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83)화 (83/348)

#83

“하여간에 꼴값을 떨어요.”

황승수는 마치 먼지라도 묻은 양, 탈색남의 손이 닿았던 부분을 탁탁 쳐 냈다. 그리고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탈색남을 얼마간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빙긋 웃으며 재겸에게 시선을 던졌다.

“고마워요, 재겸 씨.”

황승수는 보나 마나 같은 추천 입청자일 재겸이 제 편을 들어준 것이라 생각했다.

“첫날부터 재수 없게, 진짜. 꼭 이렇게 쥐뿔도 없는 것들이 자격지심 가지고 덤벼요, 덤비길. 멀쩡하게 대해 줄 때 감사한 줄은 모르고….”

안 그래요? 황승수가 주변에 있던 추천 입청자들을 돌아보며 천연덕스럽게 너스레를 떨 때였다. 추천 입청자 중 한 명이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이봐요, 황승수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아까 전에 소개를 마쳤던 김세민이었다. 이번엔 김세민이 나서자 황승수는 이건 또 뭐야,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김세민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좀 합시다. 지금 뭐, 편 나누고 싸우자는 거예요?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요, 대체? 왜 초라니 출신들한테 시비를 못 걸어서 안달이에요?”

그에 황승수가 피식 웃으며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시비라뇨, 이게 왜 시비예요? 난 객관적인 팩트만 보는 거예요. 솔직히 초라니랑 같이 1차 시험 본 것도 난 이해가 안 돼요. 우린 따로 선별 받은 사람들이고 이미 한 번 걸러졌는데, 우리가 저 사람들이랑 같아요?”

김세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합격의 기준은 공평했고 출신은 달라도 모두가 합당한 조건을 충족했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추천 입청자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훌륭한 성적으로 합격한 초라니들도 많았다. 하지만 황승수는 재겸처럼 압도적인 능력을 보여 준 것도 아니고, 그냥저냥한 실력으로 합격을 했음에도 남들을 낮잡아 보기 바빴다.

김세민이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황승수 씨는 내세울 게 그거밖에 없는 모양이네요.”

그 말을 끝으로, 김세민은 그대로 등을 돌려 탈색남을 걱정하는 무리에 합류했다. 반면에 다른 추천 입청자들은 가만히 눈치만 살폈다. 황승수의 친형이 현직 축역부 선임이라는 사실을 쭉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승수가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뻗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선임은 제법 높은 직급이었다. 한 계단만 승진하면 수석인 데다가 하물며 소속이 축역부라면 그 권력과 위상이 대단하기에, 훗날을 생각하면 연줄을 닦아 놓는 편이 이로웠다. 축역부는 나례청의 핵이었다. 추천 입청자 가운데서 축역부 나자의 지명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황승수가 유일했다.

“하하, 세민 씨는 사회생활 안 해 보셨나….”

조소를 흘리던 황승수의 시선이 재겸에게 닿았다. 눈이 마주치자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시키지도 않은 조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재겸 씨. 재겸 씨는 나이가 어려서 아직 잘 모르겠지만.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맥이에요. 인맥. 끼리끼리라고 하죠? 저런 사람들이랑 어울릴 필요 없다구요. 원래 각자 수준이 맞는 물에서 노는 법이니까.”

재겸이 심드렁한 낯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재겸 씨도 추천 입청자잖아요? 동기 중에 골드 패스를 받은 사람이 나오다니 이거 완전 영광인데요. 아, 혹시 어디 지망이에요? 재겸씨는 능력이 좋으니까, 만약 축역부 지망이라면 저한테 말해요. 제가 형한테 얘기 잘 해 놓을게요.”

황승수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누구 추천이야? 말 편하게 해도 되지?”

황승수가 살갑게 말을 건네며 재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에 재겸은 냅다 미간을 구기며 어깨에 얹힌 손을 탁, 쳐 냈다.

