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71)화 (71/348)

#71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또렷한 눈동자가 윤태희를 명중하였다. 순간, 윤태희는 폐부를 깊숙이 찔러 오는 기묘한 희열을 느꼈다.

“…….”

윤태희는 말없이 고개를 내려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느리게 손을 쥐었다 폈다 해 보았으나, 소년의 목덜미에서 옮아 온 맥동하는 감각이 여전히 손안에 잔류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치 환상통처럼.

“묻잖아. 뭘 하면 되냐고.”

한참 동안 말이 없는 윤태희를 향해 재겸이 재차 물었다.

“우선은 ‘윤태희’를 훔쳐 줘.”

난해한 답변이었다. 재겸이 뭐라 되묻기도 전에, 윤태희가 검지를 들더니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켜 보였다.

“내 이름 석 자 말이야.”

이름을 되찾아 오는 것.

이것이 역모의 첫 단추가 될 것이다.

“기억해? 그때 비마가 했던 말.”

일전에 윤태희는 같은 편인 나자들에게 흑망조를 날려 보냈고, 그 대가로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겪었다. 그에 비마가 고통의 원인을 짚어 주었는데, 그것은 실로 정확한 진단이었다.

“나례청에 소속된 모든 나자들은 피의 계약을 맺어야 해. 같은 나자를 향해 예고 없이 귀기를 쓰거나 위해를 가해선 안 된다는 거야. 만약 계약을 위반하고 금기를 깰 경우, 그 반동으로 큰 고통을 겪게 돼.”

재겸은 피를 토하며 신음하던 윤태희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며 제 어깨에 몸을 기대 오던, 그 묵직한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리고 윤태희는 그런 고통을 직접 겪었음에도 마치 남 일인 양 별다른 내색 없이 태연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이 계약의 요지는 간단해. 같은 나자를 공격해선 안 된다는 건데, 말로는 안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상은 내부의 적을 경계해서 만든 최소의 방어선인 셈이야. 나처럼 역적질 못 하게 하려고 목줄을 채워 둔 거지.”

말을 이어 나가는 윤태희의 낯이 냉철했다.

굳이 이런 제약이 없더라도 나자들은 원체 충성심이 높았다. 하지만 어딜 가나 돌연변이는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아주 희박한 가능성조차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곳이 나례청이다. 나례청이란 그런 곳이었다.

분열과 반란을 봉쇄하는 거대한 철문. 이 철문을 뚫지 않는 이상 역모는 불가능하다. 이 역모의 최종 도착지는 나례청장이다. 나례청장에게 가기 위해선 당연히 그 길목을 지키고 있을 많은 적수를 상대해야만 한다. 이 계약’을 떨쳐 내지 못한 상태에서 나례청에 맞서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정식 나자가 되면 반드시 목찰(木札)에 피로 이름을 새겨서 제출해야 해. 그 목찰을 매개로 계약을 맺는 거야. 그리고 이 목찰은 나례청 명부실에서 보관하지. 그리고 네가 해 줄 일은 ‘윤태희’를 윤태희에게 돌려주는 거야.”

이것이 바로 윤태희가 그려 온 밑그림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오랫동안 설계해 왔던 모든 계획의 시작을 알리는. 묶인 이름을 되찾으면 계약을 파훼할 것이다. 족쇄가 사라지면 자유의 몸이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을 얻은 용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지축을 울리며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내 이름이 적힌 목찰을 빼돌리는 것. 그게 네가 할 일이야.”

굳게 닫힌 빗장을 열어 줄 문지기. 그건 바로 소년이었다.

“그러면, 그다음엔?”

재겸의 물음에 윤태희가 부드럽게 말을 덧붙였다.

“전쟁을 시작해야지.”

전쟁. 두 글자를 입에 담는 얼굴은 태연자약했다.

“나례청에 쳐들어갈 거야.”

이어진 말에 재겸이 고요한 눈으로 윤태희를 보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재겸의 시선을 받아 내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빙그레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무겁고 심각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자,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개요라고 생각하면 되고.”

윤태희가 테이블에 반쯤 걸터앉으며 느슨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자세한 내용은 천천히 얘기해 줄게. 일단은 나례청에 입청하는 게 먼저일 테니까.”

당장 하루아침에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오랫동안 공들여 설계한 판이 무너지지 않도록 운과 때를 잘 맞춰야 했다. 우선은 나례청이 어떻게 굴러가는 곳인지 파악하고 분위기를 익히는 것이 중요했다. 초반 한두 달은 적응기가 될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에 윤태희 역시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알았어.”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재겸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윤태희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좋아. 그럼….” 윤태희가 산뜻하게 운을 떼며 데스크 안쪽으로 향했다. 한쪽에 밀어 두었던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액정을 건드렸다.

“이사할 집은 지금 사는 집이랑 비슷하면 되나?”

