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88)화 (88/348)

#88

재겸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쇼핑을 끝낸 뒤 윤태희는 재겸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원래 목적이던 오랭테이션은 하지 못했다. 윤태희가 본청으로부터 호출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에 하는 수없이 오랭테이션은 다음 날로 미뤘다. 윤태희는 내일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차를 돌려 골목을 빠져나갔다.

재겸은 대문에 붙어 멀어져 가는 윤태희의 차를 바라보았다. 윤태희는 탈의실에서 나온 뒤로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별말이 없어 아주 어색했다. 왠지 신경이 쓰여서, 재겸은 차가 완전히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 대문을 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재겸의 퇴근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정주와 메산이는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나리, 다녀오셨어… 요?!”

“어서 와! 재겸… 어? 어?”

현관에 들어서는 재겸을 보자마자 메산이가 떡하니 입을 벌렸다. 그건 정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슈트 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굳어 있던 정주가 재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다녀왔어.”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재겸이 구두를 탈탈 벗어 던졌다. 새 구두가 낙엽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재겸은 살짝 피로해 보였다.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마룻바닥에 와르르 내려놓았다. 족히 열댓 개는 되어 보였다.

“대박… 재겸아, 너! 이게 무슨 일이야?”

“이제부턴 출근할 때 이렇게 입어야 된대.”

재겸은 심드렁한 얼굴로 설명을 해 주었다. 덧붙여 윤태희와 함께 백화점에 다녀왔다는 사실도 말했다. 어차피 입은 거, 굳이 또 갈아입기도 귀찮아서 그냥 이대로 온 참이었다. 순수한 귀찮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정주와 메산이에게 뜻밖의 서프라이즈를 선사해 준 셈이 되었다.

“와, 살다 살다. 너 슈트 입는 것도 다 보고….”

정주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재겸의 슈트를 매만졌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혀 놓으니 재겸에게서 보다 확연한 청년미가 풍겼다. 옷이 날개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정주는 재겸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메산이 역시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저의 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겸이 메산이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잘 놀았어?”

“네!”

“뭐 하고 놀았어?”

“정주 님이랑 이거저거 하고 놀았어요!”

“또?”

“새들한테 인사도 했어요, 근데 인사를 안 받아 줬어요!”

“왜?”

“모르겠허요!”

“…서울 새들은 싸가지가 없나?”

메산이와 재겸이 두런거리는 사이, 정주는 쇼핑백을 뒤적거리며 내용물을 하나씩 확인하고 있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쇼핑백 겉면엔 금박으로 브랜드명이 쓰여 있었는데, 익히 알고 있는 비싼 명품 브랜드 중 하나였다. 세트로 맞춘 슈트 여러 벌에, 다양한 구두와 넥타이, 심지어 양말까지 있었다.

“재겸아, 그럼 이거 다 태희 씨가 사 준 거야?”

재겸이 슈트 재킷을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주가 황당하다는 눈을 했다. 그럼 이게 전부 다 얼마라는 얘기야? 가격표를 보니 슈트 한 벌에 이백만 원이 넘었다.

고맙기는 하지만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는데….

“내 카드 줬잖아. 그걸로 사지 그랬어.”

정주는 괜히 미안해졌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거니와, 어차피 재겸이 입을 옷이니 이쪽에서 지불하는 게 맞다. 이미 집까지 받은 마당에 자꾸 이렇게 신세를 지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걔가 싫댔어.”

안 그래도 재겸은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확히 얼마인지 모르니 그냥 카드로 하면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윤태희는 재겸의 손을 슬쩍 밀어내더니 “내 카드로 할게.” 하며 본인이 직접 계산을 했던 것이다. 그에 재겸이 의아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왜? 내가 입을 옷인데 왜 네가 사?’

‘내가 골라 준 옷이니까 내가 사야지.’

이상한 논리였지만 그럴싸했다. 재겸이 물었다.

‘너 돈 많아?’

‘응. 많은데.’

윤태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근데 나도 돈 많아.’

재겸은 별 감흥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거 정주 씨 돈 아닌가?’

‘정주 돈이 내 돈이야.’

‘그럼 내 돈도 네 돈 해.’

그리하여 계산대의 승자는 윤태희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뭐지, 대체? 무슨 주식이라도 하시나…?”

가만히 얘기를 듣던 정주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아니면 부동산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연봉 2억 정도로 가질 수 있는 경제력이 아닌데… 언제 좋은 투자 정보라도 있는지 슬쩍 물어봐?

