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은 재겸처럼 시험을 치르러 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왜냐하면 로비에서 봤던 나자들과는 달리, 모두 재겸처럼 편한 사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호는 1번부터 70번대까지 있었다. 재겸이 제일 끝 번호인 것으로 봐서는 선착순으로 번호표를 나눠준 듯했다.
제3회의실은 칠십여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대학 강의실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프로젝터 스크린이 있을 법한 회의실 전면에는 커다란 암막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분위기는 조용하고 무거웠다.
미리 자리에 앉아 있던 응시생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는데, 저마다 가슴팍에 번호표를 매달고 있었다. 문 앞에 어색하게 서 있던 재겸은 응시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나자가 알려 준 위치에 가서 앉았다. 길게 이어진 테이블에는 마실 것이 담긴 종이컵이 자리마다 하나씩 놓여 있었다.
제일 끝줄에 앉아 있으니, 수십 명의 뒤통수가 빼곡이 보였다. 재겸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앉아있다가 어느 순간 손에 번호표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지? 재겸은 골똘한 표정으로 뒤에 핀이 매달린 번호표를 만지작거렸다. 핀을 꾹 누르니 바늘처럼 뾰족한 침이 튀어나왔다. 맨투맨을 잡아당기며 번호표를 꽂기 위해 노력 중일 때였다.
“도와줄까요?”
옆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손을 뻗어왔다. 재겸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샛노랗게 머리를 탈색하고 귀에 주렁주렁 피어싱을 매단 남자는 재겸과 비슷한 또래처럼 보였다. 재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탈색남은 야무진 손길로 번호표를 달아 주었다. 재겸이 멀뚱히 가슴팍을 내려다볼 때였다.
“저는 76번. 그쪽은 77번. 성격이 좀 칠칠치 못하신가 봐요?”
탈색남은 자신의 번호표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
재겸이 험악한 얼굴로 탈색남을 노려보았다. 탈색남이 멋쩍은 낯으로 귓바퀴를 매만졌다. 정, 정색 오지네… 탈색남이 화제를 바꿔 물었다.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요?”
재겸이 앞을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아뇨.”
무심한 대꾸에 탈색남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갑자기 킥킥 웃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말한 것이었으나 탈색남은 재겸이 농담으로 받아친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재겸이 슬쩍 인상을 쓸 때였다.
회의실 앞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걸어들어왔다.
조용하던 응시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반듯하게 슈트를 차려 입은 나자는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게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삭, 삭, 슬리퍼를 질질 끌어 가며 회의실 앞에 선 나자가 허리에 양손을 짚었다.
“안녀엉, 애기들아.”
눈앞의 나자는 30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응시생 가운데 그보다 연배가 높은 사람도 여럿 있었는데도 거침없는 반말에, 모두를 싸잡아서 ‘애기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기분이 나쁠 법한 태도였으나, 회의실에 앉은 그 누구도 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단계 시험 감독관, 암행부 심기정이다.”
심기정은 허스키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머리는 거의 반삭 수준으로 짧았고, 입술에 어두운 보라색 립스틱을 발라서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난해한 카리스마가 흘러넘치는 모습에 모든 응시생들이 일순 압도되었다.
“이제 시험 시작할 건데, 먼저 주의사항부터 말해 줄게. 애기들. 딴짓하다가 못 듣고 나중에 질문하면 호온나.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제일 싫어해.”
심기정이 짧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우선, 1차는 블라인드 테스트가 원칙이다. 이름 대신에 번호로 호명하니까 자기 번호 똑바로 봐 둬라. 그리고 여기엔 2년 구른 초라니도 있고 추천 입청자도 있을 텐데, 특히 추천 입청자들. ‘나 누구 빽이야.’ 입 털지 말아라. 인적 사항 까발리면 바로 탈락이야. 시험 형평성에 어긋나니까.”
박력 넘치는 경고에 응시생들이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윤태희를 빽으로 둔 재겸은 무념무상이었다. 시선을 내려 번호표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칠칠찮은 칠칠이. 외워야지.
“테스트는 총 3단계로 이루어진다. 1단계는 눈이 제대로 트였는지, 2단계는 귀감이 확실히 열렸는지, 3단계는 귀기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는지를 본다. 각 단계마다 기준 미달인 애기들은 저쪽, 뒷문 보이지? 저거 열고 나가서 그대로 집에 가면 된다. 여기까지. 그밖에 질문 있는 애기 있니?”
“…….”
“…….”
“…….”
애기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눈치만 봤다.
“없니? 그럼, 애기들아. 앞에 종이컵 하나씩 있지? 원샷해.”
눈치를 살피던 응시생들이 하나둘씩 쭈뼛거리며 컵을 들어 올렸다. 이게 뭐지… 잠시 컵을 들여다보던 재겸은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망설임 없이 초록색 액체를 들이켰다. 풀 냄새가 나면서 씁쓸한 맛이 났다. 힐끔 옆을 보니 탈색남은 코를 틀어쥐고 쩔쩔매는 중이었다. 힘들게 음료를 마시는 것을 보니 음료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두려운 모양이다.
“다 마셨니? 그럼 1단계 시작한다.”
고개를 쭉 빼고 컵이 비었는지 훑어보던 심기정이 그대로 뒤를 돌았다. 심기정은 회의실 앞, 전면에 매달려 있던 커다란 암막 천을 단숨에 벗겨 냈다. 천을 거둬 내자 새하얀 스크린이 훤히 드러났다. 새것처럼 백지상태 그대로였다.