난데없는 질문에 재겸이 슬쩍 눈을 들었다. “뭐?” 윤태희는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중얼거리듯 말을 건넸다. “산에 붙어 있고 외진 곳이면 돼?” 윤태희가 입술을 매만지며 한 손으로 액정을 스크롤했다.

“나례청에서 제일 가까운 산은 북악산이긴 한데. 여긴 워낙 개발이 많이 돼서, 북악산보다는 인왕산이 나아. 훨씬 조용하니까. 대신 여긴 좀 낮고….”

***

아침 일찍 학교에 나섰던 재겸은 어둑한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에 들어서자 다다다, 바닥이 가볍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메산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부랴부랴 마중을 나왔다.

“나리! 다녀오셨습니까?”

재겸은 컨버스 운동화를 훌훌 털어 내듯 벗고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곧바로 메산이가 허리춤에 찰싹 달라붙어 왔다.

“잘 놀았어?”

“네!”

“뭐 하고 놀았어?”

“어어, 너구리랑요!”

“또 너구리?”

“예에.”

“이제 못 보니까 섭섭하겠네.”

“예에….”

둘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거실로 갔다. “재겸아, 왔어?”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하고 있던 정주가 반가운 얼굴로 재겸을 돌아보았다. “응. 뭐 하냐?” 재겸이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놓으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어, 뭐 좀 보느라….”

인터넷 창에는 굵직한 헤드라인이 떠올라 있었다. 정주 건강 회복 중, ‘잠적설’ 정주 복귀할까, 정주 최근 근황은…. 본인 기사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약간 민망했는지, 정주는 헛기침을 하며 노트북을 덮었다.

“그 친구랑 밥은 잘 먹고 왔어?”

정주가 무릎에서 노트북을 치우며 물었다.

“아, 뭐. 어….”

재겸이 뺨을 긁적이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정주는 당연히 재겸이 조영우와 저녁을 먹은 줄로 알고 있었다.

“뭐 먹었는데?”

“그냥, 뭐. 근처에서 파는 거.”

평소의 무심함을 가장하며, 재겸이 애써 태연하게 대답을 할 때였다.

“재겸아, 혹시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나 다를까, 정주가 곧바로 질문을 던져 왔다. 아침에 비해 재겸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어? 아니… 별일 없었는데.”

뜨끔한 재겸은 괜히 넥타이를 매만지며 딴청을 피웠다.

“에이, 무슨 일 있었지?”

마지막 등교라서 아쉬웠나? 감이 예민한 여우는 의심의 눈초리를 했다. 정주가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것처럼, 재겸은 지금 머릿속이 복잡하고 우중충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렇게 둘의 얼굴을 보게 되어서 더 심란해졌다.

지금껏 재겸은 정주와 메산이를 밀어내기만 했었다. 혼자 남을 것이 두려워서 좀처럼 곁을 내어 주질 못했다. 다가올 작별의 그림자를 상상하고 겁내느라 저를 속이고, 또 속였다. 그랬던 재겸이 아직 찾아오지 않은 슬픔을 미리 슬퍼하지 말자고, 애써 결심한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그리고 오늘. 눈앞에 새로운 길이 생겨났다.

길의 시작에는 윤태희가 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꿈에 그리던 죽음이 있다. 이제야 한결 편하게 온기를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세 식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비로소 몸을 누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윤태희로부터 ‘죽음’이라는 두 글자를 듣는 순간, 재겸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위력을 느꼈다. 그것은 지금의 평안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안식 그 자체였으므로.

만일 이 세상이 끝나는 순간이 오더라도 자신만은 버젓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고단한 삶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오래도록 바라 온 일이었다. 그런데 왜 마음껏 기뻐할 수 없는 걸까? 재겸은 이 싱숭생숭한 감정의 정체를 어렴풋이 가늠해 냈다. 바로 죄책감이었다.

내가 기쁘면 너희도 기쁠까? 그럴 것이다. 착한 녀석들이니 제 일처럼 기뻐해 줄 것이다. 내게 좋은 일은 너희에게도 좋은 일일까? 당연히 누구보다 열렬히 축하해 줄 것이 틀림없는데. 근데 그게 죽음이라면? 내가 죽는다면…?

너네는 내 죽음을 반겨 줄까?

“나는… 나는 너네가 기뻐해 줬으면 좋겠어.”

재겸이 흘리듯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잘 안 들렸어.”

정주가 귀를 쫑긋거리며 되물어 왔다. 재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자꾸만 상념에 잠기게 된다.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래. 원랜 진작 죽었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제라도 그래야 한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정주도 메산이도 사라질 것이다. 순서만 다를 뿐이지, 이래야 맞는 거니까. 재겸은 애써 죄책감을 흩트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 하고 싶은 거 생겼다.”

엉? 뜻밖의 말에 정주가 눈을 동그랗게 뜰 때였다.

“서울로 가서 나자할 거야.”

때때로 어떤 결심은 말로 꺼내야 굳건해진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