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싸장냄! 저희 주문할게요!”
강이빈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쩌렁쩌렁 말했다. 손님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목소리가 우렁찼다. 깜짝아. 시큰둥한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재겸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대각선에 있던 윤태희가 그걸 보고 조그맣게 웃었다. 살짝 머쓱해진 재겸이 눈을 피했다.
“싸장냄, 우선 소주 빨간 걸로 두 병씩 주시고요, 맥주는 뭐 뭐 있어요?”
강이빈이 다가온 직원을 향해 손을 파닥거렸다. 강이빈은 한껏 들뜬 기색이었다. 그에 메뉴판을 보고 있던 표지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했다.
“저, 이빈아. 순서상 고기부터 주문하는 게 맞지 않을까.”
“목마르니까 일단 목구멍부터 시원하게 적시고 시작하자.”
팀원들은 어느 순간부터 직급에 관계 없이 편하게 말을 놨다. 현장에서와는 달리 사석으로 취급되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팀원 간의 친분이 깊었다.
“아오. 수석님, 저 미친 아이 좀 말려 주세요.”
표지호가 두려움에 물든 얼굴로 고자질을 했다. 넥타이를 벗고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던 윤태희가 흐, 웃음을 흘렸다. 팀원들은 서로 말을 놓는 와중에도 윤태희에게만은 여전히 경칭을 썼다. 그건 윤태희도 마찬가지였다.
윤태희는 위계질서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팀원들이 상관인 윤태희와 격의 없이 지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윤태희는 상하관계를 떠나 팀원들을 같은 동료로서 대했다. 보스가 아니라 리더로서 팀원들과 한데 어울렸다. 대신 사적인 영역에선 확실하게 선을 긋는 편이었다.
불필요한 위계는 세우지 않는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거리를 좁히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팀원들과 친밀한 동료 관계로 지내지만 딱 거기까지다. 윤태희는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했다. 오늘과 같은 회식 자리가 아니라면 팀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강 주임님, 오늘 달리시는 건가요?”
마침내 슈트 재킷까지 벗고, 셔츠 한 벌 차림이 된 윤태희가 장난스레 물었다. 벗어 던진 넥타이는 재킷 주머니에 성의 없이 구겨 넣은 뒤였다.
“그럼요! 막내가 왔으니까 달려야죠.”
강이빈의 호기로운 선언에, 팀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머지않아 선홍빛 생고기와 여러 밑반찬, 다양한 쌈 채소들이 세팅되었다. 강이빈이 주문한 술도 테이블 한쪽을 당당히 차지했다. 강이빈은 숟가락으로 맥주병 뚜껑을 뻥, 날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팀원들이 환호를 하며 신나게 박수를 쳤다. 벌써부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팀원들은 소주 파와 맥주 파, 그리고 소맥 파로 나뉘어 각자 취향껏 주종을 골랐다.
그리고 윤태희는 오늘도 변함없이 독자적인 노선을 택했다. 맥주잔에 파인애플 맛 탄산을 콸콸 따르자, 팀원들은 익히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수석님은 환쏘지.”
표지호가 살뜰하게 소주병을 들이밀었다. 반절쯤 탄산을 채운 뒤 나머지는 소주로 꽉 채웠다. 달달한 것을 좋아하는 윤태희는 술을 마실 때마다 탄산을 섞어 마시곤 했다.
그사이, 재겸은 입을 벌린 채 불판 위로 고기가 익어 가는 광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익었으면 좋겠다, 라고 얼굴에 써있는 것 같았다. 그걸 본 윤태희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우리 수습님,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팀원들의 이목이 우르르 쏠렸다. 팀원들이 흐뭇한 시선으로 막내를 바라보았다. 재겸은 멋쩍은 표정으로 딴청을 피웠다. 그때, 표지호가 대뜸 빈 맥주잔을 건넸다. 가만히 눈을 굴리고 있던 재겸이 얼떨결에 잔을 받아들었다. 표지호가 뚱뚱한 갈색 병을 스리슬쩍 들이밀었다.
“자, 우리 막내도 한 잔 해야지.”
표지호가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은근슬쩍 술을 제안했다. 그러자 강이빈이 대번에 낯을 굳혔다. 또래의 동생이 있는 강이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표지호의 손을 밀쳤다.
“자라나는 청소년한테 뭐 하는 거야?”
그러나 표지호는 강이빈의 핀잔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금 맥주병을 내밀었다.
“맥주 한 잔 정도는 괜찮아. 어른이 주는 건 마셔도 돼.”
“야, 어른이 어른다워야 어른이지. 참 좋은 거 가르친다.”
“에이, 솔직히 청소년기에 술 한 번씩 먹어 봤음서.”
“아무튼 안 돼. 절대 안 돼. 재겸이! 환타나 마셔.”
풋내 나는 어른들의 우스꽝스러운 실랑이가 이어졌다.
“…….”
