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02)화 (102/348)

#102

퇴근길의 종로는 여느 때처럼 부산하기만 했다.

대로변에 붙은 정류장 앞으로 버스가 줄줄이 늘어섰다. 정류장을 찾는 모든 사람은 전부 기다리는 사람이다.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류장 벤치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소년은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망연했다.

어둡던 간판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행인들은 걸음을 재촉한다.

재겸은 도시가 어둠에 잠기는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덧 한 시간째였다.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버스가 재겸의 앞에 멈춰 섰고, 그중엔 집으로 가는 버스도 많았지만 재겸은 못박힌 사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안해.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어.’

윤태희의 사과에 잠시 멈칫했던 재겸은 그대로 수석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걸음 한 번 늦추지 않고 그 길로 곧장 사무실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그에 팀원들 몇 명이 재겸의 뒤통수에 대고 ‘어디 가? 조금 있으면 월례 보고 시작하는데!’ 당황한 목소리를 냈으나, 윤태희는 재겸을 붙잡지 않았다.

홧김에 본청에서 뛰쳐나온 재겸은, 정작 어디로도 가지 못했다.

재겸은 가라앉은 눈으로 버스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 버스를 타면 정주와 메산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현관문을 열면 정주와 메산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마중을 나와 있을 것이고, 잘 다녀왔냐며 반갑게 인사를 해 올 것이다. 윤태희의 말대로 꼬리를 흔들 것이다.

가련하게도….

그래서였다. 지금과 같은 기분으로는 도저히 정주와 메산이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재겸의 마음속에선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재겸은 윤태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윤태희가 바라던 대로 나자가 됐다. 윤태희가 마련한 집으로 이사를 왔고, 윤태희가 사 준 옷을 입었다. 같이 밥을 먹자고 하길래 순순히 겸상도 해 줬다. 돌이켜 보면 해 달라는 건 전부 해 줬다. 재겸 입장에선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윤태희는 내 편이 되어 준다면 나도 네 편이 되어 주겠노라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대로였다. 나자가 된 이후로 윤태희는 세 식구의 생활을 살펴 주는 것은 물론이고, 뒷배를 자처하며 노골적으로 재겸을 감싸고 돌았다.

근데 그게 영 싫지 않았다. 손을 잡은 이후로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로웠고, 재겸은 은연중에 만족하고 있었다.

지나간 일들이 전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고.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윤태희는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 녀석일지도 모른다고.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보란 듯이 한 방 먹고 말았으니,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기분이 풀릴 때까지 죽자 살자 두들겨 패거나, 너 같은 거 다시는 안 본다며 뚝 잘라 내고 등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으니 그럴 수는 없었다. 애초에 손을 잡지 않았으면 모를까, 한배를 탄 순간부터는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망망대해 위에는 오직 윤태희뿐이었다.

‘미안해.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어.’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넌 도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거지?

마음이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는다. 처음엔 정주와 메산이를 향한 죄책감이 파도처럼 덮쳐 왔으나, 파도가 물러가고 남은 건 윤태희를 향한 실망감이다. 윤태희가 나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어느샌가 재겸의 마음속에서 돋아났던 작은 새싹은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위태롭게 떨고 있었다. 아직 가녀린 새싹은 뿌리에 힘이 없었다.

예상 밖의 난항. 기상 악화였다.

***

저녁 6시, 월례 보고가 열리는 회의실 안은 축역부 나자들로 가득 찼다. 제법 많은 인원이 모였음에도 장내는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수석을 비롯하여 축역부 부장 석주련까지 배석한 자리이니만큼 엄숙한 분위기였다.

“그럼 지금부터 5월 월례 동향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스크린에 프레젠테이션이 떠올랐다. 발표를 맡은 것은 암행부 제2팀 최 수석이었다. 최 수석의 입에서 지난 한 달간의 소식들이 쏟아졌다. 보고가 이어지는 동안 나자들은 각자 배부받은 프린트물에 필기를 하기도 하고, 개인 노트북을 두드려 가며 주지할 만한 내용들을 틈틈이 정리했다.

슬라이드가 넘어갔다. 그에 장내의 모든 나자들이 따라서 종이를 넘겼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석주련도 예외 없이 손을 들어 페이지를 넘겼으나, 축역부 제1팀 수석은 턱을 괴고 앉은 자세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시선은 줄곧 스크린을 향해 있었고, 얼핏 보기에는 보고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윤 수석의 앞에 놓인 프린트물은 여전히 첫 번째 페이지에 멈춰 있는 상태였다. 메모를 한 흔적도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

“…….”

동석해 있던 제1팀 팀원들이 은밀히 시선을 교환했다. 저희의 상관은 어딘지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는데, 그게 아주 낯설고 신경 쓰였다. 윤태희는 아까부터 정신이 딴 데로 가 있는 사람처럼 멍하게 앉아 있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이기도 했고, 기분이 몹시 안 좋아 보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막내가 사무실을 뛰쳐나간 그 무렵부터였다.

