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87)화 (87/348)

#87

탈의실 안은 제법 넓었다. 전면에 커다란 거울이 있고 한쪽에는 작은 소파까지 있었다. 직원은 벽에 매달린 고리에 입을 옷을 차근차근 걸어 준 뒤에야 탈의실을 나갔다. 남색 슈트 재킷에 셔츠, 바지까지 한 세트였다.

홀로 남은 재겸이 거울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거릴 때였다. 갑자기 탈의실 문이 열리더니 윤태희가 들어왔다. “왜?” 재겸이 묻자 윤태희가 손에 든 것을 흔들어 보였다. 검은색 구두와 땡땡이가 새겨진 넥타이였다. 윤태희가 입꼬리를 삐뚜름히 끌어 올렸다.

“이왕 입는 김에 제대로 입어 봐.”

“거기 놓고 나가.”

재겸이 망설임 없이 입고 있던 맨투맨을 훌러덩 벗었다. 소파 위에 구두와 넥타이를 내려놓으려던 윤태희가 그대로 멈칫했다.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상반신에 시선이 갔다.

“너 운동해?”

조용하던 윤태희가 불쑥 입을 열었다. 늘 무기력하고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몸에는 잔근육이 착실히 붙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날렵해 보이는 몸 선이었다. 적당히 날씬한 듯하면서도 강골임이 느껴졌다.

“아니. 안 해.”

재겸이 벽에 걸린 셔츠를 집었다. 재겸이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어느새 윤태희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넥타이와 구두를 들고, 한 손으로는 비스듬히 턱을 괴고 있었다. 재겸이 셔츠에 팔을 끼우며 윤태희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왜 안 나가냐는 눈빛이었다.

“운동도 안 하는데 몸이 좋으시네….”

나갈 생각이 없는 윤태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느새 셔츠를 다 입은 재겸이 청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헐렁한 바지를 쑥 내리자 검은색 드로우즈가 나왔다. 윤태희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속옷도 그분이 골라 줘?”

“응. 정주가.”

재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슈트 바지를 입었다. 교복을 입는 방식과 다를 게 없어서 처음 입어 봄에도 순조롭게 착의가 이루어졌다.

“옆구리에 큰 흉터가 있던데.”

바지 지퍼를 올리던 재겸이 전면에 펼쳐진 거울을 보았다. 거울 안에서 윤태희와 눈이 마주쳤다. 윤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동자님은 흉터 못 없애나?”

“없앨 수 있는데 이건 안 없어져.”

메산이는 갓 생겨난 상처며 흉터까지 전부 치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재겸은 몸을 험하게 굴렸음에도 깨끗한 살갗을 지니고 있었다. 흉터라고는 옆구리에 남은 하나가 전부였다. 왜 이것만은 없어지지 않는지 이유는 몰랐다.

“어쩌다 다친 거야?”

“예전에 칼 맞아서.”

“…누구한테?”

“내 스승한테.”

알면서 왜 묻느냐는 투였다. 아. 윤태희는 한 박자 늦게 눈치챘다. 이 흉터는 일전에 새로를 통해 엿봤던, 과거의 한 토막 속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고 했던가. 옆구리에 칼을 찔렸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 직접 그 흔적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

윤태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많이 아팠겠네.”

한참 만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슈트 재킷을 집어 들던 재겸의 손이 짧게 멈칫했다. 당연히 많이 아팠다.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아팠었다.

“어? 어….”

말을 주고받는 동안 재겸은 슈트를 다 입었다. 기성복이었지만 몸에 딱 맞춘 것처럼 몹시 잘 어울렸다. 노란색 맨투맨을 입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성숙해 보였다. 윤태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더니, 재겸의 발치에 새 구두를 가지런히 놔 주었다.

“그대로 서 있어. 슈트 구겨지니까 내가 신겨 줄게.”

윤태희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더니 광택이 나는 검은색 구두의 끈을 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재겸이 구두에 발을 구겨 넣었다. 양말에 그려진 버섯 캐릭터가 눈에 띄었다. 옥의티를 발견한 윤태희의 뺨에 옅은 볼우물이 패였다.

“양말도 골라 줬어야 했는데 깜박했네.”

윤태희가 손가락을 끼워 넣더니 자리가 남는지 확인했다.

재겸이 이를 악물었다. 뒤꿈치 부근에 손가락이 쑥 들어와서 간지러웠던 탓이다. 간간이 발목을 건드리는 윤태희의 손길도 마찬가지였다. 재겸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릎을 꿇고 앉은 윤태희의 정수리가 보였다. 오른 가마네… 좀 더 시선을 내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검은색 셔츠 위로 윤태희의 등근육이 탄탄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굴곡이 움직인다.

구두끈까지 꼼꼼히 묶어 준 뒤, 윤태희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마지막으로 넥타이.”

