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넓은 창가를 가득 메운 불타는 저녁놀이 액자처럼 걸려 있었다. 규칙적인 시계 초침 소리 사이로, 재겸은 자신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묵직한 소리를 들었다.
“너, 방금… 뭐라 그랬어?”
날카롭고 또렷한 시선이 재겸을 응시해 왔다.
“죽고 싶은 거잖아. 내가 도와줄게.”
젖어 드는 노을 속에서 둘의 시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한참 만에 목소리를 냈다.
“아니, 넌 못 해. 나는 뭘 해도 안 죽어.”
지금껏 죽고자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숱한 시도의 결론은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죽여 주겠다고? 믿어지지도 않고, 믿을 수도 없는 말이었다.
윤태희는 터무니없는 말로 자신을 현혹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재겸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윤태희의 낯이 이를 데 없이 무표정하기 때문이었다.
윤태희는 미소가 꽤나 헤펐고, 늘상 희미한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다정하고 친절한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서점에서 맞닥뜨린 그날 이후로, 그 웃음기 속에 한 톨의 감정조차 내비치지 않는 날카로운 눈매가 숨어 있음을 알았다.
윤태희는 때때로 나무 꼭대기에 앉아 광활한 대지를 내려다보는 맹금류와 같은, 냉연한 얼굴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윤태희의 본연이라는 것을 재겸은 알고 있었다.
“너,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는데….”
재겸이 입술을 달싹이자, 윤태희가 재겸의 말을 끊었다.
“방상시(方相氏)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어?”
“…뭐?”
“방상시는 과거 선대 나례청의 주인이야. 처음으로 나례청을 세운 것도 방상시였고, 선대 나례청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우두머리 노릇을 했어.”
오랜 역사를 이어 오던 선대 나례청이 해체된 것은 약 200년 전의 일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나례청이 공식적으로 재건된 시기는 20세기 중반 무렵으로, 현대의 나례청이 자리를 잡은 지 반 세기 정도가 흐른 셈이다. 과거 선대 나례청의 수장은 방상시였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나례청장이라는 이름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나례청을 이끌고 있었다.
“현대 나례청의 수장은 나례청장이지만, 방상시와 나례청장은 달라. 나례청장은 직함에 불과하고 그래 봐야 다른 나자들과 똑같은 인간이거든. 하지만 방상시는 악귀를 쫓는 신(神)의 이름이었어. 애초에 인간이 아니었지.”
나례청 내부에서도 방상시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극히 드물며 공개된 정보 외에는 기밀로 다뤄진다. 그러니 재겸으로선 방상시에 관해 아는 바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사내는 나자였던 과거를 숨겼던 데다가, 그땐 선대 나례청이 무너진 뒤였으니 여러모로 접근하기 힘들었던 영역이었다.
“그래서 방상시에게는 인간으로선 넘볼 수 없는 특별한 권능이 있었어. 그 힘은 방상시가 쓰고 다니던 탈에 숨겨져 있었지. 그 탈을 쓰고 혼에 새겨진 이름을 세 번 부르면, 귀신이든 인간이든 이름을 불린 그 대상은….”
윤태희가 재겸과 눈을 맞추며 천천히 덧붙였다.
“이 땅에서 사라지는 거야.”
한 호흡 느리게 흘러나온 말에 재겸이 눈을 크게 떴다. 그와 동시에 윤태희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이 곱아들며 셔츠 자락을 험악하게 움켜쥐었다. 윤태희는 제 어깨를 쥔 손에 힐끗, 시선을 던졌다가 재겸을 바라보았다. 역시 소년은 이해가 빨랐다. 윤태희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 탈, 나례청장이 가지고 있어.”
재겸의 눈가 한쪽이 일순 경련했다. 거대한 창 하나가 머릿속을 꿰뚫는 느낌이었다.
윤태희는 나례청장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나례청장의 손에는 이 삶을 끝낼 수 있는 방상시의 탈이 있다. 윤태희의 입에서 나온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 탈을 빼앗아서 널 죽여 줄게. 네가 무슨 저주에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혼이 있는 존재라면 방상시의 탈은 반드시 통할 테니까.”
모든 생명에는 혼이 있다.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라 이지가 없는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생명이 있는 존재는 반드시 혼을 지니고 있다. 생이 다한다는 것은 이 혼이 혼불이 되어 몸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혼이 혼불이 된다는 것은 명백한 사망 선고였다. 몸이 약하거나 생기가 흐려지면 육체에서 혼이 빠져나오기도 하고 혼을 떼어 낼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혼(生魂)’이고, 혼불은 죽은 혼이었다.
따라서 생자의 몸에서 한번 빠져나온 혼불은 절대 다시 살려 낼 수 없다. 하늘로 승천하여 이승을 떠나거나, 땅에 들러붙어 이승에 남거나. 후자가 바로 귀신이다. 귀신은 이미 생이 다해 한 번 죽었던 혼불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방상시는 혼불을 하늘로 돌려보낼 수 있는 권능을 지닌 존재였다.
