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99)화 (99/348)

#99

소년은 마침내 어둠 속에 있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보이는 건 똑같다. 이곳은 낮도 없고 밤도 없다. 해도 뜨지 않고 달도 뜨지 않는다. 깊고 무거운 암흑 속에서 소년은 이를 데 없이 안락하였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라곤 오직 소년 자신이 내뱉는 숨소리뿐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숨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모든 감각이 사라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간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소년은 생각했다. 아아, 길어도 너무 길었다….

‘맞다, 맞아. 길어도 너무 길었구나.’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면 웬 목소리와 대화를 한다던데 필시 그것인가보다. 그간의 노고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흔쾌히 동조해 주는 목소리는 제법 친숙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끝인가요?’

자연스럽게 존댓말이 나왔다.

‘그래, 길어도 너무 길었지.’

드디어 안식이구나. 서러운 마음이 왈칵 치솟았다. 비로소 이 지긋지긋한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른 것이다. 소년은 매달리듯 말을 붙였다.

묘정은요? 묘정은 어떻게 됐어요? 나한테 한 번쯤은 미안해했나요? …정말 힘들었어요. 왜 나만 이렇게 괴로워야 하는지 이 세상이 밉기도 했어요. 근데 결국 내가 이겼어요… 정주와 메산이한테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 그래도 그 녀석들이 곁에 있어 줘서 견딜 만했어요… 그리고 윤태희한테는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어쨌든 걔 때문에 마지막에 심심하진 않았거든요. 이렇게 모든 걸 끝낸 것도 그 녀석 덕분이에요….

마침내 쟁취해 낸 필멸의 문턱 앞에서 된 소년은 허심탄회하게 말을 꺼내 놓았다.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이어지는 말에 목소리는 조용히 귀를 기울여 주었다. 이윽고 할 말을 끝낸 소년은 홀가분한 심정이 되어 물었다.

‘그래서 전 이제 어떻게 되나요?’

나는 다시 태어나게 될까? 그건 싫다. 그냥 이대로 영영 사라졌으면 좋겠다. 만약에 다시 무언가로 태어나야만 한다면 길가의 돌멩이나 풀떼기가 되어서 살고 싶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하고 시시하게 살다가 갈 수 있게.

‘저기요, 전 어떻게 되냐니까요.’

소년이 채근하니 목소리가 근엄하게 대답했다.

‘벌점 5점이지.’

‘아….’

그렇구나, 벌점 5점… 수긍하던 소년이 멈칫했다.

‘예?’

‘벌점 5점!’

목소리에 갑자기 엄중한 노기가 서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 이놈아, 머리가 왜 그리 길어?’

‘머리요? 제, 제가요?’

‘그래! 옆머리가 이건 뭐, 거의 이불이야. 이불.’

‘…….’

목소리가 벌컥 화를 내기 시작했다. 옆머리가 이불이라니 갑자기 뭔 소리야. 이해가 가지 않는 와중에 기분이 몹시 나빴다. 그래서 소년도 따라서 화를 냈다. 내 옆머리가 왜 이불인데요? 그거야 길어도 너어무 기니까. 길다는 건 이 인생을 말한 거지, 머리털을 얘기한 게 아니라고요! 시끄러, 임마. 어쨌든 두발 규정 위반이야. 그런 규정은 누가 정했는데요? 몸에 난 터럭을 함부로 건들면 그것이 곧 불효라고요. 비록 내가 부모는 없어도 사자소학에 보면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당신이 뭘 알아….

헉! 재겸이 눈을 번쩍 떴다.

“…….”

창문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눈부시고, 새 소리는 지지배배 요란하다. 익숙한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재겸이 눈을 두어 번 끔뻑거렸다.

아, 시발. 학주….

재겸이 이불을 쥐어뜯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재겸은 걸음을 비틀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거실로 나오자 보글보글 국 끓는 소리가 들렸다. 기척을 들었는지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던 정주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재겸아, 잘 잤….”

아침 인사를 건네던 정주가 멈칫했다.

“재겸아, 왜 그래? 뭔 땀을 그렇게 흘려?”

한눈에 보기에도 재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재겸이 손등으로 이마에 묻은 땀을 훔쳐 냈다.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이 맥빠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꿈… 꿈 때문에.”

“무, 무슨 꿈인데?”

몹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재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몽둥이를 든 대머리가 쫓아오는 꿈.”

“뭐? 그런 지독한 악몽을 꾸다니!”

