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90)화 (90/348)

#90

다음 날 점심, 재겸은 슈트를 입고 대문을 나섰다.

약속한 시각에 맞춰 나가니 어제 탔던 검은색 세단이 눈에 띄었다. 시동이 꺼진 것을 보니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대문 계단을 내려오던 재겸이 윤태희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윤태희는 운전석이 아니라 차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검은색 슈트를 빼입은 윤태희는 담벼락에 등을 살짝 기대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윤태희가 고개를 돌렸다.

“어… 안녕.”

윤태희가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동시에 곧바로 들고 있던 담배를 휙 내버렸다. 재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윤태희는 정장 차림의 재겸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재겸은 어제 시착한 남색 정장을 입었다.

윤태희가 슬쩍 질문을 했다.

“넥타이 네가 맸어?”

재겸이 계단을 완전히 내려왔다.

“아니, 정주가.”

윤태희가 눈짓을 했다.

“차 문 열려 있어. 먼저 타.”

“넌? 안 타? 왜 그러고 있어?”

재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바로 타면 담배 냄새 나니까.”

윤태희가 얼굴 근처로 손을 들어 올리더니 휘휘, 가볍게 손짓을 했다. 재겸은 별말 않고 차로 걸어갔다. 재겸이 조수석에 앉은 지 몇 분이 지나서야 운전석 문이 열렸다. 윤태희가 운전석에 올라타자 차체가 기우뚱하는 게 느껴졌다. 담배 냄새는커녕 예의 그 향수 냄새만 풍겨 왔다.

윤태희가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차가 부드럽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차 안이 몹시도 조용했다. 어색하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윤태희는 오늘따라 차분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재겸이 눈동자를 움직였다. 운전하는 윤태희의 옆얼굴이 보였다.

오늘도 머리를 올렸네….

“왜?”

시선을 느꼈는지, 윤태희가 전방을 주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재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수석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괜히 바깥을 구경하는 척했다. 어쩐지 훔쳐본 것 같은 느낌이라 재겸이 모른 척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오랭테이션 하러 가죠.”

재겸이 조수석 창문에 이마를 붙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거를 어디 가서 하느냐고.”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하던 윤태희가 조수석 창문을 반쯤 내렸다. 창문이 내려가자 이마를 대고 있던 재겸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물렸다. 그러자 핸들을 쥐고 있던 윤태희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옅게 웃었다.

“야. 놀랐잖아.”

재겸이 훽, 고개를 돌려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창문을 왜 열어?”

“날씨가 좋아서요.”

윤태희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재겸이 불퉁한 낯으로 다시 창문에 시선을 돌렸다. 날씨가 좋긴 했다. 하늘은 쾌청하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열린 창문 틈으로 밀려든 바람에 재겸의 앞머리가 가볍게 나부꼈다. 풍경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때, 다시 창문이 쑥 올라갔다.

“…….”

재겸이 샐쭉 눈을 치켜떴다. 이번에야말로 윤태희가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재겸이 다시 고개를 돌려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장난치지 마.”

때마침 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다. 이번엔 운전석과 조수석의 창문이 동시에 끝까지 내려갔다. 내내 전방을 주시하던 윤태희가 운전석 창문 턱에 한쪽 팔을 걸치더니 고개를 돌려 재겸을 보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밖에만 보지 말고, 나도 좀 봐.”

뻔뻔한 대답에 재겸이 눈을 느리게 떴다.

“내가 널 왜 보고 있어야 되는데?”

윤태희가 손끝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수석님 운전 잘하나 구경도 하고, 신호는 잘 지키나 감시도 하고, 어디가 잘생겼나 얼굴 감상도 좀 하고… 그럼 아까는 나 왜 보고 있었어?”

“…….”

재겸이 창문 쪽으로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거는… 그거는 그냥 어쩌다 한 번 본 거야.”

윤태희가 말없이 픽, 웃으며 기어를 바꿨다.

다시 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

“오랭테이션은? 여긴 식당이잖아.”

윤태희의 차가 멈춰 선 곳은 규모가 제법 큰 한식당의 주차장이었다. 한옥으로 된 외관에, 커다란 독채로 이루어진 건물 간판에는 한자로 ‘은월당’이라고 쓰여 있었다. 윤태희가 주차 브레이크를 채우며 가볍게 말했다.

“오랭테이션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을 아시는지.”

왠지 속았다는 느낌이 든다. 대체 오랭테이션을 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기에 굳이 점심부터 만나자고 하는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윤태희가 차에서 내리며 뻔뻔하게 선수를 쳤다.

“이 기회에 은근슬쩍 겸상하려고.”

약았네. 재겸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식당 입구에 들어서자 직원 한 명이 다가와 예약 여부를 물었다. 두 사람은 2층으로 안내를 받았다. 2층으로 올라오니 개별적으로 공간이 나뉘여 있었다. 직원이 미닫이문을 열자 2인실로 된 널찍한 마루방이 나왔다.

윤태희가 먼저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에 재겸도 밍기적거리며 구두를 벗었다. 윤태희와 재겸은 커다란 좌식 테이블을 사이에 마주 앉았다. 창가에서 볕이 쏟아졌다. 음식은 윤태희가 제멋대로 주문을 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윤태희는 슈트 재킷을 벗고 물수건으로 손을 꼼꼼히 닦았다. 멀뚱히 앉아 주변을 둘러보던 재겸도 윤태희를 따라서 재킷을 벗고 물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고즈넉했다.

“혹시 외식하는 거 처음이야?”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해.”

재겸의 대답에 윤태희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1년에 한, 두 번? 정주 생일이나….”

