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84)화 (84/348)

#84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말에 합격자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나리라니, 누굴 얘기하는 거지? 재겸은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블에 느슨히 걸터앉아 있던 윤태희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물었다.

“황승수 씨. 여기가 어디죠?”

황승수가 당황하여 입을 달싹였다. 여기가 어디냐니, 그야….

“나, 나례청… 입니다.”

“그래요, 나례청이에요.”

윤태희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다면 좀 더 현명하게 처신하는 편이 좋을 텐데요.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 흐리도록 내버려 두는 곳이 아니거든요. 제 성질대로 주먹 휘두르고 그러면 쓰나요.”

웃음기 어린 지적에 황승수가 침을 삼켰다. 제 형과 아는 사이이니 어쩌면 적당히 넘어가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얼핏 들었을 땐, 친절하면서도 예의 바른 어조로 건넨 말이었지만 그 내용은 날카롭고 신랄했다.

“사회생활 운운하는 것치고는 사리 분별하는 데 제법 큰 문제가 있으신 것 같은데. 혹시 훌륭한 뒷배를 둬서 그런 건가요? 뭐, 황 선임님이라면 확실히 이 정도쯤은 쉽게 수습할 수 있는 위치긴 해요.”

상냥한 비아냥에 황승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도 눈치를 좀 기르는 게 어때요? 여기가 무슨 길바닥도 아니고… 아, 혹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신가….”

윤태희가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중얼거리더니,

“맞다, 축역부 지망한다고 했죠? 어디 확인 좀 해 볼까요.”

걸터앉은 테이블에서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윤태희는 별안간 오른팔을 들어 소매의 단추를 풀고, 성의 없는 손길로 셔츠 소매를 끌어 올리듯 걷어붙였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근처에 서 있던 황승수에게 가까이 갔다.

갑자기? 확인하겠다고? 뭘?

황승수가 당황한 눈으로 윤태희를 바라볼 때였다.

“황승수 씨. 얼굴에 귀기를 덧대 보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태희가 손을 휘둘렀다.

짜악-!

황승수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윤태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겸 또한 마찬가지였다. 실력을 보겠다던 윤태희는 황승수의 뺨을 때렸다.

“…….”

“…….”

“…….”

회의실 안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어땠죠, 방금? 귀기 없이 때린 건데.”

윤태희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어디까지나 실력을 확인할 목적으로 한 행동이라는 걸 일깨워 주려는 듯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던 황승수는 한참 만에야 얻어맞은 뺨을 감쌌다. 윤태희가 말했다.

“맨손으로 때린 건데, 혹시 아팠습니까?”

“이, 이게 대체 무, 무슨….”

황승수가 얼떨떨한 낯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축역부는 몸으로 부딪치는 일이 많아요. 현장에서 뛰는 전투직이니까요. 당연히 귀기를 잘 다뤄야 합니다. 공격할 땐 귀기를 몸 바깥으로 방출하고, 방어할 땐 살갗에 귀기를 씌우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거예요. 다가올 충격을 경감시키는 거죠. 갑옷이나 보호대를 찬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윤태희가 친절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공격보다 방어하는 게 훨씬 어려워요. 귀기를 내보내는 건 쉽지만, 방어할 땐 일정량의 귀기를 그대로 정체시켜야 하니까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해요. 귀기 컨트롤을 잘한다면 같은 데미지를 받더라도 덜 다칠 수도 있고, 데미지를 아예 무화시킬 수도 있어요. 이해가 됩니까?”

선배 나자의 세심한 가르침이 이어졌다. 합격자들은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재겸은 벙 찐 얼굴로 윤태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태희는 웬만하면 선빵은 맞아 주라고 말했다. 그래서 재겸은 한 번 참았다. 이번엔 제 차례였다. 하지만 하필 딱 그 순간에 윤태희가 끼어들어서 황승수에게 돌려주질 못했다. 한 대 맞아 줬으니 나도 한 대 때렸어야 했는데. 때리고 난 뒤에 끼어들 것이지, 왜 하필 그때 수습에 나서나 싶어 재겸은 살짝 분할 뻔했었다.

설마, 일부러 저러는 건가? 혹시 나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럼 설명이 되었으리라 믿고? 다시.”

그때, 윤태희가 옅은 볼우물을 머금고 말했다.

“이번엔 손에 귀기를 실을 거예요.”

짜악-!

황승수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또 한 번 매서운 손길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반대쪽 뺨이었다. 예고처럼 귀기가 실린 싸대기였다. 아까보다 소리도 훨씬 컸다. 충격의 반동으로 황승수의 몸이 짧게 비틀거렸다.

“어, 이번엔 아까보다 잘 막은 것 같은데요. 좋습니다. 생각보다 귀기를 잘 다루시네요.”

윤태희가 제 손을 내려다보며 해맑은 투로 칭찬을 건넸다.

“......”

“......”

합격자들은 하나같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으로 조용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쩐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젠 모두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어딜 봐도 단순히 실력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었다. 선배 나자는 황승수에게 수모를 주고 있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결국 황승수는 붉게 부어오른 뺨을 감싼 채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선, 선배라도 이,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황승수가 울그락불그락하며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뺨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아픈 건 둘째 치고 치욕스러운 감정이 더 컸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뺨을 두 대나 맞았다.