“들러붙지 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재겸을 바라보았다. 양말을 벗고 발가락을 확인하던 탈색남도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황승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재겸이 눈을 흘기며 싸늘하게 덧붙였다.

“똥물에서 놀아 줄 생각 없으니까 꺼져.”

회의실 안에 얼마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

“…….”

“…….”

황승수가 한참 만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쌍으로 가지가지 하네.”

제법 태연하게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얼굴만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골드 패스를 받은 잘난 분이시라서, 역시 남다르네.”

황승수가 싸늘하게 빈정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재겸은 소란을 막으려고 나선 것이었는데 황승수의 성질을 더 돋운 셈이 되었다. 황승수는 탈색남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기세가 험악했다. 재겸이 심드렁한 투로 말을 받아쳤다.

“야. 나는 꼭 나자가 되어야 하거든. 여기서 망치긴 싫으니까, 부탁인데 남의 인생에 훼방 놓지 말고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

합격자들이 당황하여 눈을 끔벅거렸다. 앳된 소년이 거침없이 대거리를 해 대는 것이 놀라웠다. 탈색남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너네 형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 너한테 설치지 말라는 얘기는 안 해 줬어? 내 뒷배는 나한테 조용히 있으라고 했는데.”

한숨을 쉬던 재겸이 무신경하게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재겸의 뒷배는, 현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관전 중이었다. 턱을 괴고, 재밌어 죽겠다는 눈빛으로 한 사람만을 보고 있었다.

“아이고. 뒷수습도 못 해 줄 만큼 상당히 별 볼 일 없는 빽을 두셨나보다. 골드 패스까지 받으신 분인데, 몸이나 사리게 만들고, 많이 답답하시겠네.”

황승수가 약을 올리듯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든 재겸을 뭉개고 싶어서 애쓰는 것 같았다. 황승수가 자꾸만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탓에 재겸은 점점 짜증이 났다.

“아까부터 말끝마다 골드 패스 타령이네.”

재겸이 삐딱한 시선으로 황승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혹시, 자격지심 있으신가?”

그 순간, 황승수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빡-!

결국 황승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재겸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불시에 날아든 손길에 재겸의 상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회의실 내부가 싹 얼어붙었다.

“아, 씨발….”

그대로 굳어있던 재겸이 머리를 감쌌다. 황승수의 손길엔 제법 강한 귀기가 실려 있었다. 불시에 얻어맞은 머리통에 무거운 통증이 따라왔다. 얼얼하다 못해 쓰라릴 지경이었다.

“이런 또라이 새끼가!”

탈색남이 벌떡 일어나 황승수의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이봐요, 황승수 씨! 당신 미쳤어?”

초라니고, 추천 입청자고, 합격자들이 앞다투어 재겸을 에워쌌다.

“귀기까지 싣다니, 제정신입니까?”

“훨씬 어린 사람한테 이게 무슨 짓이에요!”

“재겸 씨, 괜찮아요? 어, 어떡해.”

재겸은 마음속으로 칼을 갈며, 일단은 둔통을 삭여 냈다.

아, 저 씹새끼를… 넌 죽었어….

그때였다. 갑자기 뒤쪽에서 쾅,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뒤로 향했다. 회의실 앞쪽에만 불이 켜져 있는 탓에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으나, 맨 뒷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앉은 상태로 테이블을 걷어찬 것인지 일정한 간격으로 있던 테이블이 줄줄이 밀려나 있었다.

당황한 합격자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을 때였다.

“첫날부터 개싸움인가요.”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윤태희가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뚜벅뚜벅, 구두 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밝은 곳까지 이르러서 윤태희가 걸음을 멈췄다.