“거기, 너. 13번 애기. 여기에 뭐가 보여?”
심기정이 앞쪽에 앉아 있던 응시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요? 아…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저 뒤에 56번 애기, 넌 뭐가 보이니?”
“저, 저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심기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좋아, 그럼 첫째 줄. 1번 애기부터 10번 애기까지 나와.”
심기정의 명령에 따라 응시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번호 순서에 맞춰 일렬종대로 늘어서자 심기정이 “더 가까이.” 하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응시생들이 눈치를 보며 스크린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바닥에 마스킹 테이프 붙여 놓은 거 있지? 그거 밟고 서.”
심기정의 말대로, 바닥에는 마치 금을 그어 놓은 것처럼 마스킹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응시생들이 열을 맞춰 마스킹 테이프를 밟는 순간이었다. 그중 몇 명이 탄성을 흘렸다. 테이프를 밟고 서자마자 하얗기만 하던 스크린에 거짓말처럼 선명한 화질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어때, 이제 보이지?”
심기정이 테이블 한쪽에 털썩 올라앉았다.
“차례대로 꽃이 몇 송이 보이는지 말해 봐. 이게 1단계다. 눈이 트인 정도에 따라서 누군 꽃이 적게 보일 수도, 누군 많게 보일 수도 있어.”
뒤쪽에 앉아 있던 응시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들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마스킹 테이프를 밟고 선 10명의 눈에만 스크린 속 사진이 보였다. 사진 안에는 푸르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뻥 치면 호온나. 보이는 대로만 말하는 거야.”
심기정이 보라색 입술을 달싹이며 턱짓을 했다.
“자, 그럼 1번 애기부터. 몇 송이?”
“여섯 송이가 보입니다.”
1번 응시생이 차렷 자세로 말했다. 심기정이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1번 응시생의 가슴팍에 매달려 있던 번호표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1번 응시생이 숨을 들이키며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번호표를 쳐다보았다.
“좋아, 다음. 2번 애기는?”
“한, 한 송이요….”
2번 응시생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에도 심기정은 똑같이 손을 놀렸다. 2번 응시생의 번호표는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심기정은 순서대로 답변을 받아 냈다. 최소 한 송이에서 최대 여덟 송이까지 다양한 숫자가 나왔다. 바뀐 번호표의 색깔은 빨간색과 파란색, 두 종류였다.
순식간에 첫 번째 줄의 차례가 끝났다. 심기정은 두 번째 줄을 호명했다. 뒤에 앉은 재겸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아무리 눈에 힘을 줘 봐도 스크린은 새하얗기만 했다.
저 앞에 서야만 뭔가 보이는 모양인데….
그때, 옆에 앉아있던 탈색남이 소곤소곤 말을 걸어 왔다.
“색깔로 분류를 하는 걸 보면, 의미가 있는 것 같지?”
탈색남은 어느새 메모지를 꺼내서 기록을 하고 있었다. 응시생이 몇 송이라고 대답을 했고, 그에 무슨 색을 받았는지 일일이 체크를 하고 있었다.
“가만 보니까 네 송이를 기준으로 색깔이 나뉘는 것 같아. 네 송이 이하는 전부 빨간색을 받았고, 네 송이가 넘어가면 전부 파란색을 받았어.”
탈색남이 진지한 얼굴로 메모지에 정리한 내용을 가리켰다. 생긴 거랑 다르게 의외로 꼼꼼하네…. 메모지와 탈색남을 번갈아 바라보던 재겸이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럼 빨간색이 탈락이야?”
탈색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않을까? 빨간색은 불길한 색이니까.”
“빨간색이 왜 불길해? 딸기도 빨간색인데.”
“…….”
그럼 딸기도 불길하겠네. 재겸이 진지하게 의문을 표하자, 탈색남이 말없이 눈을 끔뻑거렸다. 아니. 갑자기 딸기가 여기서 왜 나와? 잠시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던 탈색남이 “근데 말야.” 하며 재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너 왜 나한테 말 놔?”
“네가 먼저 말 놨잖아.”
탈색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야 한눈에 봐도 네가 나보다 어려 보이니까…. 재겸은 탈색남에게 가차 없이 굴었다. 강이빈처럼 같은 팀이 될 것도 아니거니와, 같은 성별이므로 어려울 이유도 없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나례청에 들어온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계속 상기해야 한다. 딱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재겸은 이곳에서 연을 맺을 생각이 없었다.
“너 고등학생 아니야?”
재겸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며칠 전엔 고등학생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고 사실대로 말했다간 귀찮은 질문이 따라붙을 게 뻔했다. 재겸의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탈색남이 말을 덧붙였다.
“나는 대학 다니는데.”
“그래? 열심히 다녀.”
재겸의 무성의한 응원에 탈색남이 벙 찐 얼굴을 했다. 뭐 이런 녀석이… ‘나이 어린 귀재는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는 꼰대들이나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이제야 이해가 가려고 했다. 나도 10대 때 저랬었나?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으래, 뭐. 한두 살 차이야 친구지….”
탈색남은 편견 없이 재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은 같이 시험에 통과하면 동기가 될 사이였으니, 서로 좋게좋게 지내는 편이 나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탈색남은 마음가짐을 너그러이 가진 뒤, 다시 메모장을 끄적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