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재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덧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현관으로 마중을 나와 있던 정주는, 눈앞에 선 재겸을 보자마자 잠시 말을 잃고 말았다.
“뭘 그러고 서 있어. 좀 비켜 봐.”
발만을 이용해 구두를 벗는 데 성공한 재겸은 턱짓으로 길을 열도록 했다. 정주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몸을 비켰다. 짐을 짊어진 재겸은 일단 집 안으로 들어섰다.
“메산이는?”
“어? 어, 너 기다리다가 아까 잠들었어.”
정주가 얼떨떨한 투로 대답하며 재겸이 등에 업은 짐짝을 바라보았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술 먹고 잠들었는데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
재겸의 등에 업힌 건 다름 아닌 윤태희였다.
가게 옆 계단에 쪼그려 앉아 있던 윤태희는 그 자세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없고, 흔들어 깨워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 난감해진 재겸은 팀원들에게 돌아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팀원들은 수석님이 술에 곯아떨어진 모습은 난생처음 본다며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윤태희는 딱히 술이 센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주량을 절대 넘기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처럼 술에 뻗는 불상사는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취하기 전에 딱 끊고, 늘 제 발로 집에 돌아간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평소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수석님도 사람이셨어. 웬일이니.’
앉은 채로 잠든 윤태희의 모습을, 강이빈은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서 사진으로 남기기까지 했다. ‘와, 악랄한 자식.’ 표지호가 혀를 내둘렀다.
‘요즘 많이 바쁘셨잖아. 피곤하셔서 그런가 보다.’
표지호는 일단 택시를 불렀다. 다행히도 가게가 많은 번화가라서 금방 택시가 잡혔다. 그리고 팀원들은 윤태희를 뒷좌석에 태운 뒤에야 깨달았다.
‘수석님 집 주소 아는 사람?’
윤태희가 어디 사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쨌든 길바닥에 버리고 올 순 없잖아.”
물론 재겸은 길에 버려도 딱히 상관없다는 입장이었으나… 짧은 고민 끝에 윤태희라는 짐짝을 떠안아 주기로 했다. 자신의 집이 가장 가깝기도 했고 그간 얻어먹은 것도 있으니 나름 선심을 베푼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오는 내내 윤태희는 쥐죽은 듯이 얌전했다. 하도 조용해서 코 밑에 손도 대 봤다. 택시는 둘을 대문 앞에서 내려 주었다. 재겸은 주머니를 뒤져서 대충 택시비를 내고 훤칠한 성인 남성을 훌쩍 등에 업었다. ‘힘이 아주 장사구만!’ 택시 기사가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상황을 대충 전해 들은 정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인데 소파는 좀 그러니까, 일단 내 방으로….”
걸음을 옮기던 정주가 멈칫하며 돌연 몸을 세웠다.
“아, 맞다! 메산이 지금 내 침대에서 자는데?!”
“괜찮아, 그냥 내 방에서 재우지 뭐.”
재겸이 깨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거실을 지나 제 방으로 향했다. 뒤따라오던 정주가 냉큼 문을 열어 주고 전등 스위치를 켰다. 재겸은 침대 위로 짐짝을 패대기쳤다. 완전히 잠에 빠진 성인 남성은 정말 무거웠다.
“그래도 이 정도면 곱게 취하시는 편이네.”
정주가 미동도 없는 윤태희를 바라보며 한 줄 감상평을 꺼내놓았다. 비로소 몸이 가벼워진 재겸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선은 구두부터 벗기고… 재겸이 짐을 정리하는 동안 정주는 남는 이불과 베개를 가지고 왔다.
“재겸아, 그럼 넌 메산이랑 같이 내 침대에서 자.”
“너는 어디서 자려고?”
“난 소파에서 자면 돼. 넌 소파 불편해하잖아.”
“됐어… 그냥 바닥에 이불 깔고 잘래.”
그렇게 말하며, 재겸은 윤태희에게 대충 이불을 덮어 주었다. 머리를 들어 베개도 받쳐 주었다. 각도가 엉성하게 비뚤어져서 베느니만 못하게 불편해 보였으나, 재겸은 더 이상의 할 일은 없다는 듯 홀가분하게 손을 털었다.
재겸은 정주의 품에서 이불을 빼앗았다. 정주는 몇 번이고 제 침대를 양보하려고 했으나 재겸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진짜 괜찮겠어?”
“그래. 가서 자.”
예전엔 맨날 이렇게 바닥에 이불 펴고 잤다. 맨바닥에서 잔 적도 많은데 이게 대체 뭐라고. 윤태희를 집어 온 것은 순전히 제 의지였다. 정주가 대신해서 불편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한참을 옥신각신한 끝에 재겸은 방에서 정주를 내쫓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귀를 기울이니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재겸은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며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제 침대에 누워 있는, 고요하게 잠든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누가 빚어 놓은 것처럼 생겼네….
단추를 풀어 나가던 손이 조금씩 느려졌다. 자신의 침대에 다른 사람이, 그것도 윤태희가 누워 있는 것을 보니 뭔가 싱숭생숭했다. 새삼 생각해 보니 기분이 묘하다. 저와 윤태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이였다. 저는 고등학생이었고 윤태희는 사서 선생이었다. 고작 한두 달 만에 일상이 송두리째 바뀌어 있었다. 믿을 수 없을만큼 극적이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아무도 모르게 둘만 아는 것들이 있다. 오로지 서로만, 서로의 깊숙한 무언가를 알고 있다. 팀원들과 몇 년은 알고 지낸 사이임에도 그들은 윤태희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기이하기만 했다.
