다. 넓고 탄탄한 어깨가 꽉 조이며 셔츠가 터질 듯 팽팽해졌다. 어느덧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눈매는 날카롭고 서늘하기만 했다.

윤태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사서로 잠입한 나자라고 사실대로 밝혔으면? 널 만나러 서점에 갔을 때, 말을 섞는 것조차 싫어하고 거부하던 널 두고 그대로 뒤돌아 나왔다면? 그랬으면 네가 지금 나랑 이렇게 마주 앉아 있었을까?”

선명한 눈동자가 마주 앉은 재겸을 올곧게 응시했다. 윤태희는 재겸과 저 사이에 얼마간의 앙금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대화에 응해 준 것은 아마 동자님을 도와줬기 때문일 것이다.

“맞아. 나는 널 속이고 협박했어. 그리고 너는 지금 내 앞에 앉아서 나를 보고, 내 말을 듣고, 이렇게 나랑 얘기하고 있잖아. 나한테 중요한 건 이거야.”

윤태희는 이미 지나간 일에 목매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지난날의 과오를 발판으로 삼아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함정에 빠진 거다. 발판이 아니라 발목을 붙잡는 족쇄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으로 시작하는 무의미한 가정을 따라가 봤자 그 끝에 있는 건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뿐이다. 과거의 늪이란 그런 것이다.

“네가 그랬지, ‘네가 한 짓은 사라지지 않아.’라고. 네 말이 맞아. 그러니까 더더욱 후회를 하면 안 되는 거지. 후회와 반성이 왜 좆같은 줄 알아? 고작 과거를 뉘우치고 반성한 정도로, 자기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을 하게 만든다는 거야. 한 거라곤 가만히 앉아서 대가리나 굴린 게 전부인데도, 갑자기 죄의식이 옅어지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져.”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과거는 사라지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뒤돌아볼 필요는 없다. 모든 죄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이미 나와 함께 살고 있으므로. 멋대로 과거에 버려 두고 오면 곤란하다. 그러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 반성도 하지 않는다. 그저 순순히 안고 갈 뿐이다. 그렇게 하기로, 윤태희는 아주 오래전에 다짐했다.

“그래서, 내가 지나간 일을 사과하고 내 잘못이라고 말하면 넌 나를 받아들여 줄까? 아니면, 마음을 돌려서 나자가 되어 줄 건가? 아니잖아.”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붙잡고, 붙잡히고, 돌아본다 한들 뭐가 달라진다는 말인가? 과거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바에야 다가올 앞날을 도모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게 맞다. 그게 훨씬 더 이롭고 영양가 있는 일이므로.

“그리고 내가 후회하고 사과해 봤자 그게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어? 그래 봐야 언 땅에 삽질하는 것밖에 더 되나. 잘해 봐야 본전치기고. 그럴 바에는 너한테 현실적인 이득을 주는 게 낫지. 그게 훨씬 생산적이니까.”

말을 마친 윤태희가 눈앞의 소년을 응시할 때였다.

“너….”

재겸이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진짜 상종도 못 할 개새끼구나.”

딱히 비난조로 꺼낸 말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느낀 그대로를 내뱉은 거였다. 애초에 심지가 비뚤어진 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터놓고 대화를 해 보니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재겸은 윤태희가 싫었다. 나자가 되어 줄 생각도, 친구로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어느 편인지를 떠나서 좌우지간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재겸은 조영우를 만나러 학교에 왔다.

학교에 오면 윤태희와 마주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재겸은 윤태희와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피하지 않았다. 정말 만나기 싫었다면 어떻게든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직접 불러낼 때는 가지 않았으면서, 재겸은 못 이기는 척 도서실로 왔다. 그렇다면 어째서?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었으나, 재겸은 애써 딴청을 피웠다.

윤태희는 동티가 옮지 않았다고, 그 이유가 궁금해서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집에 찾아왔다고 했다. 그래 놓고 스티커를 다섯 개 모으면 준다던 선물을 머리맡에 남겨 두고 갔다. 모은 스티커는 세 개뿐이었는데도.

‘많, 많이 수척해 보이셨어요. 그래서 상처를 치유해 드리겠다고 했더니 그분이 말씀하시길… 치유가 통하지 않는 나리께서는 오로지 자력으로 눈을 뜨실 테니, 그렇다면 자신도 제 힘으로 직접 낫겠다고 하셨습니다.’

메산이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재겸은 초여름에도 눈보라가 몰아치는 돔 속의 오두막집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쯤은 얘기를 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왜냐면. 왜냐면 메산이를 도와줬으니까. 그리고 선물도 줬으니까. 그리고, 또….

아마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정확히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

하지만 이젠 전부 잡쳤다는 생각이 든다. 재겸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끌리며 끽, 불쾌한 소리가 났다. 그러자 윤태희가 팔을 뻗어 재겸의 손목을 강하게 틀어쥐어 왔다.

“그래, 맞아. 개새끼야.”

윤태희가 말했다.

“근데 몰랐던 거 아니잖아. 새삼 실망하기라도 했어?”

윤태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낮게 덧붙였다.

“개새끼니까 역적질을 하겠지. 안 그래?”

이어진 말에 재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례청은 무너질 거야. 내가 부술 거니까.’

‘자꾸 너였으면 좋겠어, 이 역모에 가담해 줄 사람이.’

재겸은 제 손목을 옭아맨, 핏줄이 불거져 나온 손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

살갗에 닿는 온기가 뜨겁고 묵직했다. 재겸이 삐딱한 눈으로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윤태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피에 젖은 그날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 했다.

“그래, 잘해 봐.”

재겸이 싸늘하게 대꾸하며 잡힌 손목을 비틀었다. 놓으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윤태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윤태희가 눈을 내리뜨고 말했다.

“나한테 거짓말했어. 너.”

“헛소리 집어치우고 손 치워.”

“나한테 궁금한 거 없다는 말, 너 그거 거짓말이야.”

재겸이 인상을 쓰며 손목을 거칠게 잡아 빼려고 했다. 그러나 윤태희를 떨쳐내기는커녕 뿌리치는 힘으로 오히려 가깝게 끌어당긴 꼴이 되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둔 윤태희의 상체가 밀착하듯 붙었다. 가까워진 거리에 재겸이 반사적으로 몸을 물릴 때였다.

“넌 내가 궁금해졌어. 그래서 여기에 온 거야.”

“미쳤냐? 너 같은 거 관심도 없어.”

재겸이 눈꼬리에 날을 세우며 싸늘하게 받아쳤다.

“그래? 그럼 궁금하게 만들어 줄게.”

무감한 눈으로 재겸을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말했다.

“나는 나례청을 부수고, 나례청장의 목을 딸 거야. 내 원수거든, 그 사람. 사연은 간단해. 눈앞에서 가족이 몰살당했어. 흔해 빠진 복수극이지.”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내 복수를 도와준다면, 나도 네 복수를 도와줄게.”

윤태희가 덧붙였다.

“…뭐?”

재겸이 낯을 굳혔다. 윤태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복수를 도와주겠다니? 복수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그때, 윤태희가 재겸의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이번에 재겸의 상체가 윤태희에게 안기듯 쏠렸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재겸이 저도 모르게 윤태희의 어깨를 짚고 몸을 지탱했다. 셔츠 너머로 단단하고 넓은 어깨가 만져졌다.

“네 진짜 원수는 따로 있다고 했잖아.”

윤태희가 고개를 숙이더니 재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죽여 줄게. 널.”

숨결과 함께 아릿한 잔향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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