정주가 기겁하며 황급히 재겸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런 꿈은 얼른 잊어버려.” 재겸은 고개를 숙이며 정주의 손길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안 그래도 오랜만에 바닥에서 잤더니 등짝이 배겼는지 영 뻐근했던 참이다.

그때, 마당에 나가 있던 메산이가 열린 샤시문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잠시 헉헉대던 메산이는 이내 방긋 웃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나리, 기침하셨습니까?”

“어? 어….”

재겸은 까치집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저 개꿈일 뿐이었으나 재겸은 괜시리 마음이 심란했다. 하필 꿈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정주와 메산이를 보자 희미한 죄책감이 솟아났던 것이다. 재겸은 어쩐지 면목 없는 심정이 되어 목덜미를 매만졌다.

재겸의 속내를 알 길이 없는 메산이는 그저 해맑기만 했다.

“나리, 나리! 어어, 제가요! 공깃돌을 모았는데 구경하실래요?”

메산이는 매미처럼 재겸의 허리춤에 답싹 달라붙더니 쉴 틈 없이 조잘거렸다.

“흠… 그래, 가져와 봐.”

메산이가 공깃돌을 가지러 간 사이, 재겸은 부엌으로 갔다.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냄비 안을 기웃거려 보았다. 정주가 끓이고 있는 건 콩나물국이었다.

잠시 주변을 훑어본 뒤, 재겸이 물었다.

“…그, 어디 갔어?”

수저로 후루룩 국물 간을 보던 정주가 말했다. “뭐가?” 재겸이 턱짓으로 제 방을 가리켰다. “윤태희.” 재겸의 말에 정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어, 안 계셔?”

“눈 뜨니까 없던데.”

악몽에서 깨어난 재겸은 뒤늦게서야 윤태희의 존재를 떠올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눈에 보인 것은 휑하니 비어 있는 침대였다. 간밤에 눕혀 놓은 짐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먼저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거나 마당에 나가 있나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여태 방에서 주무시고 계신 줄 알았는데?”

정주는 당황한 기색으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잠을 깨울까 봐 일부러 문도 열어 보지 않았다. 언제 가셨지? 나가는 소리는 못 들은 것 같은데… 평소 잠귀가 밝은 편인 정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늦게 방문을 열어 보았다.

“헐. 진짜네….”

간밤에 들른 손님은 침구까지 단정하게 개어 놓고 퇴실한 상태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먼저 집에 가셨나 봐.”

정주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빈 침대를 바라보고 있던 재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휴대폰을 찾았다. 혹시 문자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액정을 켰다. 그러나 홈 화면은 깨끗하기만 했다.

“…….”

재겸은 불현듯 괘씸함을 느꼈다.

길에 버릴 거 고생고생해서 기껏 업고 와 줬더니 말도 없이 가?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재겸은 훽,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아침이라도 드시고 가시지. 콩나물국 시원하게 잘 끓였는데….”

못내 아쉬워하는 정주의 목소리가 재겸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

재겸은 처음으로 동행인 없이 혼자서 입청을 하게 되었다.

아직 근무 스케줄 표를 짜지 않은 재겸은 언제 출근을 해야하는지 잘 몰랐다. 지난 이틀 간은 누군가 데리러 왔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아는 거라곤 윤태희의 번호뿐이다.

말도 없이 사라진 윤태희는 정오가 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재겸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 몇 시까지 가면 되느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통화 연결음이 한없이 길어지더니 안내음이 나왔다. 윤태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뭐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아침에 느낀 괘씸함은 점심이 되자 묘한 궁금증으로 변해 있었다. 다시 걸어 볼까 잠시 고민했으나, 그냥 관두기로 했다. 어쩌면 많이 바쁜 걸지도 모르겠다.

연락이 닿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전화가 왔다는 흔적이 남았을 테니 나중에라도 연락이 오겠지 싶었다. 어제도 엊그제도 오후쯤 출근했으니 오늘도 대충 그 시간에 맞춰서 가면 되겠다는 막연한 결론이 섰다.

정주가 직접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재겸은 고개를 저었다. 매번 누군가의 곁에 딸려 갈 순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재겸은 정주가 알려 준대로 종묘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청명한 종로 하늘을 배경삼아 잘도 달렸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서너 명의 팀원들이 재겸을 반겨 주었다. 어제에 비해 인원이 소소했다. 몇 명은 호출이 떨어져 출동을 나갔고, 몇 명은 아직 출근 전이라고 했다. 재겸은 가장 먼저 윤태희가 왔는지부터 물었다.

“윤 수석님? 아직 안 오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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