대치 중이던 탈색남과 황승수가 후다닥 거리를 벌렸다. 재겸을 에워싸고 있던 다른 합격자들도 눈치를 보며 물러섰다. 합격자들은 윤태희가 누군지 몰랐다. 만약 탈을 쓰고 있었다면 적어도 축역부 소속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릴 수 있었겠지만, 윤태희는 평소와 다르게 탈을 쓰고 있지 않았으며, 맨얼굴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재킷도, 넥타이도 없이 타이트한 검은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은 윤태희가 합격자들을 휘 둘러보았다.

“동기 사랑 나라 사랑 몰라요? 왜 싸우고들 그래요.”

장난기가 묻어나는 말에 합격자들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망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으며,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정장 차림인 것을 보니 선배 나자임이 분명했다. 아마 오리엔테이션을 하러 온 나자일 가능성이 컸다.

“안녕하세요. 우선 1차 합격 축하드립니다.”

선배 나자가 뒤늦게 인사에 건넸다. 눈치를 보며 어정쩡한 얼굴로 서 있던 합격자들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안,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에 답했다. 그 틈에 윤태희는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제 후임을 바라보았다.

“…….”

뒤늦게 윤태희를 발견한 재겸이 눈을 크게 떴다. 밤이나 되어야 복귀할 거라고 했는데, 네가 여기 왜…. 재겸이 뭐라 입술을 달싹이려 하자 윤태희가 기민하게 눈짓을 보냈다. 마치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처럼 보였다.

재겸은 윤태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며칠 만에 보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윤태희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평소와 다르게 앞머리를 올렸네…

재겸은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마치 반가운 것처럼.

재겸의 시선이 윤태희의 오른손에 닿았다. 손의 반깁스가 사라져 있었다. 복직하고 나서 치료실을 들락거리며 정화부의 케어를 받은 덕이었다. 부러진 손가락이며, 몸에 남아 있던 상처며 어느새 거진 다 나은 상태였다.

그때,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황승수 씨?”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황승수가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올 것이 왔구나. 끝내 예상대로 덤터기를 쓴 합격자들은 마치 벌을 기다리는 듯 표정이 어두웠다. 첫날부터 이 모양 이 꼴을 보였으니… 선배 나자는 처음 본 순간부터 반듯한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져서, 회의실 분위기는 살얼음판과도 같았다.

“친형이 축역부 나자시라고.”

윤태희가 테이블에 느슨히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에 황승수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왜 싸웠냐, 무슨 일이 있었냐, 방금 전의 상황을 문제 삼을 줄 알았는데. 윤태희는 대수롭지 않게 질문을 던졌다.

“네,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형 성함이?”

“황. 황현수입니다.”

“아, 제3팀 황 선임님….”

윤태희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공손하게 시선을 내리고 있던 황승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형이랑 아는 사이인가…?

“유능한 분이세요. 실력도 출중하시고.”

운이 좋았다. 황승수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형이랑 아는 사이에,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알고 있다면, 저와도 인맥이 닿아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생각보다 상황이 쉽게 풀릴지도. 갑자기 덜컥 안도감이 들었다.

그때, 윤태희가 웃으며 덧붙였다.

“뭘 믿고 나대나 했더니 그럴 만하네요.”

엥? 황승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황승수 씨.”

“예, 예?”

윤태희가 먼지를 훑듯이 검지로 테이블 위를 쓸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맥이라고 하셨죠.”

뜬금없는 말에 황승수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전, 황승수가 재겸에게 건넸던 조언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인맥도 물론 중요하죠. 근데 그보다 중요한 건….”

윤태희가 검지를 들더니 제 눈가를 톡톡 건드렸다.

“눈치예요. 눈치. 알겠어요? 이 눈치가 좋아야….”

말을 흐리던 윤태희가 황승수의 눈을 쳐다보았다.

“기어올라도 되는지 안 되는지 분간을 하죠.”

황승수에겐 영 아리송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머리를 문지르던 재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윤태희가 고개를 돌려 재겸을 응시했다.

윤태희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사라졌다.

“기어오르는 거, 딱 싫어하시는데. 우리 나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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