“실력을 확, 확인한다는 건 핑계고, 화풀이하는 거 아니냐고요!”

윤태희가 의외라는 듯이 황승수를 쳐다 보았다.

“어… 아예 눈치가 없진 않은가 보네….”

뭐라고? 황승수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맞아요, 화풀이하는 거. 누구는 감히 손도 못 대는데, 남이 손대니까 사실 좀 빡 돌았어요.”

윤태희가 꺼낸 말은 지칭이 불분명하여 그 내용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알아들은 것은 오로지 재겸뿐이었다. 윤태희는 화난 게 맞았다. 나 때문에 화가 나서 일부러 저러는 거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평소대로 능청스레 무마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재겸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때, 윤태희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근데 어쩌죠. 나 아직 화가 덜 풀렸는데.”

낮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흘러나온 말과 동시에,

짜악-!

윤태희가 예고 없이 황승수의 뺨을 후려쳤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입술이 터지고 황승수의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근처에 있던 합격자들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눈치를 봤다.

“아, 윽….”

황승수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끙끙 신음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골이 깨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건 진심이었어요. 같은 축역부 나자로서요.”

단조로운 어투로 흘러나온 말에, 합격자들이 놀란 눈으로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축역부였다니.

“기대 이상이긴 했습니다. 뭐, 우리 팀에 들일 일은 없을 테지만.”

윤태희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중얼거렸다.

“왜냐면 우리 팀은 인성을 보거든요.”

황승수를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고개를 들었다. 오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재겸과 눈이 마주쳤다. 그에 윤태희는 말없이 재겸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슬쩍 덧붙였다.

“아, 그리고 얼굴도.”

윤태희가 장난스럽게 콧잔등을 찡긋해 보였다.

“…….”

재겸은 순간 저도 모르게 시선을 슥 피했다.

그때, 황승수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제, 제가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그렇지, 절, 절차대로 처분을 주시는 거면 몰라도 이런 식으로 손, 손찌검을 하시는 건 명, 명백히 부당한….”

윤태희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황승수의 말을 잘랐다.

“꼬우면 승진하세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도,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대꾸였다.

***

“오늘 일은 더는 문제 삼지 않고 이만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대충 알아 들으셨으리라 믿어요. 합격 취소하거나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단,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윤태희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사무적인 어조로 상황을 정리했다. 이대로 오늘 일을 불문에 부쳐 주겠다는 말에 합격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누구 말마따나 합격 취소라도 시키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었다. 화풀이를 끝낸 윤태희는 너그러운 상관이었다.

말을 마친 윤태희가 재겸을 향해 다가왔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자 이제서야, 향수 냄새가 끼쳐 오는 듯했다. 재겸은 아까부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때마침 회의실 앞문이 열리며 낯선 나자 한 명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합격자 여러분, 어?”

회의실 내부의 풍경은 한눈에 봐도 어지러웠고, 살갗에 와 닿는 분위기 또한 어딘지 산만했다. 서류 파일을 품에 낀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회의실 안을 훑어보던 나자의 시선이 바닥에 앉아 있던 황승수에게 가서 닿았다.

“무슨 일이에요? 왜 그러고 계시죠?”

황승수는 말없이 신음만 흘렸다.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합격자들은 흡사 목석처럼 뻘쭘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낯선 나자가 윤태희를 발견했다. 낯선 나자가 의아한 눈을 했다. 정장 차림인 것을 보니 합격자가 아니라 나자인 듯한데, 왜 여기에? 낯선 나자는 윤태희의 맨얼굴을 몰랐다.

“저는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러 온 정화부 도나영입니다.”

여러 의문을 뒤로 한 채, 도나영은 일단 자기소개부터 했다. 그에 합격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연히 먼저 온 선배 나자 쪽이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러 온 사람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나영이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소속이….”

도나영의 질문에 황승수를 제외한 합격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태희를 향해 쏠렸다. 오티 하러 온 게 아니었다고? 그럼 대체… 그에 윤태희가 잠시 눈을 굴리며 뭔가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대뜸 고개를 훽 돌려 재겸을 바라보았다. 그에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쳐 왔다.

윤태희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죠?”

“뭐? 뭐. 요.”

이것이 며칠 만에 만난 윤태희와 처음으로 섞은 말이었다. 윤태희는 본인에게 날아든 질문을 별안간 재겸에게 토스했다. 당황한 재겸이 눈가를 설핏 구겼다. 언제는 아는 척하지 말라며? 재겸의 눈빛을 읽어 냈는지, 윤태희가 이젠 괜찮다는 듯,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눈치를 보던 재겸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윤… 윤태희….”

누구?! 도나영이 흠칫 놀라 토끼 눈을 떴다. 윤태희는 여전히 재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라는 대로 대답을 했는데도 아직 더 남아 있다는 것처럼,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듯 했다.

아, 이 십새끼….

의중을 눈치챈 재겸이 험악하게 말을 덧붙였다.

“쑤. 석. 님.”

그에 윤태희가 소리 내어 웃는가 싶더니, 도나영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네요.”

남의 말을 인용하는, 불친절한 자기소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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