‘사실은, 전부 이매한테 속고 있는 거야.’
팀원들과 그렇게나 화목하게 지내면서도, 윤태희는 자신의 집이 어딘지조차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윤태희는 모두의 관심 속에 있었다. 그 속에서 혼자 있었다. 햇볕이 쏟아지는 양지에 속해 있지만 축축한 어둠을 밟고 서 있었던 것이다.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선명한 복수심이라는 그림자를.
윤태희는 10년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윤태희는 단 한 순간도 복수를 잊어 본 적이 없었던 걸까? 아무리 작고 사소한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과 잔을 부딪치던 그 순간에도 너는 혼자였는지.
재겸은 단추를 풀던 손을 내리고 윤태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이 든 사람은 한 톨의 거짓조차 묻어나지 않는 얼굴이 된다.
“…….”
속이는 건 이매인데, 어째서 이매에게 속는 사람들보다도 이매가 안됐다는 마음이 드는 건지… 정말이지 모를 일이라고, 재겸은 생각했다.
***
윤태희는 어슴푸레한 새벽빛 속에서 눈을 떴다. 제법 깊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난 것임에도 눈빛은 또렷하고도 명료했다. 낯선 천장. 낯선 침대. 낯선 방이다. 몸에 닿아 오는 침구의 감촉이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소리 없이 눈만 굴리던 윤태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젖히고 시선을 내리니 옷차림은 어제 입은 그대로였다. 간밤의 기억을 되짚어 보며, 푸른 새벽빛에 잠긴 방 안의 풍경을 찬찬히 살펴볼 때였다.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닿자마자, 윤태희가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왜 여기에?
침대 아래에서 재겸이 자고 있었다. 저와는 달리 편한 옷차림이었다.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재겸은 둘둘 말린 이불에 다리 한쪽을 걸치고, 웅크린 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
그제야 윤태희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렸다. 더불어 이 낯선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지박령. 면신례. 뒤풀이. 술…
마침내 기억을 정리한 윤태희가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짚었다.
“아, 씨발.”
정신을 놨구나.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숙취가 없는 것을 보니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건 아닌 듯하고, 피로가 쌓여 술기운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통제할 수 없었던 스스로에 대해 짜증이 나려고 했다. 한순간이나마 긴장이 풀렸다는 사실에 불쾌감이 엄습했다. 윤태희는 눈을 감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방 안은 이를 데 없이 적막했다.
윤태희는 한참 만에야 눈을 떴다. 손목을 들어서 시간을 확인했다. 4시 53분.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차츰 밝아지고 있었다. 윤태희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재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재겸은 등을 돌린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윤태희는 반대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팔꿈치를 대고 모로 누우니 눈높이가 나란해졌다. 윤태희는 곤하게 잠든 얼굴을 대놓고 감상했다.
5시가 되면 떠날 생각이었다.
“안녕, 나 갈게.”
숨결처럼 흘러나온 희미한 속삭임이었다.
당연히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였지만, 때마침 재겸이 몸을 뒤척거렸다. 앞으로 돌아눕는가 싶더니 티셔츠를 위로 훌러덩 올린다. 혹시라도 깬 걸까 싶어 재겸을 주시하고 있던 윤태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배를 내놓고 자는 게 습관인가.
머리를 괴고 있던 윤태희가 대수롭지 않게 손을 뻗었다. 옷을 내려 주기 위해서였다. 그때, 옆구리에 새겨진 커다란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
윤태희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어느새 얼굴은 무표정했다. 훤히 드러난 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다시 손을 뻗었다.
군살 하나 없이 판판한 배 위로 윤태희의 손바닥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뜨거운 온기가 물들듯이 옮아왔다. 윤태희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천천히 배를 쓸자 살짝 마른 듯하면서도 희미한 복근이 만져졌다.
재겸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직접적인 감각으로 느껴졌다.
그대로 멈춰 있던 손이 어느 순간 옆으로 미끄러졌다. 윤태희는 긴 손가락 마디로 흉터의 살결을 느리게 훑었다. 그때, 잠결에 느낀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재겸의 팔이 짧게 움찔했다. 윤태희가 순간 멈칫하며 손을 뗐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을 뒤집어쓴 윤태희는 말없이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
윤태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이 든 소년의 얼굴은 무방비하고 평온하기만 했다. 낮게 깔린 숨소리가 선명했다. 윤태희는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바르게 누운 소년의 얼굴을 홀린 듯이 내려다보았다. 희끄무레한 새벽빛 속에서도 얼굴선의 윤곽이 단정했다.
불현듯 기이한 충동이 일었다. 윤태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언젠가처럼, 검지 끝으로 삐뚤빼뚤한 앞머리를 따라 이마를 조심히 덧그리자, 소년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
마침내 윤태희가 숨을 멈췄다.
아,
이 손으로 너를 뒤흔들고 싶다.
불분명한 욕망의 형태는 일종의 광기와도 닮아 있었다. 파괴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이 손으로 깊이 잠든 너를 허락 없이 깨우고 싶다. 너의 평정을 깨부수고 싶다. 울거나 웃거나 뭐가 됐든 좋으니, 망가트리거나 무너트려서,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 네가 너로 있을 수 없도록….
충동의 형태를 마주한 순간, 윤태희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