“아무튼, 자꾸 이렇게 받기만 하니까 좀 그렇네. 이게 다 꽁으로 받는 것 같아도 뒤돌아보면 전부 빚이에요. 빚. 받은 만큼 다 돌려주게 돼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완벽히 녹아 든 여우가 쇼핑백을 뒤적거렸다. 메산이도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쇼핑백에 머리를 집어넣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언제 한번 집에 초대해야 되지 않겠어? 집들이 겸해서 식사 대접도 하고. 재겸아. 태희 씨한테 언제 시간 되시는지 물어봐 봐.”

“뭘 또 초대를 해. 돈이 썩어 나서 퍼 주는가 보지. 그냥 내버려 둬.”

재겸이 심드렁한 얼굴로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아이, 오고 가는 정이 있지. 그리고 솔직히 네 얘기만 들었을 땐 느낌이 별로였어도. 막상 만나 보니까 예의도 바르고 상식적인 분인 것 같던데.”

정주가 쇼핑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역시 감보다는 직접 겪어 보고 판단하는 게 맞나 봐.”

“언제는 촉이 어쩌고 하더니, 꼬리 떼라. 새끼야.”

재겸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정주를 흘겨보았다.

“에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고….”

정주는 멋쩍은 표정으로 작게 꿍얼거리다 “아, 맞다.” 하며 화제를 돌렸다.

“태희 씨랑 악수했을 때 좀 신기했는데.”

“뭐가 신기해?”

“뭐랄까. 기분이 이상했어.”

빈 쇼핑백을 착착 접고 있던 재겸이 고개를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니, 그게 뭔 소리야.”

“어, 말하자면 심장이 콱 조여드는 기분?”

정주가 제 손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뭔가 철렁했어. 위압감 같은 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재겸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위압감?”

정주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불쾌하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뭔가… 가슴이 조여들면서 피가 후끈거리는 느낌이었어. 재겸아, 너도 태희 씨랑 악수했을 때 이런 느낌 받았어?”

재겸이 눈을 굴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런 느낌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데. 그보다 내가 걔랑 악수를 한 적이 있었나? 간략하게 지난날을 돌이켜 봤으나 아무렴 두들겨 팬 기억밖엔 나지 않았다….

***

“부장님, 윤 수석님 오셨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한주영의 사무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축역부장실, 너른 데스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석주련은 서류를 넘겼다.

“들여보내.”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석주련의 호출을 받고 온 윤태희가 들어와 묵례를 했다. 그러나 석주련의 시선은 여전히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다. 윤태희가 걸어왔다. 데스크 앞에 서자 윤태희가 뒷짐을 지고 느리게 말했다.

“부르셨어요.”

상명하복을 보여 주는 절도 있는 자세와는 다르게 느슨한 말투였다. 석주련은 윤태희에게 시선 한 톨 주지 않았고, 인사는커녕 별다른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넓은 부장실에 본인 혼자만 있는 것처럼 묵묵히 서류만 살펴 볼 따름이었다.

“…….”

“…….”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윤태희는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 입을 여나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윤태희가 먼저 운을 뗐겠지만, 지금 윤태희는 기분이 별로였다. 긴 정적이 흘렀다. 한참 만에야 석주련이 태연히 중얼거렸다.

“웬일로 탈을 안 썼구나.”

윤태희가 온 이후로 석주련의 시선은 한 번도 서류를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윤태희가 자신의 맨얼굴을 슥 쓸어 보았다.

탈은 축역부의 상징이었다. 축역부 나자라면 누구나 전통 탈을 부여받는다. 탈은 방상시의 의지를 잇는다는 표식 그 자체이자, 귀기의 충격을 막아 주는 보호구 역할을 했다. 따라서 축역부 나자들은 현장에서 필수적으로 탈을 착용해야만 한다. 물론, 범인으로 위장을 해야 한다거나, 혹은 보는 눈이 많은 곳에 잠입해야 하는 식의 특수한 상황이라면 예외였다. 일반적으로 탈을 써야 하는 경우는 전투직으로서 현장에 나설 때의 얘기다.

따라서 본청 안에선 굳이 탈을 쓰지 않아도 됐다. 대부분은 본청에 와선 탈을 벗었다. 그러나 본청 안에서도 탈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유야 가지각색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려 나가는데 매번 벗었다 썼다 하기 귀찮아서, 혹은 벗어 두기만 하면 자꾸 잃어버려서, 축역부 나자인 것이 자랑스러워서, 탈이 내 맨얼굴보다 잘생겨서, 등등….