다 쓴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막내가 수석실로 들어가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수석실 문이 닫혔다. 그리고 문이 다시 열렸을 땐, 막내는 이제까지 보여 준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막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무척이나 살벌하고 험악해서, 팀원들은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잠시 굳어 있던 표지호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뛰쳐나간 막내를 붙잡으러 나가려고 할 때였다. ‘그냥 두세요.’ 뒤늦게 수석실에서 나온 윤태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윤태희는 아무 말없이 한참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사무실 안은 싸한 침묵에 휩싸였다.

‘뭐! 수, 수습이니까 월례 보고 빠져도 큰 상관은 없긴 한데.’

줄곧 눈치를 살피던 고준형이 소심하게 너스레를 떨어 보았다. 그에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던 윤태희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일들 보세요.’ 짧은 한마디를 남겨 놓고 그대로 등을 돌려 수석실로 들어갔던 것이다.

대체 수석실 안에서 둘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무래도 그 안에서 문제가 있었던 모양인데, 상황을 알 수가 없으니 팀원들은 그저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자니, 상관의 분위기가 침중하여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네가 물어봐 봐, 왜 내가 물어봐…

제1팀 팀원들이 눈으로 신호를 주고받을 때였다. 또다시 슬라이드가 넘어가며 화제가 바뀌었다.

“다음은, 여혜 선사가 영귀를 사역(사람을 부리어 일을 시킴. 또는 시킴을 받아 어떤 작업을 함)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이어지는 최 수석의 말에, 눈짓을 나누느라 바빴던 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려 최 수석을 바라보았다. 장내가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턱을 괸 조각상처럼 앉아 있던 윤태희도 처음으로 뚜렷한 반응을 보였다. 내내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스르륵 일변했다.

“뭐? 여혜 선사가?”

석주련이 눈을 크게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 그렇습니다.”

여혜 선사는 용하기로 소문난 만신 중 한 명으로, 무당들 사이에서도 특출난 신기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또한 인품이 훌륭하고 호방한 성정을 지녀 많은 이들의 신임을 받았다. 일흔을 넘긴 노쇠한 나이에도 수많은 신자식(신딸 또는 신아들. 제자로 삼는 무당.)을 거느리고 있을 정도였다. 귀재뿐만 아니라 범인들까지도 선사(禪師)라는 존칭으로 그를 예우하며 스승처럼 모셨다.

그를 모시는 범인들 중엔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정치인이며 굵직한 기업체의 회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국가적인 대소사를 앞두고 여러차례 앞날을 예견해 낸 전력이 있었다. 때문에 선거철만 되면 각계의 고위층 인사들이 신당의 방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곤 했다. 알 만한 이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게나 덕망 높은 양반이 귀신을 부려 먹는다고요?”

그때,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얼핏 듣기에도 여혜 선사를 깎아내리는 듯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최 수석이 최대한 사무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귀신의 손을 빌려 신당 고객들의 일을 처리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귀신을 통해 일을 처리할 경우 물증이 남지 않고, 본인 또한 위험 부담이 적기 때문에 마치 하청을 주듯이 대신해서 일을 맡기는 듯합니다.”

그저 그런 어설픈 무당도 아니고, 많은 이가 우러러보는 고명한 무당이 요사스러운 귀신을 사역하고 있다… 그것도 잡귀, 원귀도 아니고 영귀를? 장내가 웅성거렸다. 영귀는 귀신 중에서도 가장 드물고, 까다로운 상대였다. 알려진 정보가 워낙 적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영험한 신령을 모시는 무당이 한낱 귀신 따위와 손을 잡는다? 그게 사실이라면 여혜 선사, 그 작자가 기어이 노망이라도 났나 보군.”

석주련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경멸을 숨기지 못했다.

“신빨이 떨어졌나 봐요.”

“돈이 떨어졌을지도요.”

여기저기서 싸늘한 조소가 터져 나왔다. 대부분의 나자들은 무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같은 바닥이라면 같은 바닥이었으나, 나자와 무당은 근본적으로 출발점이 달랐다.

무당에게는 천기에 순응하고, 신을 받드는 존재가 가지는 특유의 겸허함이 있었다. 때문에 나자와 무당은 귀신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신령을 모시는 무당은 기본적으로 귀신을 딱하고 갸륵하게 여겼다. 그렇기에 때로는 귀신을 야단치고, 어르고, 달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자에게 그런 방식은 용납되지 않았다. 나자는 귀신을 적대하는 공격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애초에 사고 체계 자체가 달랐다. 나자에게 자비란 없었다. 귀신은 사멸하고 물리쳐야 하는, 해충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귀신에게 일을 맡긴다니, 당연히 나자들의 반응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어수선해진 분위기 속에서 최 수석이 화제를 이어 붙였다.

“들리는 정보에 따르면 여혜 선사의 일을 돕고 있는 귀신은 한둘이 아니라 하나의 집단을 꾸려서 움직이고 있으며, 그 이름은 ‘벽사단’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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