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윤태희가 서울로 떠나고 이틀이 흘렀다. 음력 19일이 되자 산 밑 이층집에 이사를 도와줄 작업자들이 방문했다. 대문과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커다란 용달 트럭 몇 대가 늘어섰다. 윤태희의 지시를 받고 온 것이었다.
이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윤태희는 집만 소개해 준 것이 아니라 이사 전반에 신경을 써 주었다. 재겸은 내심 놀랐다. 윤태희가 생각보다 아주 세심했기 때문이었다. 윤태희는 서울까지 편하게 오라며 세 식구가 탈 승용차와 운전기사까지 보냈다.
작업자들에겐 미리 주의를 준 것인지, 그들은 연예인인 정주를 보고도 아는 척은커녕 이렇다 할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 작업자들은 이삿짐을 실어 나르는 것은 물론이고, 가구 배치와 청소까지 완벽하게 끝낸 뒤 물러갔다.
이틀이나 기다려 가며 음력 19일에 맞춰 이사를 한 것도 윤태희의 제안이었다. 그 날이 손(損) 없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손 없는 날은 악귀가 돌아다니지 않아 복된 기운이 내린다는 길일(吉日)을 말했다.
기십 년 전만 해도 결혼이나 이사와 같은 한 집안의 대소사를 치를 때면 손 없는 날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 관례였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택일(擇日) 풍속이 많이 희미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 바닥에 능통한 귀재들은 아직도 길흉일을 따지고 손 없는 날을 꼭 지켰다. 당연히 윤태희도 마찬가지였다. 범인과 달리, 보고 겪는 것이 있으니 그만큼 조심하는 것이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윤태희의 손길이 닿는 것을 보고, 재겸은 기분이 묘해졌다. 이렇게까지 철두철미하게 신경을 쓰고 행동한다는 점이 새삼 놀랍기도 했다.
윤태희가 어떤 사람인지 희미하게 윤곽이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럴까.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집요함과 치밀함. 아군이 되었길 망정이지, 영영 적수로 남았다면 꽤나 성가신 상대였을 것이라고, 재겸은 생각했다. 아무튼 윤태희 덕분에 세 식구가 손을 거들어야 할 일은 없었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으면서도, 솔직히 편하긴 했다.
새로이 둥지를 튼 집은 세 식구의 조건에 딱 들어맞는 장소였다. 기사의 안내를 따라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정주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단독 주택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산 기슭과 맞닿아 있는 새집은 종로구의 어느 한적한 부촌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모든 것이 훨씬 크고 넓었다. 잔디가 깔린 앞마당과 뒤로는 잘 가꿔진 풍성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주 님! 나리! 여기요, 꽃과 나무가 가득해요!”
낯선 집에 어색해하던 것도 잠시, 메산이는 집이며 마당이며 구석구석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우아, 히야아, 하며 감탄사를 쏟아 냈다. 마당 한쪽엔 원목으로 만든 그네도 있었다. 마룻바닥은 매끈한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거실 한 면은 전면 유리창이었으며, 2층엔 큼직한 테라스까지 있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데다가, 눈에 보이는 벽돌 하나며 문고리 하나까지 전부 값비싼 자재로 이루어진 집이었다. 이사에 관한 모든 비용은 윤태희가 사비로 지출한 상태였다. 당연히, 이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제력이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하는 정주는 괜찮다며 연신 사양했지만, 윤태희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자신이 제안한 것이니 자신이 부담하는 게 맞다며 편하게 생각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주는 정말 편하게 생각했었다.
뭐, 정 그렇다면야 받은 만큼 나중에 돌려주면 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막상 집을 실물로 보고 나니 정주는 아찔함을 느꼈다. 비유하자면 이쪽에선 대충 금반지 정도를 상상했는데,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 버린 것 같은… 받은 만큼 돌려주려면 예상보다 훨씬 큰 출혈이 있으리라는 건 자명했다. 넋 놓고 집을 둘러보던 정주가 눈가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재겸아. 태희 씨 말인데, 돈이 엄청 많으신가 봐…?”
멀뚱히 서 있던 재겸이 벽을 툭툭 건드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응. 걔 부자야. 저번에 자기 연봉 2억이라고 그랬어.”
“말도 안 돼! 2억 버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집을…!”
정주가 펄쩍 뛰었다. 메산이는 정원으로 달려가 새로운 꽃과 나무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네느라 바빴다. 현실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오직 사회인 정주뿐이었다.
“왜? 2억 가지고는 이런 집 못 사냐?”
남들에 비해 경제관념이 현저히 빈약한 재겸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잘 몰랐다.
“가끔 티비 보면 국밥 팔아서 억대 부자, 이런 말 나오던데….”
재겸이 태평하게 중얼거리자, 정주가 이마를 짚었다.
“재겸아. 너 <여섯 시 내 고향> 이런 것만 보지 말고, 뉴스 좀 보자. 어? 이런 집은, 재벌들이나 정치인들이 살 법한 집이라구. 연봉 2억 받는 사람이 이런 집을 어떻게!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게다가 요즘 집값이….”
