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74)화 (74/348)

#74

“나례청 축역부 제1팀, 수석 나자 윤태희입니다.”

“아. 어, 네. 전 정주라고 해요. 아시다시피 호족이구요….”

윤태희가 반 깁스를 한 오른손 대신에 멀쩡한 왼손을 들어 정주에게 악수를 청했다. 능숙한 리드에 이끌려 정주가 얼떨결에 손을 맞잡았다.

“나례청이나 나자에 관해선 어느 정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윤태희가 손을 거둔 뒤 차분히 말을 이었다.

“우선은 먼저 사과부터 드리고 싶어요. 그날 있었던 일은 유감입니다. 제구부 나자들이 큰 피해를 끼쳤습니다. 비록 저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고는 해도, 그와 별개로 저 역시 같은 나자로서 도의적인 책임감을 느낍니다.”

어느새 윤태희의 표정은 진지했고,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낮았다. 정주는 내심 놀란 눈치였다. 이렇게 갑자기 정면으로 부딪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반면에 재겸은 황당한 얼굴로 윤태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단둘이 있었을 때 보여 준 태도와는 영 딴판이었다. 후회도 반성도 안 하고 잘못한 것도 없다더니. 무슨 꿍꿍이로 저러는 건지는 대충 감이 잡혔다. 번지르르하게 꾸며 낸 말로 상대를 구슬려 호감을 사려는 거다.

“간혹 나자들 중에선 그렇게 남을 핍박하고, 어떻게든 이용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인간의 이기심이 빚어낸 비극이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나자들이 그렇진 않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기가 찬다, 기가 차… 재겸이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만 같아선 너도 그랬잖아, 하고 삐딱하게 어깃장을 놓고 싶었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어쨌든 윤태희와 손을 잡았으니까. 같은 편이라면 정주와 메산이로 하여금 의심보다는 신뢰를 얻도록 하는 쪽이 나았다.

“그럼 왜 재겸이한테 나자가 되어 달라고 하신 거죠?”

그때, 정주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낯으로 물었다. 듣자 하니 본인도 나자에 대해 그닥 긍정적으로 생각하진 않는 것 같은데…. 정주의 질문에 재겸이 슬쩍 윤태희의 눈치를 봤다. 설마 사실대로 얘기할 건 아닐 테고.

그러자 윤태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는 나례청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나으리 같은 분과 함께 한다면 좋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고 믿어요. 그래서 동료가 되어 달라고 부탁을 드린 거예요. 나으리는 올곧은 분이시니까요.”

청산유수와 같은 말에 재겸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아니, 쟤는 입에 무슨 기름칠을 했나…. 윤태희가 말하는 ‘올바른 방향’이 나례청을 박살 내겠다는 의미라는 걸, 정주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워낙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이어서, 정주는 어느새 윤태희의 말에 수긍을 하고 있었다. 그치. 우리 재겸이가 올곧긴 하지. 메산이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끄덕끄덕 흔들고 있었다.

“우려가 많으시다는 건 알아요. 이해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지난번과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수석의 이름을 걸고 약속드릴게요. 여러분의 신변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 생각입니다.”

윤태희가 품 안에 끼고 있던 서류 봉투를 건넸다.

“봉투 열어 보면 문서 세 개가 들어 있을 거예요. 하나는 정주 씨 복귀작 시나리오, 하나는 재겸, 아니, 나으리 신상. 하나는 이사할 집 관련된 서류.”

봉투를 받아들던 정주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네? 제 복귀작 시나리오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원인 제공을 했으니 같은 나자로서 제가 책임지려고요.”

빙그레 웃던 윤태희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정주 씨, 혹시 권순철 감독이라고 알아요?”

멈칫하던 정주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네, 당연히 알죠. 영화계 젊은 거장이시잖아요.”

윤태희가 입에 담은 권순철 감독은 완성도가 높은 영화를 만들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로, 정주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권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도 출품을 많이 했고,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외골수 기질이 있어 평소엔 두문불출하기로 유명했다.

배우라면 누구나 권 감독과 함께 작업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권 감독이 배우를 기용하는 기준은 워낙 난해하여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건 정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연줄이라도 만들고 싶은 마음에 여기저기 수소문해 봤지만 전부 허사였다.

윤태희가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그분, 귀재거든요. 예전에 그분이 골치 아픈 일에 엮인 적이 있는데, 제가 어쩌다 우연히 도와주게 돼서 그때부터 알고 지냈어요. 아,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 비밀이에요. 순철이 누나가 알았다간 나 혼나요.”

친근한 호칭에 정주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순철이 누나?! 그냥 아는 사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순철이 누나라고…?! 누나라고 부를 정도면 보통 아는 사이가 아니라는 얘긴데. 정주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침을 꼴깍 삼키자, 윤태희는 자연스럽게 쐐기를 박았다.

“하반기에 새 작품 들어간다고 들었어요. 괜찮으시면 제가 다리 좀 놔 주려고요. 복귀작으로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때요? 권 감독 영화라면 여론 반응도 꽤 괜찮을 거예요. 시나리오 넣어 놨으니 한번 읽어 보세요.”

저 새끼… 재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권순철 감독님의 신작이라니….”

어느새 정주는 감격한 얼굴로 시나리오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고도 네가 여우냐…?

“꼬리 떼라, 넌.”

재겸이 작게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윤태희의 귀에도 들렸는지, 윤태희는 눈동자를 굴려 재겸을 힐끔 보았다가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눈치챈 듯했다.

“그리고 우리 나으리 신상은, 제가 손을 좀 봤는데.”

