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80)화 (80/348)

#80

“너 방금 뭐라 그랬니?”

“뭐. 뭐가. 요….”

심기정이 슬리퍼를 찍찍 끌며 다가왔다.

“방금 뭐라 그랬냐고. 다시 말해 봐.”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재겸이 불퉁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며 대꾸했다.

“아아니. 그거 말고, 마지막에.”

“내 꽃은 사슴이 뜯어 먹었다.”

심기정이 낯을 굳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 회의실 안에 이상한 긴장감이 흘렀다. 둘 사이에 낀 탈색남이 가만히 눈치를 살필 때였다. 심기정이 갑자기 재겸의 팔을 확 잡아 이끌었다. 재겸이 휘청거리며 끌려갔다.

“뭐가 보이니.”

재겸은 다시 마스킹 테이프를 밟고 서 있었다. “말해 봐.” 심기정이 보라색 입술을 달싹였다. 모두가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멀뚱하게 서 있던 재겸이 심기정을 한 번, 스크린을 한 번, 번갈아 응시했다.

“꽃 없다고요.”

뾰로통한 대꾸에 심기정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꽃 말고. 보이는 걸 전부 말해 봐.”

재겸이 힐끔,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사슴이 보여요.”

심기정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재겸의 대답에 회의실 안이 눈에 띄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응시생들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래요, 사슴이 보인다는데요, 난 못 봤는데, 저도 못 봤어요, 꽃밖에 없었는데, 관심 끌려고 저러는 거 아닌가요….

“시끄러워. 애기들, 입 다물어라.”

심기정이 응시생들을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를 했다. 수군대던 응시생들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심기정이 다시 재겸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떤 사슴? 더 자세히 설명해 봐.”

“몸통에 하얀 점이 있어요. 한 마리는 암컷이고, 한 마리는 뿔이 달린 걸 보니 수컷이네. 요. 암컷은 앉아 있는데 수컷은 서 있어요.”

“…….”

“…….”

“…….”

회의실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왜… 왜 그러는데요?”

재겸이 미심쩍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슴은 다 보이는 거 아니었어…?

“왜 말하지 않았니? 사슴이 보인다고.”

재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꽃이 몇 송이 있느냐고 물었잖아요.”

마침내 심기정의 보라색 입술이 씩, 휘어졌다. “하!” 심기정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탈색남은 이게 당최 무슨 일인가, 하는 눈으로 상황 파악에 힘을 쓰고 있었다.

그때, 심기정이 대뜸 손뼉을 마주쳐 짝 소리를 냈다.

“어어…?”

순식간이었다. 응시생들의 번호표에 변화가 일어났다. 꽃이 적게 보인다고 하여 빨간색을 받은 번호표는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꽃이 많이 보인다고 답하여 파란색을 받은 번호표는 전부 다른 색으로 뒤바뀌었다.

“파란색 받은 애기들은, 눈 더 뜨이면 와.”

아까 전에 실격당한 38번 응시생과 똑같이 새까만 검은색이었다.

“…….”

“…….”

“…….”

검은색 번호표를 내려다보는 응시생들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심기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뒷문이 활짝 열렸다. 복도에 서 있던 피곤한 나자가 한 발자국 들어섰다.

“수고하셨습니다.”

나자는 하품을 쩍쩍하며 인사말을 건네더니, 빨리 나오라는 듯이 휙휙 손짓을 해 보였다.

“저, 그. 그럼, 빨간색이 합격인가요?”

예상을 뒤엎는 결과에 탈색남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지. 파란색은 1단계 탈락이야.”

합격이라고?! 재겸이 눈을 휘둥그레 뜰 때였다.

“빨간색 받은 애기들은 2단계로 넘어간다. 꽃이 적게 보이면 적게 보일수록 눈이 좋은 거야.”

심기정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스크린에 떠오른 이미지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한 송이를 발견한 탈색남도 선방을 한 셈이다. 탈색남의 얼굴이 달처럼 환해졌다.

“우와! 칠칠아! 대박!”

탈색남이 뛸 듯이 기뻐하며 하이 파이브를 신청했다. 그러나 재겸은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탈색남의 하이 파이브는 싹둑 무시를 당했다. 크흠… 그에 탈색남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며 박수를 쳐 댔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탈락일 리가 없지….

재겸은 번호표를 만지작거렸다. 뭐야, 괜히 열 냈네. 당연히 통과하겠거니 콧방귀를 끼며 마음 놓고 있었다가, 그다음엔 설마설마 탈락인 줄 알았다가, 그렇게 돌고 돌아서 통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일까?

재겸은 묘하게 기뻤다. 과연, 윤태희가 통과 의례라고 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 말을 믿었으면 됐는데, 괜히 빨간색이 뭐니 파란색이 뭐니 하는 말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때, 파란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한 번호표를 매달고 있던 응시생이 다급하게 말했다. 당연히 합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정반대로 결과가 나와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파란색이 합격이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눈이 뜨인 만큼 보이는 게 다르다고 했잖아요. 그럼 당연히 많이 보여야 좋은 거 아닌가요?”

응시생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항의를 했다.

“나는 많이 보여야 좋은 거라고 말한 적 없는데?”

“네? 하, 하지만! 그럼 왜 파란색을 주신 거예요? 파란색은 긍정적인 색이고, 빨간색은 불길한 의미가 담긴 색이잖아요. 왜 사람을 착각하게….”

응시생의 말을 끊고, 심기정이 눈을 느리게 떴다.

“애기야, 그건 사람마다 다른 거지.”

심기정이 자신의 까까머리를 슥슥 매만지며 덧붙였다.

