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2단계에서는 제구부 나자가 감독관으로 참여했다.
시험 내용은 안이 보이지 않는 항아리에 손을 넣고 잡히는 공을 꺼내는 것이었다. 1단계에선 눈이 얼마나 트였는지를 보았다면, 2단계에선 시각 외에도 다른 감각들, 즉 귀감(鬼感)이 얼마나 열려 있는지를 보았다.
귀감이 열린 정도에 따라 감각을 느끼는 범위가 달라진다. 청각, 후각, 촉각 순서대로 확장이 되었다. 이를테면 귀신을 마주할 적에 목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귀감을 예리하게 벼리면 누군가의 귀기를 느끼거나 기척을 알아차리는 것도 가능했다.
항아리 속에 담긴 공은 제구부에서 제작한 물건으로, 총 세 가지의 재질로 나뉘었다. 고무와 나무, 그리고 쇠였다. 귀감이 흐린 사람의 손에는 고무 공이 만져지고, 적당히 열린 사람에겐 나무 공이, 제대로 열린 사람에겐 쇠공이 만져졌다. 2단계에선 고무 공을 꺼낸 귀재들이 탈락을 했다.
3단계에서는 부적부 나자가 감독관으로 참여했다.
3단계는 귀기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험이었다. 그 확인 방법은 개인별로 주어진 석판에 글씨를 쓰는 것이었다. 네모난 석판에는 경전의 구절들이 한문으로 음각되어 있는데, 먹붓을 가지고 움푹 파인 글자 모양 그대로 따라 써야 했다.
시험의 관건은 먹붓에 있었다. 이 붓은 반드시 귀기를 실어야만 먹이 묻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귀기를 전혀 쓰지 않은 상태에서 붓을 써 봤자 투명한 물 자국만 날 뿐이다. 반대로 귀기가 넘쳐나면 먹물이 줄줄 흘렀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귀기를 싣는 것이 중요했다. 석판에 새겨진 정자 그대로 채워 쓰기 위해선 먹물의 양을 조절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귀기를 익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했다. 3단계 탈락자들은 먹이 흐리거나, 번지거나 하여 알아보기 힘든 글씨를 쓴 이들이었다.
2단계, 3단계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황금색 번호표를 받은 재겸은 피곤한 나자의 안내에 따라 제1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시험이 전부 끝나면 이곳에서 오리엔테이션이 있을 예정이었다.
재겸은 회의실에 덩그러니 앉아 시험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회의실 안은 재겸이 앉은 앞쪽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나머지 시험을 면제받은 것은 좋았으나, 할 일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아주 지루했다.
재겸은 가슴에 메고 있던 크로스백의 지퍼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윤태희 생각이 났다. 강이빈의 말에 의하면 윤태희는 현재 외근 중이라고 했다. 게다가 아주 바쁘다고. 늦은 밤쯤에야 본청에 돌아올 것이며, 오늘은 얼굴 보기가 힘들 거라고 했다.
흠… 지퍼를 여닫는 재겸의 손길이 느려졌다.
잠시 눈을 굴리던 재겸이 크로스백 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쩌면 윤태희에게서 연락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를테면 나례청에 잘 도착했냐라든가, 시험은 끝났냐라든가.
그러나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전화나 문자가 온 흔적은 없었다.
“…….”
재겸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윤태희와 동료가 되었으니 이쪽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려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사실 좀 심심해서 뭐라도 할 일을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재겸은 메시지 함으로 들어갔다. 윤태희가 보냈던 메시지를 괜히 한 번 쭉 읽어 보았다.
이내 재겸은 서툰 손길로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용건은 시험에 합격한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재겸은 집중을 기울이며 글자를 차근차근 조합해 나갔다. ‘시험 합격했다.’라고 보낼 생각이었다. 사투 끝에 싷험, 까지 완성되었을 때였다. 재겸의 손이 멈칫했다.
불현듯 심기정의 목소리가 귓가에 둥실거렸던 탓이다.
‘축역부에 윤태희 수석님이라고 계시는데.’
‘애기야. 너도 사슴 봤다고 말해 봐.’
그러고 보니 윤태희도 사슴을 봤다고 했었지….
심기정은 재겸의 재능을 칭찬하며 사슴을 본 사람은 나례청 통틀어 스무 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제 그 안에 저도 포함되는 것이다. 사슴을 봤다고 말할까? 재겸은 잠시 고민한 끝에, 싷험에 멈춰 있던 글자를 원래의 목표대로 이어 나가기로 했다. 사슴을 봤다고 말하려니 왠지 살짝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담백하게 용건을 전달하는 게 중요했다.
「싷험합껵햇ㅅ다」
꼼꼼히 작성한 메시지를 전송했다.
재겸은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올려 두고, 입술을 질겅거리며 답장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띠링! 소리와 함께 액정이 환해졌다. 바빠서 연락할 시간도 없는 건가 싶었더니 생각보다 답장이 빨랐다.
재겸이 잽싸게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역시… ㅎㅎ」
재겸의 눈꼬리가 샐쭉 올라갔다.
“…….”