윤태희도 탈을 벗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평소 윤태희는 탈을 잘 벗지 않았다. 같은 팀원들을 비롯해 평소 알고 지내는 몇 명을 제외하면 남들 앞에서 맨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별로 없었다. 언젠가 석주련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윤태희는 잘난 얼굴 닳을까 봐요, 라는 대답을 내놨고, 석주련은 그날부로 더는 묻지 않았다.

“흠, 차에 놓고 왔어요.”

윤태희가 느릿느릿 대꾸했고,

“신입 때렸다면서.”

석주련은 조용히 서류를 넘겼다.

“누가 그래요?”

“대답이나 해.”

뒷짐을 지고 있던 윤태희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소문 빠르네요, 발이라도 달렸나.”

장난스러운 대꾸에 석주련이 잠시 눈을 감았다. 이내 손에 든 서류철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석주련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윤 수석.”

그에 윤태희가 뒷짐을 풀더니 눈가를 매만졌다.

“아, 알 만하네요. 보나 마나 황 선임이겠죠. 동생 맞았다고 그새 부장님한테 달려와서 일러바쳐요? 보면 꼭 무능한 새끼들이 고자질은 잘해요.”

“윤 수석.”

석주련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화를 꾹꾹 눌러 참는 듯한 음성이었다. 윤태희가 태연한 얼굴로 데스크 한쪽에 놓인 볼펜을 집어 들었다. 볼펜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뻔뻔한 태도에 석주련이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제멋대로 행동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래서 팼어요.”

결국 석주련이 매서운 낯으로 벌컥 쏘아붙였다.

“황승수 말고 너 얘기하는 거야, 이 자식아!”

알죠. 윤태희가 볼펜을 딸깍거리며 작게 웃었다.

“야 이 새끼야, 너 그렇게 상식 없는 놈이야?”

“가끔? 상식 없는 사람 앞에선 저도 상식 없어요.”

아, 편두통… 석주련이 이마를 짚었다.

“가서 사과해.”

윤태희가 볼펜을 제자리에 돌려 놓으며 대꾸했다.

“싫어요.”

“윤태희.”

윤태희가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제 후임을 건드렸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그렇다고 때려?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을?”

화난 석주련이 눈에 힘을 주고 윤태희를 바라볼 때였다.

“네, 부장님도 예전에 그러셨잖아요. 옛날에 제가 처음으로 입청했을 때 기억 안 나세요? 저도 시험장에서 싸움 났었잖아요. 그때 저 입술 터진 거 보고 부장님이 그 새끼 찾아가서 팔 부러트리셨잖아요. 저야 약과죠.”

“…….”

석주련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만히 과거를 되짚어 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조용해진 석주련을 바라보던 윤태희가 보란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쵸? 묻는 눈빛이다.

“저도 부장님 보고 배운 거예요.”

“…배울 게 없어서 그런 걸 배워?”

윤태희 역시 추천 입청자였다. 그리고 윤태희를 추천한 사람은 석주련이었다. 빙그레 웃고 있는 윤태희를 향해 석주련이 짧게 핀잔을 주었다.

“이 자식아, 지금 웃음이 나오지?”

하는 수 없이 석주련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언제는 웃고 다니라고 하셨으면서.”

“뭐?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네, 처음 만났을 때 그러셨잖아요.”

윤태희가 데스크 위로 편하게 턱을 괴며 말했다.

“너는 눈에 칼이 들었구나, 라고 하셨죠.”

석주련이 윤태희를 처음 만났던 것은 10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길에서 만난 윤태희는 출생 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은 부랑아였다. 이후 집으로 데려와 3년을 함께 살았고 이제는 완전히 장성하여 떨어져 산 시간이 훨씬 길었다.

“칼은 눈이 아니라 뱃속에 숨기는 거라고.”

나직한 말에 석주련이 눈을 가늘게 좁혀 뜰 때였다. 턱을 괴고 석주련을 바라보던 윤태희가 서서히 미소를 지웠다. 석주련은 어느새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윤태희의 얼굴을 응시했다. 낯선 듯, 기시감이 느껴졌다.

마침내 이를 데 없이 무표정한 낯으로, 윤태희가 물었다.

“어때요, 지금도 눈에 칼이 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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