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어느덧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었다.
팀원들은 가볍게 술을 곁들이며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재겸은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병풍처럼 앉아 있었는데, 팀원들은 그런 재겸에게 따스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 어색함을 풀어 주고 싶었는지 이따금 시시콜콜한 질문과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팀원들 모두가 재겸을 세심히 챙겼다.
고기가 익으면 제일 먼저 재겸의 접시에 옮겨 담아 주었고, 멀찍이 떨어진 반찬에 손을 뻗을 때면 그릇을 가까이 밀어 주기도 했다. 새로 온 신입을 위한 면신례 자리인 만큼,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단연 재겸이었다.
하지만 재겸은 팀원들의 살가운 태도가 영 낯간지럽고 쑥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일부러 먹는 것에만 집중을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재겸은 조용히, 그리고 아주 열심히 고기를 먹었다. 푸짐하게 쌈도 싸서 먹어 보고, 기름 장에 찍어서 먹기도 하고, 개운하게 음료수도 들이켰다.
이쯤 되니 배가 불렀다.
더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재겸은 퍽 만족스러운 기분이 되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휴, 숨을 내쉬며 허리를 바르게 폈다. 문득 대각선 방향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런데 윤태희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뭐야, 어디 갔어? 아까만 해도 있었는데.
먹느라 열중해서 자리를 비운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윤태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가게 안은 적당히 손님이 빠져서 널널했다.
“재겸이, 왜? 뭐 더 시켜 줄까?”
강이빈의 물음에 재겸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쑤석님….”
“아, 수석님 어디 가셨냐고?”
뒷말을 잇지 않았음에도 강이빈은 재겸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아까 전에 전화 받는다고 밖에 잠깐 나가셨어.”
“그러고 보니 좀 늦으시네….”
표지호가 상체를 쭉 빼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본청에서 호출 떨어진 건 아니겠지?”
강이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표지호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설마! 안 돼! 그럼 계산은 누가 해!”
표지호는 재겸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막내, 밖에 수석님 계시나 한 번 보고 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멀뚱히 앉아 있던 재겸이 쭈뼛쭈뼛 몸을 일으켰다.
재겸은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내내 불 앞에 있었더니 바깥 공기가 아주 시원하게 느껴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골목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나 술에 거나하게 취한 직장인들이 흥얼거리며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가는 모습만 눈에 들어올 뿐, 어디에도 윤태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홀라당 어디로 사라진 거야? 재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흠… 그럼 계산은 내가 해야 되나….
그렇게 생각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건물 모퉁이 쪽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어?” 재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태희가 턱이 낮은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묻고 있었다.
“야.”
재겸의 목소리에 윤태희가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멀찍이 시선이 마주쳤다. 윤태희는 눈을 설핏 좁혀 뜨더니, 한동안 재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 이게 누구지….”
한참 만에야 윤태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평소에 비해 묘하게 늘어지는 말투였다. 재겸이 멀뚱멀뚱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왜 저러고 있어? 재킷 없이 흰 셔츠만 입은 윤태희는 무릎에 팔을 걸치고 느슨하게 앉아 있었다.
“뭐야, 너 취했어?”
재겸이 한 발자국 성큼 다가갈 때였다. “오지 마.” 윤태희가 조용히 말했다. “왜?” 재겸이 멈칫하며 묻자, 윤태희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담배 방금 껐어.”
냄새가 나니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딱히 상관없는데.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재겸은 성큼성큼 윤태희에게 다가갔다. 윤태희는 별말이 없었다. 대신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재겸은 윤태희의 옆으로 가 쪼그려 앉았다.
“왜 나왔어?”
윤태희의 질문에 재겸이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더워서.”
표주박인지 표지판인지가 너 돈 안 내고 튀었을까 봐 잡아 오랬어, 라고 사실대로 말할까 하다가 그냥 대충 핑계를 댔다. 따지고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가게 안은 은근한 열기가 가득하여 영 답답했으니까.
“너는 왜 이러고 있어?”
넥타이 매듭을 잡아당기던 재겸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
윤태희는 걸친 팔 위에 뺨을 기댄 채, 재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원래 그렇게 잘 먹나?”
“뭐?”
“되게 맛있게 먹던데….”
윤태희는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자꾸만 딴소리를 했다.
뭐야, 얘 진짜 취했나?
재겸은 긴가민가, 미심쩍은 눈길로 윤태희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취한 사람치고는 발음도 또렷하고 자세도 반듯한 것 같은데… 평소와 다르게 어딘지 미묘한 모습이었다.