흥분한 정주는 물정에 어두운 재겸에게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연봉 2억도 고소득이긴 하지만, 그 정도 재력으로는 이런 집을 살 수 없어! 내가 알기로는 이 동네는 평당 매매가가….’ 정주는 자본주의 사회에 완벽 적응해 있었다. 물론 재겸은 눈을 반쯤 감고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무, 무슨 재테크라도 하시나?”
정주는 값비싼 호의에 부담을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재겸은 별생각이 없었다. 고맙다거나 부채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윤태희가 뭔가를 베푸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정주의 복귀를 도와주는 것도 그랬다. 언뜻 보면 남을 위해 주는 것 같아도, 실상은 윤태희 본인을 위해서 그러는 것일 터였다. 어차피 서로가 필요에 의해 서로를 이용하는 것뿐이니까.
***
이사하고 며칠이 지나서 윤태희로부터 연락이 왔다.
잠시 마당에 나갔다가 돌아온 재겸은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 두 건이 찍혀 있는 것을 보았다. 정주가 임시로 넘겨줬던 휴대폰은 어느덧 자연스럽게 재겸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번호를 저장하지 않은 탓에 발신인의 이름이 뜨진 않았지만, 재겸은 상대가 윤태희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녕~ 나 태희…」
「모해?」
「보면 전화 부탁.」
이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재겸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몇 번 이어지더니 곧바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재겸이 잠시 말없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 나리야.
“…왜.”
다정한 음성이 귓가에 흘러들었다.
-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있었어.”
- 이사는 잘 했어?
“응.”
재겸이 순순히 대꾸하자, 건너편의 목소리가 잠시 조용해졌다. 윤태희를 대할 적에 늘 싸늘하고 까칠하기만 했던 재겸은, 나자가 된다는 제안을 받아들인 그날 이후 한결 누그러진 태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물론 재겸 스스로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으나 윤태희는 미묘한 변화를 느꼈다.
짧은 침묵을 깨고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 집은 어때?
“뭐가?”
- 마음에 들어?
골똘히 눈을 굴리던 재겸이 무심히 대답했다.
“집이 너무 넓어서 물 마시러 갈 때 귀찮아.”
그에 윤태희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그거 참 큰일이겠는데.
선뜻 공감해 주는 말에 재겸이 괜시리 볼을 긁적일 때였다. 건너편에서 윤태희가 누군가에게 뭐라 말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다. 어딘지 부산한 현장감이 느껴졌다. 무언가 일을 하는 와중에 통화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 내일 입청하자.
윤태희의 목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 점심쯤에 집 앞으로 사람을 보낼게. 원래는 내가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쌓인 일이 많아서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나 대신 나례청까지 데려다줄 거야.
원래대로라면 입청 전에 한 번은 만났어야 한다. 계획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과 앞으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윤태희는 복귀 당일부터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연락을 하는 것도 간신히 짬을 내서 하는 거였다. 그렇다고 여유가 생길 때까지 미뤘다간 입청하는 시기가 많이 늦춰질 게 틀림없었다.
- 입청하면 가장 먼저 간단한 테스트… 어, 시험이 있을 거야. 그냥 통과 의례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다음엔 오리엔테이션… 어, 안내 교육. 안내 교육을 받을 거고. 너 말고도 신입들 몇 명 있을 텐데 서너 시간 정도면 끝나니까, 그냥 앉아서 가만히 듣기만 하면 돼.
윤태희는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외래어를 재겸이 알아듣기 쉽도록 우리말로 정정해 가며, 서둘러 내일 일정을 요약해 주었다.
“알았어.”
귀를 기울이던 재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 학교에 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돼.
“응.”
윤태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 아. 한 가지, 첫날이니 너무 튀지는 말고.
사회성이 다소 부족한 재겸으로선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좀 더 설명이 필요했다.
“튄다는 게 어떤 건데?”
- 싸우면 안 돼. 사람 때리지 말고.
재겸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야, 내가 무슨. 애냐?”
이게 나를 뭘로 보고. 그건 너무나도 기본적인 이야기였다. 차라리 밥 먹기 전에는 손을 씻어야 한다, 가 더 영양가 있는 조언일 거다. 내가 아무나 때리는 줄 아냐? 너나 이주열 정도는 되어야 나한테 맞는 거야, 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게다가 평범한 학교에서 동급생이랑 싸우는 일과 나례청에서 누군가와 싸우는 일, 그 경중을 분간 못 할 정도로 바보도 아니고….
- 우리 나리는 손버릇이 험해서 좀 걱정 되네.
윤태희가 평이하게 중얼거렸다.
- 만에 하나 싸움 붙을 것 같으면.
“뭐.”
- 되도록이면 선빵은 맞아 줘.
“뭐?”
- 그게 그나마 수습이 편해서.
“…….”
재겸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윤태희는 정말이지 세심하고 철두철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