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으니, 재겸은 그냥 대충 둘러 대기로 했다. 어쨌든 악수는 악수였으니까. 그리고 그냥 악수 좀 한 것뿐인데, 윤태희의 표정은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
윤태희는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재겸을 빤히 응시하다가,
“넥타이 누가 매 줬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네가 맸어?”
윤태희가 재차 물었다.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으나 재겸은 일단 문간 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잠시 눈치를 보다가 반말로 조그맣게 대꾸했다.
“아니, 정주가….”
재겸의 대답과 동시에 윤태희가 의자를 뒤로 물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다가온 윤태희가 난데없이 재겸의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잘 묶여 있던 넥타이가 순식간에 풀렸다.
“갑자기 넥타이는 왜….”
재겸이 설핏 눈가를 구길 때였다.
“안 예뻐서 다시 매 주려고.”
가까이 다가온 윤태희가 소근거리며 대답했다.
재겸은 어리둥절했다. 술이 덜 깬 건지, 윤태희는 오늘따라 오락가락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외하듯이 굴더니 갑자기 넥타이가 안 예쁘네 어쩌네 트집을 잡는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은 넥타이를 묶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런데 기분 탓인진 몰라도 넥타이를 매 주는 손길이 평소에 비해 약간 거칠게 느껴졌다.
“오늘 바빴어?”
누가 들을세라, 재겸이 작게 속삭였다. 가깝게 마주 본 상태가 되었으니 목소리만 낮춘다면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여간해선 들리진 않을 것이다.
“응, 조금.”
재겸은 이참에 하려던 질문을 몽땅 꺼냈다.
“아침 몇 시에 일어났어?”
“한 다섯 시쯤.”
“내가 전화한 거 봤어?”
둘은 소곤거리며 비밀스레 말을 나눴다.
“네, 봤죠.”
“근데 왜 다시 안 했어?”
윤태희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기다렸어?”
재겸이 대꾸했다.
“응.”
윤태희의 손이 우뚝 굳었다.
“…….”
재겸이 덧붙여 물었다.
“왜 말없이 그냥 갔어?”
침묵하던 윤태희가 중얼거렸다.
“글쎄, 굳이 말해야 되나.”
다시 손이 움직인다. 데면데면한 대답에 재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물론 서로에 대해 사사건건 꿰뚫고 있어야 할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껏 집에 데려와서 재웠는데 홀라당 사라졌으니, 침대를 내준 주인 입장에서야 당연히 궁금해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이렇다 할 연락 한 통 없으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내내 신경이 쓰였었다.
“정주가….”
재겸이 고개를 숙이고 윤태희의 손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정주가 너 집에 간 줄도 모르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장국 끓였어. 갈 거면 미리 말을 하고 갔어야지. 정주가 괜히 헛수고를 한 셈이 됐잖아.”
넥타이 매듭을 조여 주던 손이 멈칫했다.
“…….”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윤태희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랬어?”
눈을 가볍게 찡그리더니 새삼스럽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또 그걸 몰랐네.”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선 알 수 없는 냉기가 묻어났다.
“어쩌지? 헛수고를 하게 만들어서… 그래도, 이렇게나 끔찍이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윤태희가 잘 묶인 넥타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매듭 사이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제 쪽으로 살짝 잡아당기자 재겸이 끌려왔다. 서로의 구두 앞코가 부딪쳤다.
“그렇게 소중하다면 죽기 위해 나자가 됐다는 것도 사실대로 알려 주지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내버려 두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싸늘한 비아냥에 재겸의 낯이 매섭게 굳었다.
“드디어 삶에 의욕이 생겼나 싶어서 마냥 기뻐하고 있을 텐데… 사실 그 반대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저 꼬리나 흔들어 대는 모습이 가련하잖아.”
실로 다정한 비수였다. 갑작스럽게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한순간에 피가 식는 듯했다. 재겸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각자의 시선이 서로를 관통했다.
그 순간, 윤태희는 심장이 한없이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무심하던 소년은 아주 선명한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
재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라던 대로 재겸의 평정을 깨부쉈음에 윤태희의 가슴 한편으로 묘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허나 잠시일 뿐이었다. 손아귀에 움켜쥐었던 모래가 찰나의 무게감을 남겨 놓고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듯했다.