“그야 맛있으니까.”
뒤늦게 건넨 대답에 윤태희가 픽 웃었다. 한쪽 뺨에 볼우물이 쏙 패였다. 고개를 숙인 채 구두끈을 만지던 재겸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넌 별로 안 먹는 것 같던데.”
“그런가? 나도 많이 먹었어.”
재겸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게? 너 원래 뱃구레가 작냐?”
뱃구레… 윤태희가 팔에 이마를 묻고 큭큭 웃었다.
“그렇게 먹어서 어떻게 힘을 쓰냐?”
“우리 각시가 또 나를 걱정해 주네.”
“…….”
재겸이 사납게 눈을 흘겼다. 또 지랄이네... 백번 양보해서 현장에서야 그렇다고 치지만, 지금은 탈도 안 썼는데 각시라는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어.”
재겸이 까칠하게 받아치자, 윤태희가 팔 위에 턱을 얹었다.
“왜? 나는 각시라고 부르는 거 좋은데.”
“그렇게 좋으면 너나 해. 탈 바꿔.”
재겸이 인상을 구기며 쏘아붙였다.
“안 돼… 넌 각시고, 난 이매야.”
윤태희가 빙그레 웃는가 싶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거 알아? 이매는 선비의 하인이야.”
탈놀이에서 이매는, 자존심 세고 거만한 선비의 하인 노릇을 한다. 속도 없이 언제나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이매는 하찮기 그지없다. 행동거지가 순진하고 아둔하여 항상 남에게 당하기만 하는 인물이 바로 이매다.
“이매는 신분상으로 천민이 아니라 양인(良人)이야. 마음만 먹으면 선비의 곁을 떠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어. 근데… 이매는 도통 벗어날 생각을 하질 않아. 뭐가 그리 좋은지 웃고 다니기만 하고, 사람들은 그런 이매를 손가락질 하지, 어리석고 바보같다고.”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재겸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윤태희는 취한 게 맞는 것 같다. 평소에 비해 분위기가 훨씬 조용하고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이매가 그렇게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인물이라면, 윤태희는 어째서 그런 이매탈을 고집하고 있는 걸까. 나한테는 귀한 각시탈을 골라 줘 놓고….
“근데 나는 알 것 같아, 이매가 왜 그랬는지…”
윤태희는 마치 재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불쑥 입을 열었다. 팔에 얼굴을 묻고 있던 윤태희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더니, 재겸을 빤히 바라보았다. 앞머리가 눈매 근처로 느슨히 흘러내렸다. 살짝 컬이 진 머리칼 사이로, 서늘한 밤공기를 닮은 차가운 눈동자가 보였다.
이매는 어째서 선비의 곁을 벗어나지 않는가.
“사실은, 전부 이매한테 속고 있는 게 아닐까?”
윤태희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매는 선비한테 복수를 하고 싶은 거야.”
선비를 제 손으로 죽이기 위해, 이매는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일부러 바보 흉내를 내며 모두를 속이고 있는 거다. 거만하고 고고한 선비는 이매의 품속에 비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를 것이다.
“어리석고 우매한 건, 이매의 웃는 얼굴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이고.”
귀를 기울이던 재겸은 윤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탈에 관하여 대화를 하고 있건만, 윤태희의 말은 어딘지 의미심장했다. 윤태희는 새로운 관점으로 이매를 해석했다.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면서도, 마치 본인을 빗대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곰곰이 이야기를 되짚어보던 재겸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선비한테 복수를 하고 나면?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데?”
“글쎄. 그건 생각 안 해 봤네. 어떻게 되려나….”
윤태희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소리 없이 웃더니, 걸친 팔에 뺨을 기댔다.
“…….”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한참을 침묵하던 윤태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각시랑 도망갈까….”
시선이 정확히 맞물렸다. 그제서야 재겸은 확신할 수 있었다. 윤태희는 취한 게 맞았다. 가만히 재겸의 얼굴을 바라보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재겸은 윤태희가 고요하게 가라앉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늘은 까맣고, 밤공기는 서늘하고, 어디선가 바람이 부는 듯했다. 바람결에 윤태희의 잔향이 희미하게 섞인 것 같기도 했다. 윤태희의 앞머리가 반듯한 이마 위로 쓸쓸하게 흐트러졌다. 오른 가마. 재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머뭇거리며 윤태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풍성하고 부드러웠다. 윤태희는 눈을 뜨지 않았다.
도시의 밤은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