평소엔 집 밖을 나서기 싫어하는 재겸이었다. 하지만 정주 생일은 날이 날이니만큼, 재겸은 정주가 하자는 대로 한 수 물러 주곤 했다. 언젠가부터 그날 하루만큼은 셋이 함께 외출을 하는 날로 자연스럽게 굳어 있었다. 낯선 인간을 무서워하는 메산이의 손을 하나씩 나누어 잡고, 정주가 직접 예약한 근사한 식당으로 가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윤태희가 턱을 괴며 물었다.

“그럼 네 생일에는?”

“나 생일 모르는데.”

“왜?”

“알려 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재겸이 물수건을 접으며 대꾸했다.

“나랑 똑같네.”

윤태희가 차를 따르며 말했다. 그에 재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윤태희도 나처럼 천애 고아라는 얘기인가? 가족이 몰살당해서 복수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재겸이 의아한 눈빛을 했다. 그에 윤태희가 눈치 좋게 의문을 읽어 내고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굳이 혈연이 아니라도 가족이 될 수 있으니까.”

그건 그랬다. 아무리 핏줄이라고 한들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 반대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거다. 내 곁에 정주와 메산이가 있듯이… 윤태희에게도 한때 가족처럼 생각했던 이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재겸이 불쑥 물었다.

“그럼 너 원래 부모 없어?”

화끈한 질문에 윤태희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응. 없어.” 윤태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재겸의 앞에 차를 놔 줬다. 구수한 내음이 올라왔다. 어쩌면 숙연해질 법한 화제였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같았다.

그때, 윤태희가 따듯한 잔을 감싸 쥐며 말했다.

“그럼 내 생일은 오늘로 해야겠다.”

왜? 재겸이 녹차를 홀짝거리며 무심히 물었다.

“네가 나랑 외식해 주니까.”

윤태희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찻잔을 쥔 재겸의 손이 짧게 흔들렸다. 윤태희가 고개를 기울이며 장난기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올해는 오늘로 해야지.”

“…….”

차 안에서처럼, 재겸의 시선이 창문으로 달아났다.

직원이 미닫이문을 노크했다.

“실례합니다.”

먼저 애피타이저로 죽이 나왔다. 직원이 쟁반에 받친 작은 그릇을 각자의 앞에 하나씩 놔 주며, 이건 잣죽이라고 설명을 해 주었다. 재겸은 죽그릇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직원이 나가자마자 재겸이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무슨 죽을 닭 모이처럼 주네.”

윤태희는 하마터면 수저를 떨어트릴 뻔했다.

“죽은 금방 꺼져서 한 사발은 먹어야 되는데 이걸 누구 코에 붙여. 요즘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인정이 없냐? 이것만 먹고 어떻게 기운을 쓰라고.”

재겸이 벌컥 화를 냈다. 그에 윤태희는 차분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잠시 창문을 내다보는 척을 했다. 턱을 괸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거 다 먹으면 또 나와.”

“뭐? 또 나온다고?”

“응. 코스로 시켰으니까.”

“코스가 뭐야.”

“줄줄이 음식을 갖다 준다는 뜻이에요.”

“아아….”

눈높이를 맞춘 세심한 설명에, 재겸이 안심하며 수저를 들어 올렸다.

이후 윤태희의 말대로 다양한 음식들이 줄줄이 대령되었다. 샐러드와 묵사발, 시원한 냉채와 삼삼한 모듬 전, 입맛대로 채소를 넣어 먹는 구절판, 부드러운 흰 살 생선으로 튀긴 강정, 뜨끈한 육수로 끓인 신선로, 낙지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 있는 달큰한 갈비찜까지. 재겸은 모든 음식을 아주 맛있게, 열심히 먹었다. 어찌나 잘 먹는지 보는 사람까지 뿌듯할 정도였다.

“맛있어?”

재겸이 젓가락을 놀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는 왜 안 먹어?”

재겸이 물었다. 어느 순간부터 윤태희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홀린 듯이 재겸이 먹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평소 군것질을 즐기는 윤태희는 원래 입이 짧은 편이기도 했고, 윤태희가 좋아하는 음식은 피자, 파스타, 햄버거와 같은 종류들이었다. 한식을 고른 것은 순전히 재겸 때문이었다.

“나는 다 먹었어, 너 먹어.”

윤태희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야, 먹을 거 남기면 벌 받어.”

그리고 이 많은 걸 나 혼자 어떻게 먹냐? 무엇보다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거 나랏님 밥상이야. 예전 같으면 이거 못 먹었다고. 지금은 세상 좋아져서 돈 쥐어 주고 이렇게 먹는 거지. 어? 너 옛날 같았어 봐라!

“…….”

차를 삼키던 윤태희가 작게 기침을 뱉었다.

여태껏 살면서 왕년을 운운하는 잔소리는 많이 들어 봤지만, 나랏님 밥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건 처음이다.

삐뚤빼뚤한 앞머리를 한 앳된 얼굴의 꼰대는 어느새 수저까지 휘둘러 가며 밥상머리 훈수를 두고 있었다. 재겸은 신선로를 가리키며 “이게 궁궐에서 먹던 거다, 아느냐.” 했다. 윤태희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컵을 놓았다. 등받이에서 허리를 바르게 펴고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아, 제가 또. 그걸 몰랐네요.”

“요즘은 먹을 게 넘쳐나서, 어?”

윤태희가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제가 참 송구하고….”

장난기가 솟아나 무릎이라도 꿇어 볼까 잠시 고민도 했으나 그랬다간 틀림없이 놀리는 줄 눈치채고 머리통을 때릴 게 뻔했으므로, 까마득히 어린 연하는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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