“빨간색이 왜 불길해? 나한테 빨간색은 정열의 색인데? 게다가 이 바닥은 얼마든지 상식이 뒤틀리는 곳이야. 애기는 선입견부터 깨는 게 좋겠다.”

심기정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옆에 서 있던 재겸이 고개를 돌려 탈색남을 바라보았다. “들었냐? 딸기는 불길하지 않아.” 그에 탈색남이 황당하다는 눈빛을 했다. 아니, 그러니까 아까부터 딸기가 대체 왜 나오는 건데….

“그나저나, 77번 애기야. 잠깐 나 좀 봐.”

탈락자들이 회의실을 털레털레 빠져나가는 사이, 심기정은 슬리퍼를 끌며 재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재겸은 아직도 마스킹 테이프를 밟고 서 있었다. 심기정은 팔짱을 끼고 재겸을 빤히 쳐다보았다.

“애기는 이름이 뭐니? 추천 입청자, 맞지?”

대꾸를 하려던 재겸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인적 사항을 밝히지 말라고 분명히 주의를 줘 놓곤, 심기정은 마치 시험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신상을 물어 왔다. 뭐야…. 이거 설마 대답하면 탈락시키는 거 아냐? 엉뚱한 의구심이 번뜩 솟아오른 재겸이 말없이 눈을 치켜떴다. 재겸의 경계를 알아차린 심기정이 혀를 차며 웃음을 흘렸다.

“꽃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니 제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심기정은 재밌다는 눈으로 재겸을 바라보았다. 삐뚤빼뚤한 앞머리에 노란색 맨투맨을 입은 소년은 까칠하면서도 평범해 보였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는 애기는 백 명 중 한두 명 꼴로 있어. 꽃이 하나도 안 보인다는 건 완벽한 눈을 가졌다는 건데, 이 정도면 타고난 거지.”

담백한 칭찬에 재겸이 볼을 긁적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근데 설마 사슴까지 봤을 줄은, 나 깜짝 놀랐어.”

심기정이 까슬까슬한 머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사슴을 보는 애기는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야. 난 시험 감독관 한 지 올해로 3년째인데 사슴을 봤다는 건 77번 애기가 처음이니까. 수십 년 동안 사슴을 봤다는 사람은 나례청 통틀어 한 스무 명 정도 되려나….”

회의실 안에 있던 1단계 통과자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목이 집중되었다. 감탄하는 시선, 신기해하는 시선, 부러워하는 시선, 다양한 시선들이 재겸에게로 따갑게 박혀 들고 있었다.

“저. 저기. 말씀 중에 실례지만….”

그때, 탈색남이 눈치를 보며 손을 들었다.

“사슴이 보인다는 게 어떤 의미죠?”

심기정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향했다.

“저 사진은 특별한 사진이야. 사진 속의 사슴은 평범한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영물이었는데, 저 장소를 좋아했지. 사슴은 오래전에 죽었어. 실제 사진에는 사슴이 찍혀 있지 않아. 77번 애기는 사슴의 잔상을 본 거야.”

심기정의 눈에는 사슴의 희미한 그림자만 보였다. 사슴 두 마리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사슴의 무늬나 자세, 상세한 형태는 보이지 않았다. 이마저도 시험을 치르는 응시생의 입장이었을 때는 보이지 않았고, 꽃 한 송이만 보였다. 하지만 77번은 정확하고 구체적인 묘사를 했다.

“잔상을 볼 정도가 되려면 눈이 완벽히 트여 있어야 해. 그리고 귀신을 듣고 보는 것만이 아니라 아예 만질 수도 있어야 하고. 이건 귀감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얘기야. 가지고 있는 귀기의 그릇이 커야 하고.”

이어지는 설명에 탈색남이 얼떨떨한 낯으로 재겸을 바라보았다. 딸기 얘기나 하던 칠칠이가 갑자기 대단해 보였다. 재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애먼 번호표만 만지작거릴 따름이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흠….

“아마 77번 애기처럼 어린 나이에 선명하게 사슴을 본 사람은, 십 년 전 이후로 처음일 거다. 음, 축역부에 윤태희 수석님이라고 계시는데.”

보라색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 석 자에, 재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윤태희도 나랑 같은 걸 봤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감회가 묘하다. 재겸이 홀린 듯이 스크린을 다시 바라볼 때였다. 심기정이 미소를 지으며 재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중에 만나게 되면, 애기야. 너도 사슴 봤다고 말해 봐. 아마 반가워하실 거야. 얼굴 보기 힘든 분이라 만나기 어렵겠지만? 혹시 기회가 되면은.”

말을 마친 심기정은 검지를 들더니 재겸의 가슴팍에 매달린 빨간 번호표를 톡, 건드렸다. 그러자 번호표의 색깔이 변했다. 탈색남을 비롯한 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바뀐 색깔은 눈부신 황금색이었다.

“이게 뭐. 뭐예요.”

재겸이 멈칫하며 번호표를 내려다볼 때였다.

“설명했듯이 사슴의 잔상을 봤다는 건 귀감도 열려 있고, 귀기의 그릇도 훌륭하다는 거야. 물론 귀기를 다루는 게 미숙하다고 해도, 그건 훈련하면 될 일이고, 애기가 떨어지면 본청도 손해거든. 그래서 사슴을 본 사람은 그대로 1차 시험에서 합격시켜.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골드 패스라고 해. 나도 써먹는 날이 오네.”

골드 패스? 심기정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재겸이 탈색남에게 시선을 던졌다. 탈색남은 영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77번 애기는 2단계, 3단계 면제야.”

때이른 합격자의 출현에 회의실이 발칵 뒤집어졌다.

“1등으로 수습 나자가 된 걸 축하해.”

통과 의례. 실로 윤태희의 말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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