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사고라니, 무슨 사고?”
윤태희는 말없이 느슨하게 턱을 괴더니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단정한 손끝이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부적부 나자가 목패를 훔치려고 했던 사건이야.”
바야흐로 30년도 더 된 오래된 일이었다. 나자들 사이에선 유명한 일화였다.
“옛날에 명부실 앞을 지키던 부적부 나자가 있었어. 그런데 그 나자는 동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 아마도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동료에게 저주를 걸고 싶었던 모양이야. 그러다보니 같은 나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계약부터 풀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경비를 서는 사람이니 명부실 안에 몰래 들어가는 것쯤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적부 나자가 자신의 목패에 손을 대는 순간, 목패가 한순간에 화르륵 불타오르며 그와 동시에 몸에서도 불꽃이 일었다는 것이다.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지자 다른 나자들이 달려와 사태 파악에 나섰는데, 그 광경이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던 재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됐대? 죽었대?”
윤태희는 잠시 말이 없다가,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죽었어.”
“그럼 이제 명부실 앞은 누가 지키고 있는데?”
“석상.”
석상? 재겸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사고 이후로, 부적부에선 사람을 믿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을 거야. 그래서 사람을 대신해 석상 하나를 세워 놨는데, 그 석상 안에는 믿음직스러운 파수꾼이 살고 있지. 서기가 직접 주술로 만들어 낸 백호야.”
재겸의 눈썹 한쪽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그 백호가 명부실을 지킨다는 거야?”
“그래. 아주 충성심이 강한 녀석이야.”
차라리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면 뚫기가 훨씬 편했을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 으레 그렇듯 구슬리든, 속아 넘기든,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테니. 하지만 주술로 만들어 낸 백호에겐 이런 수법이 통하지 않는다. 오직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적만을 수행한다.
“백호에겐 주문이 걸려 있어. 명부실 서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곳에 들어가려고 하면 그 즉시 물어 죽일 것. 가끔 운이 나쁘면 그 앞을 지나기만 해도 침입자로 인식하고, 석상에서 튀어나와 공격을 하는 경우도 있어.”
윤태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재겸이 말을 툭, 뱉었다.
“그럼 둘 중 하나겠네. 술자를 없애거나, 석상을 없애거나.”
윤태희는 마주 앉은 재겸의 이목구비를 지긋한 시선으로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까 목패 얘기를 꺼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재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눈에 뻔히 보여, 그 정도는.”
그야, 내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재겸의 지적은 이번에도 정확했다. 진짜 호랑이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공격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성가신 호랑이를 상대하는 방법은 술자를 쓰러트리는 것이다. 술자가 의식불명에 빠지면 주술은 저절로 풀린다. 또 다른 방법은 주술을 걸어 둔 본체(本體)를 없애는 것이다. 석상 안에서 호랑이가 나온다고 했으니 본체는 보나마나 석상일 것이고.
세월에 무뎌진 것처럼 권태로운 얼굴을 한 소년은 때때로 서슬 퍼런 날붙이처럼 이채를 띤다. 그때마다 윤태희는 마음 한 구석을 후려치는 듯한 아찔한 타격감을 느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윤태희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
“…우리가 노리는 건 석상. 주술의 본체야.”
얼마간 뜸을 들이던 윤태희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돌렸다.
“술자는 명부실 서기, 옥례 씨인데… 같은 나자를 공격하는 건 계약을 위반하는 일이니 부담이 커. 저번처럼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실토해 버리는 셈이라.”
재겸은 이번에도 흔들림 없이 말을 받아쳤다.
“근데 그건 석상을 없애도 마찬가지잖아. 본체가 망가지면 주술을 행한 술자는 그걸 알 수 있어. 침입자가 있다는 걸 눈치챌 텐데, 어떡하려고?”
재겸은 이 바닥에 관해선 그 누구보다도 해박했다. 살아온 세월이 유구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윤태희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입을 열었다.
“맞아, 결국은 어떻게 해도 술자인 옥례 씨는 명부실에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본체가 망가진 걸 안 순간, 곧바로 명부실로 달려오겠지?”
윤태희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근데 이를 어쩌죠, 도무지 달려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옥례 씨는 지금 나례청에 없거든. 앞으로도 두 달 동안은.”
서기가 없다고? 재겸이 눈썹을 모았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는데?”
“옥례 씨는 올해로 79세야.”
일흔아홉 살이라고? 재겸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내일모레 팔순 잔치하겠네. 근데 그게 뭔 상관인데?”
옥례 씨는 젊었을 적에 출가를 하여 불법을 닦던 스님이었다. 그러나 술과 놀음에 빠졌던 탓에 몸담았던 절에서 파문을 당하고 말았다. 하여 속세로 돌아온 옥례 씨는 나례청에 발을 들였다. 옥례 씨는 본래 성격이 괴팍한 데다가 고집이 세서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는데, 특히나 행동에 별난 구석이 많아 나례청 안에서도 기인(奇人) 취급을 받았다.
