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이튿날, 점심이 되자 집 앞으로 흰색 차 한 대가 도착했다.
“재겸아, 첫 출근 파이팅!”
“나리, 조심히 다녀오세요.”
재겸은 정주와 메산이의 열렬한 참견을 받으며 컨버스의 신발 끈을 묶었다. 윤태희의 연락을 받고 입청 소식을 알렸더니 정주와 메산이는 어제부터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작 재겸은 무덤덤한데 둘은 아주 요란법석이었다.
“갔다 올게.”
재겸은 어깨를 가로지르는 작은 크로스 백을 메고 현관문을 나섰다. 아직은 낯설기만 한 커다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흰색 차의 운전석에서 누군가 내렸다.
회색 정장을 입은 젊은 여성이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재겸 씨?”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재겸에게 다가왔다.
“아. 예에. 안녕하세요….”
재겸이 슬쩍 묵례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나례청 축역부 제1팀, 주임 나자 강이빈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윤 수석님이 부탁하셔서 제가 대신 픽업하러 왔어요.”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강이빈은 쾌활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며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재겸이 쭈뼛거리며 악수에 응하니, 강이빈이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크게 흔들어 보였다. 재겸이 당황하여 눈을 댕그랗게 뜨자 강이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 놀랐어요? 귀여워.”
재겸이 시선을 피하며 손을 슬쩍 뺐다.
“옷도 그렇고 병아리 같애.”
재겸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심지어 정주는 재겸이 입고 나갈 옷까지 일일이 골라줬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정주의 코디는 꽤나 디테일했다. 노란색 무지 맨투맨. 헐렁하게 찢어진 연청바지. 심지어 양말까지 골라 주었다. 재겸이 아무거나 신으면 안 되냐고 툴툴거리자 정주는 패션에서 제일 중요한 건 양말이라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재겸은 정주의 요구대로 바짓단을 롤 업하고 버섯 캐릭터가 그려진 흰 양말을 올려 신었다. 아무렇게나 자른 앞머리는 삐뚤빼뚤한 데다 옷까지 이렇게 입혀 놓으니, 재겸은 한결 앳되고 멀뚱해 보였다.
“자자, 일단 타실까요?”
강이빈이 허물없이 재겸의 팔을 잡아끌었다. 재겸은 강이빈의 손에 이끌려 얼떨떨한 얼굴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강이빈이 운전석에 앉자마자 곧바로 차를 몰았다.
“…….”
재겸은 살짝 넋이 나간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재겸은 은근히 낯을 가리는 편이었다. 이렇게 생판 모르는 사람과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으니 더 그랬다.
게다가 상대는 여자였다. 재겸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자와 가깝게 지낸 경험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재겸은 여자를 상대하는 것을 유독 어려워했다. 어쩐지 저절로 기가 팍 눌려서, 툭하면 지금처럼 얼이 빠지곤 했다. 강이빈은 액셀을 팍팍 밟아 가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넓은 도로에 진입하자 강이빈이 입을 열었다.
“윤 수석님한테 얘기 들었어요. 멋지고 똘똘한 친구라고. 후임 찾는다고 한 달이나 넘게 두문불출하시더니, 귀엽고 잘생긴 후임을 찾아내셨구나.”
석고상처럼 굳어서 정면만 바라보고 있던 재겸이 강이빈에게 슬쩍 시선을 던졌다. 멋지고 똘똘한 친구? 남의 입을 통해서 윤태희의 말을 전해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귀엽고 잘생겼다는 칭찬도 영 쑥스러웠다. 결국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재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겸씨. 나 말 편하게 해도 돼요?”
“아. 그… 네.”
강이빈은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말과 함께 자신을 ‘강 주임’이라고 부르면 된다고 하고는 “누나도 괜찮아.”라고 농담조로 덧붙였다. “사실 우리 남동생도 너랑 또래거든.” 그래서인지 강이빈은 재겸을 보자마자 한눈에 정이 갔다. 굳어 있는 재겸에게 말을 붙여 가며 친근하게 분위기를 풀어 주었다. 비록 운전은 거칠지언정 쾌활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핸들을 쥐고 있던 강이빈이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완전 계 탔네!”
“뭐가요?”
강이빈이 어깨를 으쓱이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왜긴, 처음부터 윤 수석님이랑 같이 일하니까. 윤 수석님은 본청 안에서도 거의 스타거든. 누나도 윤 수석님 때문에 제1팀으로 온 거야.”
강이빈은 원래 암행부 소속이었다. 부서를 옮기고 제1팀에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축역부는 다른 부서들에 비해 문턱이 월등히 높아서 티오 자체가 잘 나지 않았거니와, 윤 수석이 있는 축역부 제1팀이 가지는 명성은 어마어마하여 경쟁이 아주 치열했기 때문이다.
“윤… 수석, 님이… 그렇게 대단해요?”
가만히 이야기를 주워듣던 재겸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윤 수석이라고 부르려니 왠지 낯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 재겸은 어색하게 질문을 마쳤다. 강이빈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러엄! 윤 수석님, 언제부터 수석이었는지 알아?”
강이빈이 뿌듯한 얼굴로 물었다. 능력 있는 상관을 뒀다는 사실이 못내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재겸은 나례청의 직급 체계를 잘 알지 못했다. 윤태희의 위치가 상당히 높다는 정도만 대충 알고 있을 뿐이었다.
“아뇨, 모. 모르는데요….”
“19살 때야. 19살.”
강이빈은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해 놓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감탄하는 기색이었다. 재겸은 다른 의미에서 놀랐다. 19살이라고? 그렇다면 그보다 어린 나이에 나자가 되었다는 건가. 윤태희의 나이는 현재 20대 중반이므로, 나례청에 몸을 담았던 세월이 거의 십 년 가까이 된다는 얘기다.
