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서울로 가서 나자할 거야.”
옆에서 정주가 밀어 둔 노트북을 열었다, 폈다 하며 장난을 치고 있던 메산이도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재겸이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
“…….”
소파에 앉아 있던 정주가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 안 그래도 이렇게 지내는 거 너무 심심하고 지루했어. 너네도 내가 집 밖에 나가길 원했잖아. 그리고 나자가 되면 너랑 메산이를 지켜 줄 수도 있고, 지난번과 같은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야.”
정주는 얼빠진 표정으로 재겸을 응시했다.
“윤태희가 도와주겠다고 했어. 그리고 이사할 수 있는 집도 소개해 준대. 북한산 기슭에 있는 집인데, 북한산은 서울의 주산(主山)이라 정기도 맑다고 했어. 바로 뒤에 산도 있고, 마당도 넓고, 담장도 높고, 동네에서도 외진 곳에 있어서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대. 빈집이라 당장 이사해도 된다고 했어.”
재겸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덤덤히 말을 이어 나갔다.
“다 같이 서울에서 살면 정주 너도 지금보다 훨씬 편할 거야. 지금처럼 힘들게 왔다 갔다 안 해도 되잖아. 사람이 많아서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어차피 내가 나자가 되면 해결될 문제니까 어쩌면 지금보다 더 안전할 수도 있어.”
정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얘가.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자고로 직장인은 출퇴근이 편해야 한다고. 윤태희가 그랬어.” 재겸은 진지했다. 윤태희가 농담조로 건넨 말까지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옮기면서 이상한 줄도 몰랐다.
“…….”
마침내 사색이 된 정주의 입가가 파들파들 경련했다.
“거 봐, 내 감이 맞았어….”
학교에 보내고 싶지 않았더랬다. 무슨 사달이 날 것만 같아서 이상하게 걱정이 되었고, 마음이 불안했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지만 노파심이겠거니 애써 무시했다. 그저 알아서 잘하겠거니, 믿어 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정주가 느끼던 막연한 위기감은 현실이 되었다.
“재겸아! 너 대체 무슨 얘길 듣고 온 거야?”
정주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그 개자식이, 대체 무슨 말로 널 꼬드겼는진 몰라도, 그거 아니야. 재겸아.”
정주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재겸의 어깨를 와락 붙잡았다.
“잊었어? 메산이를 데려간 게 그놈들이야. 나자들이라고. 그날, 너 그렇게 다치게 만든 것도 걔네야. 근데도 어떻게 나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
“알고 있어. 그리고 내가 나자가 되면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재겸의 어깨를 쥐고 있던 정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걔가 그래? 나자가 되면 안전해진다고, 나랑 메산이 핑계라도 댔어?”
“아니. 너랑 메산이 때문에 나자 되려는 거 아냐.”
재겸이 손을 들어 정주의 손등을 그대로 덮었다. 정주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꺾을 수 없는 강경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나 때문이야. 오로지 나를 위해서야.”
“…….”
“나도 한 번쯤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보고 싶어.”
“…….”
정주는 후회했다. 학교에 보내지 말 것을. 아니,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묻지 말 것을. 재겸은 허락을 구하거나 의견을 나누기 위해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다. 전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야말로 반칙과도 같은 말이었다.
정주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아찔할 정도로 탈력감이 들어서, 정주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허망한 낯으로 고개를 숙이던 정주가 그대로 쪼그려 앉더니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중간에 끼어 안절부절못하던 메산이는 숨을 죽인 채 둘에게 번갈아 시선을 던졌다.
“재겸아. 그 사람, 믿으면 안 돼….”
정주가 애원하듯 읊조렸다. 재겸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소파에 기댄 몸이 무겁게 늘어졌다.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재겸은 윤태희의 말을 떠올렸다.
‘너는 네 손에 쥔 것을 믿으면 돼.’
“걱정 마. 나 걔 안 믿어….”
재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냥, 홀린 것뿐이야.”
그 말을 끝으로, 재겸은 눈을 감았다.
***
이튿날 아침, 정주는 활기찬 목소리로 재겸을 깨웠다.
“재겸아! 메산아! 밥 먹자!”
이불을 둘둘 말고 잠에 빠져 있던 재겸이 비몽사몽 상태로 몸을 일으켰다. 메산이가 멍한 재겸의 손을 잡고 침대 밖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질질 끌려 부엌에 이르자 식탁에는 이미 한 상 가득 아침밥이 차려져 있었다. 멀뚱멀뚱 서 있던 재겸이 자리에 앉자마자 정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숨을 후, 크게 내쉬었다. 준비한 말을 꺼내려 할 때면 흔히 볼 수 있는 전조였다.