윤태희가 손을 뻗어 재겸의 셔츠 깃을 반듯하게 세웠다. 재겸이 움찔하며 턱을 움츠렸다. “턱 들어야지.” 윤태희가 웃으며 재겸의 목에 넥타이를 둘렀다. “간지러워? 저번엔 안 그러더니.” 윤태희의 말대로였다. 언젠가 가로수 뒤에서 넥타이를 매 줬을 때는 멀쩡했는데 오늘은 아주 간지러웠다.

“한 바퀴 돌려서, 좁은 자락을 위로, 고리를 만들면….”

그때처럼 윤태희가 재겸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들겼다. 재겸이 시선을 내려 단정하게 묶인 넥타이를 바라보았다. 윤태희는 재킷 자락을 잡아당기며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다 됐지?”

재겸이 무심한 눈으로 제 옷차림을 확인했다. 윤태희가 뒤로 한두 발짝 물러섰다.

“응. 됐어.”

윤태희는 재겸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마치 잘 만든 작품이라도 감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눈앞에 선 소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마침내 기묘한 만족감이 솟았다. 이상하리만치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전부 내가 고른 거다.

너도, 너마저도….

그렇게 생각하니 손끝이 저렸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등골이 서늘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새삼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소년이 서 있다. 불사의 소년이 서 있다. 저를 바라보며 서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이 골라 준 옷을 입고서….

윤태희는 천천히 팔을 뻗었다. 검지를 들어 재겸의 이마를 조심히 쓸어 보았다. 삐뚤빼뚤한 앞머리를 따라 손끝이 일직선으로 움직였다. 재겸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빼려고 할 때였다.

“그런 느낌 알아?”

윤태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세상이 나한테 친절을 베풀어 주는 느낌.”

기대하지 않은 순간마다 우연한 기회가 따라오곤 했다. 헤매고 넘어지고, 과정이 순탄치는 않더라도 그 끝에는 언제나 원하던 결말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남들보다 집요하고 끈질긴 성격 탓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윤태희는 기회를 잡으면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그건 확실히 윤태희의 소관 안에 있는 일이었다. 허나 윤태희를 골몰하게 만드는 지점은 그보다 근본적인 차원에 있었다. 그 기회란 어디서 오는가, 였다.

“평소처럼 도서실 문을 열었더니 네가 서 있었어. 별생각 없이 창문을 내다보면 네가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을 달리고 있고. 혹시나 싶어서 넥타이를 하고 왔더니 넌 넥타이가 없어. 함께 붙어 있을 시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더니 마침 네가 교내 봉사를 해.”

윤태희는 재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꼭 세상이 힌트를 주는 것 같았어.”

재겸이 고요한 눈으로 윤태희를 응시했다.

“너라고. 너를 따라가라고….”

윤태희는 때때로 그런 느낌을 받아 왔다. 세상의 모든 이정표가 나의 방향을 따라오는 느낌. 돛을 펼치면 어김없이 순풍이 불어오는 것처럼, 알 수 없는 힘이 등을 밀어 주고 있는 듯한, 기이하고도 소름 끼치는 그 느낌을.

“그래서 가끔은 의심이 들 때가 있어.”

윤태희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나는 속고 있는 걸지도 몰라. 아무리 어긋나도 결국엔 내가 바라는 대로 맞아떨어진다는 게 이상해. 사실은 이 모든 게 함정이고, 세상은 나를 패망으로 유인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때, 잠자코 있던 재겸이 입을 열었다.

“하나도 안 이상한데.”

재겸이 이마를 맴도는 손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

“나한테 세상은 이유 없이 악의적이야.”

윤태희는 세상이 친절을 베풀어 주는 느낌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 모른다. 그 어떤 설명을 듣더라도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윤태희와 재겸은 양극단에 서 있었다.

“그럼 반대로 누군가한텐 이유 없이 호의적일 수도 있는 거겠지.”

재겸이 이마를 긁적거리며 무심히 덧붙였다.

“설사 만에 하나 잘못되더라도 넌 패망하지 않아.”

단언하는 말에 윤태희가 느리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너한텐 내가 있으니까.”

평이한 대꾸에 윤태희가 멈칫할 때였다.

“나는 사활을 걸었어. 근데 난 뭘 해도 안 죽잖아. 세상이 망해도 나는 살아 있어. 영원히 닳지 않는 목숨을 바쳐서 내가 널 이기게 해 줄게.”

어디선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오로지 윤태희의 귓가에만 들리는 소리였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사활이었다.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재겸은 진심이었다. 흔들림 없는 또렷한 눈동자가 윤태희를 응시해 왔다. 갑자기 시야가 어그러지는 듯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윤태희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아.

함락당할 수밖에 없는, 지독한 현기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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