윤태희가 손목을 걷어 시계를 확인한 뒤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서류상으로 정주 씨와의 연결고리를 없애고, 신상을 새로 팠어요. 어느 한쪽의 정보에 접근하더라도 서로가 연관이 있다는 걸 모르게끔. 정체를 숨기기에 수월할 겁니다. 나중에 찬찬히 살펴보세요.”

재겸이 나자가 되면 본청에선 재겸의 신상 정보를 조회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서류상 친인척 관계에 있는 정주가 본청의 레이더에 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전에 윤태희 본인이 둘의 관계를 캐냈던 것처럼.

윤태희는 직급이 높은 만큼 지니고 있는 권한 역시 많았다. 어제의 적에서 오늘의 아군이 된 윤태희는 든든한 지원을 자처했다. 내 편이 되어 준다면 나도 네 편이 되어 주겠다던 말은 이런 걸 두고 얘기한 모양이었다.

“앞으로 공적 사항에 손댈 일 있으면 저를 통해서 하세요. 그편이 훨씬 안전할 거예요. 그밖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하시고요.”

윤태희는 그간의 실점을 제대로 만회했다.

윤태희가 소개해 준 집에선 살기 싫다고 찡찡대던 정주는 어느새 서류를 뒤적거리며 이사할 집의 등기부 등본을 살펴보고 있었고, 메산이는 묵언 수행을 유지하면서도 뭔가에 홀린 것처럼 윤태희의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에 윤태희가 씩, 웃으며 손을 살랑거렸다.

“동자님.”

메산이가 눈치를 보더니 쭈뼛쭈뼛 다가갔다. 윤태희가 메산이 앞에 쪼그려 앉으며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드티 주머니를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짠, 하며 손바닥을 내보였다. 손바닥 안에서 한입 크기로 포장된 초콜릿이며 사탕이 몇 개 나왔다. 단 것을 아주 좋아하는 윤태희는 가방이며 옷 주머니 속에 군것질거리를 넣어 다니곤 했다.

메산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바닥을 내려다볼 때였다. 뭔가를 발견한 윤태희가 아, 외마디 소리를 냈다. 단 것들 사이로 작은 라이터가 섞여 있었다. 윤태희가 입꼬리를 삐뚜름히 올리며 라이터를 슥 골라낸 뒤 재빨리 감췄다.

“이건 빼고….”

윤태희가 멋쩍게 웃으며 라이터를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자, 받아요.”

메산이가 저도 모르게 양손을 나란히 펼쳤다. 윤태희는 메산이의 손에 단 것들을 한가득 쥐여 준 뒤 “이건 안에 잼이 들었고, 이건 안에 아몬드가….” 하며 설명을 해 주었다. 재겸은 그 모습을 멀뚱히 서서 바라보았다. 윤태희는 오늘따라 놀라울 정도로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상식적이고, 정중하고, 다정했다. 마치 도서실에서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

재겸은 불현듯 윤태희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만약 윤태희의 본연을 보지 못했다면, 저 역시 지금까지도 속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저 친절 뒤에는 서늘한 얼굴이 있다는 것을. 그걸 몰랐을 땐 이미 몇 번이고 속았던 것 같다. 재겸은 언젠가 윤태희에게 느꼈던 실망감을 어렴풋이 떠올려 냈다. 까슬까슬하던 그때의 기분을.

반창고를 붙여 주고 자주 놀러 오라던 윤태희. 넥타이를 빌려주고 친구가 되자고 했던 윤태희. ‘참 잘했어요.’라고 말하던 윤태희. 잠든 사이에 머리맡에 오르골을 놓고 갔던 윤태희….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꾸며 낸 걸까?

“…야.”

도서실 풍경을 떠올리던 재겸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쪼그려 앉아 메산이에게 초콜릿을 까 주던 윤태희가 고개를 들었다.

“네?”

말을 걸어 놓고, 재겸이 슬쩍 시선을 내렸다.

“그럼… 이제 너도 학교 안 가냐…?”

시들시들한 질문에 윤태희가 잠시 말없이 재겸을 바라보았다.

“네, 안 가요.”

정주를 의식해서인지 윤태희는 아까부터 예의 바르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도서실엔 누가 있어?”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윤태희가 눈썹을 올리며 말을 흐리다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리가 없는 학교는 이제 관심 없어서.”

이 새끼가… 인상을 쓰며 뭐라 쏘아붙이려던 재겸이 곁눈질로 정주를 힐끔거렸다. 정주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서류를 펄럭거리고 있었다.

“…….”

재겸은 떨떠름한 낯으로 다시 윤태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너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요. 다 방법이 있죠.”

“뭐? 뒤에서 또 무슨 짓 했지, 너.”

“뒤에서가 아니라 앞에서 했지, 요.”

윤태희가 후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에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앞에서? 휴대폰 초심자인 재겸은 윤태희가 눈앞에서 번호를 따 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워낙 순식간이었으므로.

“앞에서 뭘 어떻게 했는데?”

재겸의 질문에 윤태희가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보여 주겠다고 대답했다. “휴대폰 줘 봐요.” 휴대폰을 건네받은 윤태희가 재겸에게 가까이 어깨를 붙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 내 번호를 눌러서. 이렇게 전화를 걸면….” 윤태희가 제 휴대폰을 꺼냈다. “이렇게 여기로 전화가 오니까….” 재겸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번호를 어떻게 갈취당했는지, 그 과정을 안 재겸의 소감은 이러했다.

“약았네.”

심드렁하게 꼬집는 말에 윤태희가 픽 웃었다.

“새삼?”

능청스레 넘기는 말에 재겸이 눈을 흘기다가, 서로 어깨가 닿아 슬쩍 몸을 물렸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