옥례 씨는 누가 할머니라고 부르면 불같이 화를 냈다. ‘이눔아! 결혼도 안 했는데 내가 왜 느그 할머니냐!’ 하며 지팡이로 두들겨 패고 다녔다. 그리고 낮이고 밤이고 항상 새까만 선글라스를 착용했으며, 계절과는 상관없이 두꺼운 스카프를 두르고 다녔다. 그러나 부처의 가르침에는 꽤나 신실했는지 혼잣말로 불경을 좔좔 읊고 다녀서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옥례 씨는 아홉수에 굉장히 집착을 하는 사람이거든.”
아홉수가 들면 그 해는 운세가 나쁘고 액이 깃든다 하여, 옥례 씨는 아홉수가 돌아올 때마다 음력 4월부터 7월까지 석 달간 산속의 암자로 피신을 가곤 했다. 안거(安居)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올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옥례 씨는 지금쯤 어디 산골짜기에 들어가 있을 거야. 석상이 망가졌다는 걸 알아차려도 직접 오진 못할 거고. 대신에 본청에 연락을 해서 그 사실을 알리겠지. 연락을 받은 나자들이 명부실로 달려왔을 땐….”
윤태희의 뺨에 옅은 볼우물이 피어났다.
“안타깝게도, 범인은 유유히 사건 현장을 빠져나간 뒤겠지?”
석상을 망가트려 파수꾼을 치운다. 연락을 받고 나자들이 도착하기까지 최소 몇 분 남짓한 시간이 걸리고, 그 틈에 명부실로 침입해 목패를 빼돌린다.
명부실에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본청에서는 목패의 신변부터 확인할 테지만, 제 이름이 적힌 목패가 사라진 자리에는 감쪽같이 가짜 목패가 달려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오기 위한 윤태희의 계획이었다.
목패가 수중에 들어오더라도 곧바로 계약을 파훼하진 않을 것이다. 그랬다간, 석상과 마찬가지로 술자인 옥례 씨가 눈치를 챌 테니까. 윤태희는 나례청에 쳐들어가기 바로 직전의 순간에 계약을 깰 생각이었다. 본청에서 반역자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땐 이미 한발 늦었을 거다.
그때는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을 테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목패를 훔치고 나면 본청이 발칵 뒤집어질 거야. 침입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대대적인 색출을 시작하겠지. 옥례 씨의 석상을 없앨 정도라면 강한 힘을 지녔다는 얘기니까. 아마 축역부 나자들 대다수가 첫 번째 용의선상에 오를 거야. 너도, 그리고 나 역시도.”
잠시 말을 멈춘 윤태희가 재겸과 눈을 맞췄다.
“그러니 바깥에선 힘을 적당히 숨겨 줬으면 해. 당연히 팀원들 앞에서도. 일개 수습 나자가 팀의 수석보다도 강하다면 어딜 봐도 이상하니까.”
윤태희의 당부에 재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중에 의심을 피하려면 지금부터 미리 신임을 쌓아 두는 게 좋겠어. 나례청을 위해 충성하고 희생하는 척, 흉내를 내는 거야. 그러니까 당분간은 축역부 나자로서 사건을 해결하고 성과를 올리는 데 집중해 줘. 목패를 뺏는 날짜는 미정인데 6월 말 이후가 될 거야.”
재겸은 눈앞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느샌가 웃음기가 사라진 눈매는 서늘하고도 날카로워 보였다. 이후의 계획을 논하는 데 완벽히 몰두한 모습이었다. 윤태희는 대체 언제부터 이 모든 정보를 수집해 왔으며, 얼마나 공을 들여서 여기까지 탑을 쌓아 온 걸까.
언젠가, 도서실에서 느긋한 자세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윤태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윤태희는 같은 책을 몇 번이고 읽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윤태희는 이미 수없이 읽은 문장을 들여다보며 대체 뭘 찾고 있었던 걸까? 너는 정말로 그때 책을 읽고 있었을까? 윤태희가 그곳에 앉아 있던 것도, 책을 읽고 있던 것도, 그 모든 것들이 나례청을 부수기 위한 조각 중 하나였다.
“너….”
한참 만에 재겸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럼 10년을 기다린 거야?”
명부실 서기가 자리를 비우는, 아홉수가 돌아오기까지.
“응.”
윤태희는 턱을 괴고 눈앞의 소년을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아 내는 재겸의 마음속에서 묘한 두근거림이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윤태희가 견뎌 낸 10년의 기다림, 그 끝에는 내가 있다. 내 손에 너의 10년이 있다.
재겸은 아찔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