달랑 이게 끝이라고? 이제 보니 바빠서 연락이 없었던 게 아니라, 구태여 따로 연락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이쪽 상황에 태평했던 모양이다. 윤태희는 재겸의 합격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쉬운 난이도이긴 했지만 그래도 1단계에서 절반이 넘게 탈락했다. 일흔 명이 넘는 사람 중에 2단계, 3단계도 면제를 받은 건 저 혼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내가 시험에 붙어 줬는데! 그것도 아주 뛰어난 성적으로.
어쩐지, 재겸은 윤태희의 반응이 못마땅했다. 윤태희가 ‘역시’라는 두 글자로 가볍게 넘겨 버리자 왠지 모르게 빈정이 상했다. 쉽게 합격한 건 맞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소소한 굴곡이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겸은 액정을 노려보다가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사슴도봣ㅅ다」
띠링! 곧바로 말풍선 하나가 새롭게 떠올랐다.
「섹시한데?」
가만히 내용을 들여다보던 재겸이 눈썹 한쪽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섹시…?”
재겸은 외래어에 다소 약한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대체할 말이 없을 정도로 일상적으로 쓰이는 외래어라면 대충은 알고 있긴 했다. 이를테면 샴푸, 커피, 게임, 샤워, 핸드폰, 커플 등등.
이 정도라도 따라올 수 있었던 건 현대 사회에 완벽히 편입한 정주 덕분이었다. 현대인과 함께 생활하니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었다. 물론, 집돌이로서 티비 시청 경력이 쌓이며 틈틈이 주워들은 영향도 컸다. 한글이야 예전부터 언문으로 깨우치고 있었으니 금세 익힐 수 있었고.
그나저나, 아무리 생각해도 ‘섹시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티비에서 몇 번 들어 본 것 같고, 묘하게 익숙한데… 1등으로 합격했다는 얘기에 답변으로 온 것이니 아마 추켜세우는 뜻이 아닐까 싶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재겸이 문자를 입력했다.
「ㅅ색시가머야」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보다가 그냥 직접 물어보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까.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데도, 정말이지 배움이란 끝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새삼 감회에 젖었던 재겸이 휴대폰을 힐끔거렸다. 방금 전까진 재깍재깍 문자가 왔는데, 이번엔 텀이 길게 이어졌다. 어두운 액정에 대고 재겸이 까칠하게 채근을 했다.
“야. 섹시가 뭐냐니까.”
띠링! 5분 만에야 액정이 환해졌다. 내용을 확인한 재겸이 설핏 눈가를 구겼다.
윤태희의 답장은 이러했다.
「ㅋㅋ」
질문에 대한 설명은 없고 자음 몇 개만 덩그러니 있었다. 혹시 뒤이어 답이 올까 싶어서 기다려 봤지만 이후 문자는 오지 않았다. 일전엔 외래어를 지양해 가며 일부러 우리말로 바꿔서 말하는 배려를 보여 주던 윤태희는, 적당히 대답을 무마했다.
강이빈의 말대로 아주 바쁜 모양이었다.
***
1차 시험의 전 단계가 무사히 종료되었다.
“1차 시험에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5시 정각에 합격자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합격자들은 앞쪽 자리에 앉아 대기해 주세요.”
제1회의실의 앞문이 열리며 합격자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테이블의 맨 앞줄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재겸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아까보다 훨씬 피곤해진 기색의 나자는 버석한 공지를 남겨 놓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때, 합격자들 틈에서 샛노란 탈색 머리가 튀어나왔다.
“칠칠아!”
탈색남은 활짝 웃으며 재겸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시험에 응시한 77명 중 1차 합격자는 23명이었다. 그중엔 탈색남도 끼어 있었다. 그는 몹시 기뻐보였다. 상기된 얼굴로 재겸을 향해 후다닥 다가오더니 마치 친구라도 되는 양 자연스레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탈색남의 가슴팍엔 ‘임효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합격자들은 더 이상 가슴에 번호표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번호표 대신 이름표를 매달고 있었다. 블라인드로 진행되었던 1차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저절로 변한 것이다. 숫자가 사라진 자리엔 각자의 이름이 써 있었다.
“너도 붙었냐.”
재겸이 힐끔,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탈색남이 갑자기 콧대를 틀어쥐었다. 이제 시험이 끝났으니 신상을 숨겨야 할 이유는 없었다.
“2년이 헛되지 않았어. 뜨하, 눈물 난다. 눈물 나.”
탈색남은 초라니 출신이었다. 낮에는 학업을, 밤에는 수련을 하며 2년을 견뎌 냈다. 그렇게 열심히 귀기를 갈고 닦은 결과, 탈색남은 나름 상위권으로 첫 번째 관문을 넘을 수 있었다. 수습 나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감격이 휘몰아쳤다.
“잘됐네.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재겸이 무심히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동기 사이다, 칠칠아. 그치.”
재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탈색남은 재겸의 이름을 알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칠칠이’라고 불렀다. 딱히 듣기 좋은 호칭은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참견을 하는 것도 귀찮았으므로, 재겸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