“그거 어려운 거예요?”
순진한 질문에 강이빈이 “당연하지!” 하며 큰 소리를 냈다.
“누나가 윤 수석님하고 동갑인데, 난 이제 주임이거든. 에휴. 난 19살 때 수능 공부하고 있었는데. 윤 수석님은 그때 최연소로 수석 달았다니까. 윤 수석님이 처음 입청했을 때 본청이 난리가 났대. 괴물이 왔다고.”
많은 나자들에게 있어 윤 수석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같은 팀원인 강이빈도 마찬가지였다. 윤 수석은 멀리,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제1팀이 되기 전까지는 맨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 이만하면 말을 다 한 셈이었다. 제1팀을 뚫기까지 힘든 과정을 거친 만큼, 강이빈은 윤 수석이 직접 후임으로 낙점한 재겸이 부러우면서도 신기하기만 했다.
“대단하신 분이야. 정말로.”
그렇게 강하다고? 재겸에겐 영 미심쩍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재겸은 저에게 쥐어 터지던 윤 수석의 모습밖엔 몰랐기 때문이다….
“재겸이!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윤 수석님과 함께 일하는 건 행운이라는 걸. 윤 수석님, 정말 좋은 분이거든.”
아까부터 윤 수석에 대한 칭찬이 이어지고 있었다.
평판이 좋네….
재겸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차창을 내다보았다. 아무렴 사람을 구워삶는 데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다. 다들 속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치 내가 속았던 것처럼….
듣다보니 어쩐지 속이 뒤틀려서, 재겸이 불퉁한 낯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때였다.
“작년에 누나네 엄마가 많이 편찮으셨거든?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었어. 아, 누나가 집안 가장이거든. 음, 아무튼? 아무리 돈을 구하려고 해 봐도 방법이 없어서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는데….”
강이빈이 밝게 웃으며 핸들을 탁탁 두드렸다.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었지. 근데 어떻게 아셨는지, 윤 수석님이 병원비를 전부 내 주신 거야. 그때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어.”
창밖을 내다보던 재겸이 멈칫하며 강이빈을 바라보았다.
“간병인도 붙여 주시고 한 달 휴가도 주신 거 있지? 본인 휴가까지 빼서. 내가 당장 갚을 돈은 없어도, 시간만 주시면 전부 갚겠다고 했더니 이건 팀원한테 해 주는 복지니까 그러지 말라는 거야. 나한테 돈 받으면 앞으로 다른 팀원들한테도 돈 받아야 되니까 안 된다고….”
말을 잇던 강이빈이 갑자기 인상을 팍 썼다.
“이런 게 말이 되냐구! 아씨,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눈물 날 것 같애.”
강이빈이 눈가 근처로 손을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재겸은 살짝 당황했다. 설마 우는 건가 싶었는데, 다행히 강이빈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다시 핸들을 고쳐 잡았다.
“아, 미안해. 누나가 원래 말이 졸라리 많아요.”
졸라리…? 재겸이 볼을 긁적거렸다. 말이 많은 건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강이빈이 해 준 이야기는 의외였다. 강이빈이 말하는 윤태희는 자신이 아는 윤태희가 아닌 것 같았다. 타인의 불행에 발 벗고 나서는 윤태희…. 재겸이 알고 있는 윤태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튼, 누나는 윤 수석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고. 윤 수석님이 데려온 후임이라면 누구든지 환영이야.”
윤 수석을 향한 제1팀의 신뢰는 단단했다. 그저 말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느껴질 정도라서 재겸은 기분이 묘했다. 윤태희가 베푸는 호의와 친절은 모두 불순할 뿐이고, 비뚤어지고 어두운 속내를 웃음 속에 교묘히 감추고 있다. 이것이 재겸이 알고 있는 윤태희의 본연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재겸이 슬쩍 입을 열었다.
“다들 윤 수석, 님을 좋아하나요?”
뜸을 들이던 강이빈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응. 좋아하지.”
윤태희는 나자를 싫어하며 나례청에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강이빈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윤태희가 나례청을 부수기 위해 후임을 데려왔다는 사실을. 왜인지 재겸은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팀원들에게 친절할 수 있으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는지….
재겸은 처음으로 윤태희에 대한 희미한 궁금증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다들 윤태희의 본모습을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모습이 있는 건 아닐까… 이제껏 선명하기만 하던 형체가 갑자기 뿌연 안개에 휩싸이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안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
강이빈이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재겸이 눈동자을 굴려 강이빈을 바라보았다. ‘나한텐 많어요.’라고 말했다간 차에서 내리라고 할 것 같았다….
“꼭 좋아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깽판을 놓는 대신 재겸이 심각하게 물었다. 그에 강이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별 의도 없이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긴. 남자의 매력이 뭔지, 재겸이는 아직 뭘 모를 나이지.”
강이빈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재겸의 팔을 쿡 찌르는가 싶더니 “어어, 시발. 빨간불. 빨간불.” 하며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재겸의 상체가 앞으로 픽 고꾸라졌다. 아까 전만 해도 수줍어하더니 호탕하기 그지없었다.
“자, 재겸이. 누나가 설명해 준다. 잘 들어. 우리 팀 신입으로 들어올 사람이니까 특별히 알려 준다. 일단 남자는 잘생기고 키가 커야 돼. 슈트도 잘 어울리면 더 좋고. 그리고 다정하고, 친절하고, 돈도 많아야 돼. 알겠어?”
윤 수석님처럼 말이야. 강이빈이 진지하게 강의를 이어 나갔다.
“자라날 새싹은 새겨듣고 본받도록 하렴.”
아. 왜 이렇게 지치지… 재겸이 힘없이 자세를 바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