재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윤태희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과녁을 맞혔음에도 빗나갔다는 느낌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리감은 몹시 불쾌한 감각으로 이어졌다.
한참 만에야 재겸이 가까스로 입을 달싹이는가 싶더니,
“넌….”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문다. 재겸은 정면에 마주 선 윤태희로부터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그대로 등을 돌렸다. 재겸은 열린 문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갔다. 윤태희의 시선이 재겸의 뒤통수를 따라갔다.
그대로 수석실을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윤태희의 예상과 달리 재겸은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는 대신에 열려 있던 문을 닫는다. 재겸이 윤태희의 정면에서 성큼성큼 되돌아왔다. 멀어졌던 재겸이 눈앞에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아….
그와 동시에 곤두박질쳤던 윤태희의 심장이 사정없이 널을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재겸의 보폭과 닮은 북소리가 발끝까지 울려 퍼졌다.
“그래. 너 개새끼인 거 내가 잘 알아, 아는데….”
문을 닫고 돌아온 재겸은 그대로 윤태희의 뺨을 후려쳤다.
“너는, 너는… 이 씨발 개새끼야….”
윤태희가 휘청거리며 데스크에 몸을 기댔다.
“그래도 넌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다정하고 친절한 윤태희는 때때로 협잡꾼이거나, 쓰레기이거나, 어쩌면 그보다도 더한 놈이 된다. 언젠가 서점에서 했던 그 말은 정녕 사실이었다.
어쩌면 잠시 잊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윤태희는 한번 심기가 뒤틀리면 한없이 어긋나는 놈이다. 가끔은 말을 칼처럼 쓰고, 사람을 제멋대로 휘두른다. 귀신은 사람이 방심한 틈을 노리고 나자는 사람을 방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윤태희는 나자를 싫어하지만 가끔은 그 누구보다도 나자 같다.
재겸이 이를 악물었다. 자꾸만 목소리 끝이 떨렸다.
“맞아. 걔네 아무것도 몰라.”
너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척하면서 사실은 모든 걸 보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사실은 모든 걸 알고 있다. 내가 모른 척하면 너는 보란 듯이 짚어 낸다. 윤태희는 원래 그랬다. 아무렇지 않게 정곡을 후벼 판다.
“근데 너는 알잖아, 이 씨발 새끼야.”
윤태희는 재겸의 권태와 불우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재겸이 어째서 나자가 되었고, 어떤 심정으로 윤태희의 손을 잡았는지. 알고 있는 건 오로지 윤태희 하나뿐이었다. 재겸은 망망대해 속에서 부표를 잃은 것처럼 서러웠다.
“…….”
재겸이 등을 돌렸다. 이번에야말로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윤태희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을 때였다. 불시에 뒤에서 뻗어 나온 큼직한 손이 문고리를 쥔 재겸의 손에 겹쳤다. 강한 힘이 재겸을 붙잡았다. 바로 뒤에 윤태희가 벽처럼 서 있었다.
“놔.”
재겸이 문을 노려보며 사납게 말했다. 윤태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을 떼지도 않았다.
“놓으라고.”
묵묵부답이던 윤태희가 한참 만에 고개를 숙였다. 재겸의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가, 이내 옆으로 고개를 미끄러트렸다. 재겸의 어깨 위로 이마를 툭 박더니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
“방금 건 내가 실수했어.”
“…….”
예상치 못한 사과에 재겸의 어깨가 굳었다. 윤태희는 재겸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어.”
이것이 윤태희가 잠깐 사이에 얻은 결론이었다. 뒤흔들고 싶다. 그건 확실히 파괴적인 충동이었다. 너의 평정을 망가트리는 일.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서 격정적인 파문을 일으키고 싶다. 그 욕망이라 함은 어쩌면 상처를 주고 싶다는 마음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번 건 정답이 아니었다.
너와 나 사이의 평행을 깨트리고 싶다.
이 평행을 깨트린다면 무언가를 이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어….”
윤태희는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결국은 사실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뒤흔들고자 했던 건 너였는데, 정작 뒤흔들린 건 나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