“재겸아. 어제는… 내가 미안했어.”
느릿느릿 물컵에 손을 가져가던 재겸이 눈을 들었다.
“…….”
어젯밤, 내내 쪼그려 앉아 있던 정주는 한참 만에 몸을 일으켰다. 재겸은 방으로 들어가는 정주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정주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탁 소리와 함께 방문이 힘없이 닫혔다. 그러나, 재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도 한 번쯤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보고 싶어.’
정주는 절대로 이 말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네가 원한다면, 너는… 너는 뭐든지 해도 돼.”
왜냐면 넌 나를 위하니까. 언제나 그랬으니까.
“……고마워.”
재겸은 올곧은 시선으로 정주를 바라보았다.
결국 정주는 언제나처럼 한 보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어차피 재겸이 마음을 먹었다면 정주로서는 그 뜻을 꺾을 도리가 없었다. 연예인이 되겠다는 자신의 선택을 재겸이 두말없이 존중해 준 것처럼, 저 역시 그래야만 한다. 이것이 정주가 밤새 고민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 식구에게 나자는 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존중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었으므로, 선택을 받아들이는 건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그래, 서울로 가자. 재겸아.”
그리하여 정주는 재겸의 판단을 믿어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이사할 집은 내가 알아보면 안 돼?”
서울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어서 애시당초 선택지에 없던 도시였다. 예전에야 셋이서 같이 서울에서 살면 좋겠다고 해맑은 생각을 가졌던 적도 있지만, 나자를 맞닥뜨린 이후로는 죽어도 절대 사양이었다.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나자도 많을 것이니, 혹시나 전처럼 덜미를 잡힐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급변했다. 이렇게 된 이상 서울행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정주는 윤태희가 소개해 준 집에 들어가서 살고 싶지 않았다. 어딘지 불안하고 찜찜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서울로 범위를 넓힌다면 조건에 맞는 집을 찾는 건 훨씬 쉬울 터였다. 도시 외곽과 도심 안팎으로 산이 많으니 금방 집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나 그 사람 못 믿겠어. 마음에 안 들어.”
물론, 그날의 일을 돌이켜 보면 윤태희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 상황에서 메산이를 도와주었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나자들의 기억을 지워 주었다. 있는 그대로의 정보만 놓고 보면 윤태희가 딴 나자들과 뭔가 다르다는 건 사실이긴 했다. 게다가 재겸은 쉽게 방심하거나 마음을 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정주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주는 어쩐지 윤태희에게서 불길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래. 알았어.”
다행히 재겸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셋은 평소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어제만 해도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는 금세 사라졌다. 사이좋게 한 보씩 양보하고 나니 내내 마음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식탁 풍경에 메산이도 한결 안색이 환해졌다.
메산이가 좌우로 몸을 흔들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서울에요. 서울에 가면요. 셋이서 사는 거지요?”
메산이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네? 정주 님도 같이요, 전처럼요? 네?”
“응. 그렇지. 우리 셋이 사는 거야.”
젓가락질을 하던 정주가 웃으며 대꾸했다. 메산이가 수저를 내려놓고 손뼉을 쳤다. 다시 셋이 산다니 아주 기쁜 모양이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고 또 물었다. 재겸은 입을 우물거리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때,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정주는 당연히 제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고 소파에 던져 두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 이거 아닌데.” 소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정주의 시선이 반쯤 열려 있는 방문에 닿았다. 벨소리는 재겸의 방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재겸아. 휴대폰 어디에 뒀어?”
“교복 바지 주머니 안에.”
정주는 재겸의 방에서 휴대폰을 갖고 나왔다. 액정에 떠오른 번호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휴대폰의 번호를 알고 있는 건 가까운 지인 몇 명뿐이다. 여기로 전화 걸어 올 데가 없는데. 뭐지….
정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재겸아. 너 누구, 번호 알려 줬어?”
“아니. 번호를 알아야 알려 주지.”
난 그거 번호 어떻게 보는지도 몰라. 재겸은 태평하게 대꾸하며 계란말이를 집었다. “아, 맞네.” 정주가 순순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겸의 학습 진도는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스팸인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주는 통화 버튼을 누른 뒤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가 보았다.
“여보세요.”
몇 초 사이에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안녕하세요. …정주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