재겸은 벽에 붙은 메뉴판을 읽었다. 소갈비살. 차돌박이. 꽃등심. 차돌 된장찌개….
“그, 어디 외국에서는 열여섯 살 때부터 술 마신다던데 하여튼 우리 나라만 이렇게 빡빡하다니까. 어? 고작 맥주 한 잔 가지고, 에휴. 이게 나라냐고….”
표지호가 한탄을 했다. 표지호의 옆에 앉은 윤태희는 재겸에게 술을 줄 것이냐, 탄산을 줄 것이냐 하는 문제에 딱히 끼어들 생각이 없어보였다. 다리를 꼬고 앉아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게 공무원이 할 말이야? 나라의 녹봉을 받는다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면 되겠어? 너 예전 같았으면 바로 모가지야, 벌써 능지처참 예약이다.”
강이빈이 눈을 부라리며 표지호의 목뒤에 당수를 날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표지호가 아차차, 안색을 싹 바꾸더니 냉큼 거수경례를 해 보였다.
“앗. 죄송. 돈 주면 애국해야지. 충성.”
피식, 재겸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행동이 이를 데 없이 넉살맞고 우스꽝스러워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턱을 괴고 있던 윤태희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맞물리자 윤태희의 눈매가 반달처럼 이지러졌다.
“…….”
괜히 민망해진 재겸은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시늉을 했다. 둘의 투닥거림을 관전하던 팀원들도 웃겨 죽겠다면서 박장대소를 했다.
결국 재겸의 잔은 환타로 채워졌다. 그닥 술을 즐기지 않는 재겸으로선 딱히 아쉽지 않았다. 술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나 까짓것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이었다. 마시더라도 막걸리나 동동주 같은 탁주가 좋지, 현대식 소주나 맥주는 먹어 본 적이 없어서 심드렁했다.
“잔도 다 채웠으니 건배부터 할까요?”
강이빈이 손뼉을 짝, 마주치며 쾌활하게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자자, 집중! 수석님께서 한 말씀 해 주신답니다!”
강이빈의 능청스러운 진행에 팀원들이 옳다구나 박수를 쳤다. 다리를 꼬고 나른하게 앉아 있던 윤태희가 “나?” 하며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켰다.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짓던 윤태희가 이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접 나서진 않을지언정 딱히 빼지는 않았다. 재겸은 그런 윤태희의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윤태희는 한쪽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느슨하게 섰다.
“내가 자리를 잠시 비워서, 나 없는 동안 다들 고생 많았고….”
윤태희가 팀원 한 명 한 명에게 시선을 맞추며 격려의 말을 이어 나갔다. 팀원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다정했다. 팀원들이 하나둘씩 잔을 들었다. 재겸도 눈치를 보다가 쭈뼛쭈뼛 잔을 들었다. 재겸에게 이르러 윤태희의 시선이 멈췄다.
“마지막으로… 우리 수습님 새로 오셨는데.”
윤태희의 뺨에 선명한 볼우물이 피어났다.
“귀하게 모신 분이니 귀하게 대해 주세요.”
짧지만 강렬한 끝맺음이었다. 재겸이 눈이 빠르게 나풀거렸다. 귀한 아이야. 문득 오래전에 들었던 빛바랜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 위로 윤태희의 목소리가 겹치는 듯했다.
아, 귀하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한 명 더 있구나….
“자, 그럼….”
윤태희가 웃으며 잔을 들었다.
우리의 건승을, 위하여!
나자들이 복창하며 건배를 했다. 타이밍을 놓친 재겸의 손이 어물어물 허공을 배회했다. 그걸 본 윤태희가 팔을 뻗어 잔을 톡 부딪쳐 주었다. 그러자 곳곳에서 잔이 다가왔다. 몇 번이고 사소한 건배가 이어졌다. 유리잔이 닿을 때마다 달각, 청명한 울림이 퍼졌다.
윤태희를 비롯해 나자들이 잔을 비우는 것을 바라보다가, 재겸은 살짝 상기된 뺨을 문질렀다. 문득 손에 든 잔을 내려다보았다. 건배의 여운으로 파동이 남아 표면이 흔들리고 있었다.
“…….”
망설이던 재겸은 환타를 한 모금 마셨다. 청량한 탄산이 목을 타고 퍼져나갔다. 가슴 한구석이 톡톡 튀어 올랐다. 아릿하고 따끔따끔한 느낌은 설렘과 비슷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난생처음 시험도 보고, 백화점 가서 옷도 사고, 나랏님 밥상도 받아 보고, 티비에서만 보던 것처럼 다 같이 모여 회식도 한다. 요사이 처음 해 보는 게 많아서, 매일매일이 신기하고 어색했다. 어쩌면 들떴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위하여 이곳에 있는지 잊지 말자.
우리의 건승. 윤태희와 나의 건승(健勝). 나례청을 부수기 위하여, 그래서 이곳에 있는 거다. 별생각 없이 잔을 부딪치긴 했지만, 계획을 위해 잠시 어울리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전부 없던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