방상시의 탈을 쓰면 황금사목(黃金四目)을 통해 혼에 새겨진 이름을 볼 수 있다. 그 이름을 세 번 호명하면 생자인 인간의 혼을 비롯하여 혼불 그 자체인 귀신까지도, 모든 혼을 이승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섭리를 다스리는 절대적인 힘. 악귀를 쫓는 신(神)이라는 수식에 걸맞은 권능이었다.
“왜… 왜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옷자락을 힘껏 움켜쥔 재겸의 손등에 뼈가 불거졌다. 재겸은 지금 힘겹게 의심을 하고 있었다. 잔혹하게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렇기에 재겸은 혼란스러운 거였다.
믿어지지 않아도 믿어야만 했고, 믿고 싶었으며,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재겸은 스스로 약점을 내버렸다. 그렇게 협박은 무효가 되었고 나자가 되어야 할 명분 또한 사라졌다. 그리고 윤태희는 다른 나자들의 기억을 지움으로써 재겸이 내던진 비밀을 손수 주워서 되돌려 주었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이었다. 그리고 윤태희는 여전히 끈질겼다. 이번엔 협박도, 회유도 아니었다.
도와줘.
윤태희는 자신의 복수를 도와 달라고 했다. 그 보상으로 널 죽여 주겠노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번 제안은 아찔할 정도로 달콤했다.
“왜… 왜 지금에서야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나를 속이고 협박하고, 그러다 아무것도 통하지 않으니까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언젠가 윤태희는 물었다. ‘박제 당한 기분은 어때?’ 그건 궁금해서 물어 본 게 아니었다. 윤태희는 그 시점에 이미 정확하게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태희는 지금에서야 입을 열었다. 온갖 불신을 심어 놓고서, 믿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는 믿지 않으면 안 될 얘기를 꺼낸다.
윤태희는 소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맞아. 협박도 안 먹히고, 약점을 잡은 것도 도루묵이 되어 버리고, 하다 하다 안 통해서 이제 와서 얘기하는 거야. 이걸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
사실 윤태희로선 나례청을 부술 계획을 털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례청이 아니라 저에게 충성하는 후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말이다. 어차피 하라는 대로 할 테니 굳이 위험하게 계획을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윤태희는 마치 스도쿠를 하듯이 치밀하게 가능한 수를 헤아렸다.
재겸이 나자를 싫어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이 모든 계획을 털어놓기엔 토대가 빈약하고 위태로웠다. 어쨌든, 윤태희 자신도 일단은 나자였다. 제 말을 들어 줄지 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재겸이 나자를 싫어하는 이유는 원수가 나자였기 때문이다. 나자 모두가 원수인 저와는 결이 달랐다. 그러니 나례청을 부순다는 계획에 협조해 줄지는 미지수였다.
“나는 나례청을 부수기 위해서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 왔어.”
윤태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칫하다간 모든 일이 물거품이 돼. 사방에 널린 게 나자야. 당장 네가 밖으로 나가서 윤태희가 나례청을 부술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는데, 아무런 담보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내 목덜미를 갖다 바칠 순 없었어.”
재겸이 윤태희를 믿지 못하듯이, 그건 윤태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윤태희도 재겸을 믿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계획을 밝히지 않는 선에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간의 시도들은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네가 나를 못 믿는다는 건 알아. 굳이 믿을 필요 없어. 넌 네 손에 쥔 것을 믿으면 돼. 나도 내 손에 쥔 것을 믿을 테니. 이제 우린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잖아.”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친구가 되긴 글렀고. 겸상할 사이도 아니라면, 서로의 목덜미를 쥐고 있는 사이로 하자.”
다정한 손이 재겸의 뒷목을 천천히 감쌌다.
“내가 살면 넌 죽고, 네가 죽으면 내가 사는 거야. 어때? 꽤 각별하고 낭만적이지 않아?”
윤태희가 고개를 내리고 재겸에게 시선을 맞췄다. 목덜미를 감싼 손바닥으로 살아 숨 쉬는 맥박의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손에 닿은 살갗이 생각보다 훨씬 여리고 뜨거웠다.
“…….”
재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윤태희는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과를 해 봤자 너에게 도움이 되는 건 없을 테니 차라리 그럴 바엔 현실적인 이득을 안겨 주겠다고. 윤태희는 그 무엇 하나 부정하지도 않았고 제 선택을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차곡히 쌓아 올린 실패를 그대로 안고, 또다시 재겸의 앞에 섰을 뿐이다.
마지막이 될, 새로운 패를 손에 들고서.
‘넌 네 손에 쥔 것을 믿으면 돼.’
‘내가 죽여 줄게. 널.’
긴 정적을 깨고 재겸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내가….”
재겸은 눈에 힘을 주고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소년의 온기가 눌어붙어 있던, 윤태희의 손끝이 전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