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석주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곱씹었다.
“벽사단?”
여혜 선사가 귀신을 사역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불쾌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귀신들이 집단을 만들어 이름까지 내세운다? 그것은 불쾌한 것을 떠나,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몇몇 무당들을 통해 입수한 내용입니다. 무당들 사이에서는 제법 유명한 얘기라고 합니다.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암암리에 정보가 도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목격자나 근거를 확보하지는 못했습니다.”
석주련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옆에 앉은 윤태희 또한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바로 했다. 어느덧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때문에, 며칠 전에 여혜 선사를 불러서 조사를 했습니다.”
암행부에서는 이미 두 번이나 여혜 선사를 불러서 조사를 마친 상황이었다. 다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을 뿐이다. 선사는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 일축하며, 벽사단에 대해서도 처음 들어 본다고 했다. 노쇠한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쩌렁쩌렁 호통을 질러 대는 덕분에 조사관으로 참여한 나자들은 하나같이 쩔쩔매야만 했다.
‘신령을 섬기는 자가 잡스러운 귀신을 부리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여러모로 난항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추궁하기도 곤란했다. 평소 무당을 탐탁잖게 여긴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여혜 선사였다. 그가 가진 영향력까지 무시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여혜 선사는 여러 고위층 인사와 연줄이 닿아 있는 거물이었다.
“선사는 벽사단에 대해 금시초문이라고 합니다. 선사 정도의 위치라면 시기와 질투를 일삼는 이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누군가 일부러 여혜 선사를 흠집을 내기 위하여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펜을 휘휘 돌리며 귀를 기울이고 있던 윤태희가 최 수석의 말을 자르듯 탁, 소리가 나도록 볼펜을 내려놓았다. 석주련의 시선이 윤태희에게 꽂혀 들었다.
“설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겁니까?”
윤태희가 피식 웃으며 눈썹 끝을 매만졌다.
“…….”
최 수석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여혜 선사야 당연히 맞아도 아니라고 잡아떼겠죠. 사실대로 말해 봤자 선사한테 이로울 건 없으니까요. 이럴 땐 여혜 선사를 불러서 조사할 게 아니라 처음부터 ‘벽사단은 존재한다’는 전제로 움직이는 게 맞지 않나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는 냉철하고도 이성적인 방안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아마도 ‘벽사단’은 정말로 존재할 겁니다. 실체를 잡아내려면 주변의 무당들과 이지가 있는 귀신들을 상대로 탐문을 벌이는 게 나아요.”
말을 마친 윤태희가 재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낱개 포장된 사탕이 나왔다. 태평하게 사탕을 까먹는 소리가 석주련의 신경에 거슬렸다. 평소 같으면 찌릿 눈총을 줬을 테지만, 오늘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윤태희의 정확한 지적은 석주련을 내심 만족스럽게 만들었다.
석주련의 손끝이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그래, 벽사단. 벽사단이라….”
뜬소문이라 좌시하기엔 영귀라고 콕 집는 걸로 모자라, 그 집단이 내세운 이름까지 상세하게 귀에 흘러들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귀신들의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나례청 입장에서 아주 중대하고 위험한 사안이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면 집단이 된다. 집단은 어떠한 세력이 되고, 세력은 장차 목표를 가지는 법이다.
“여혜 선사의 뒤에 사람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그리고 암행부에 남는 인력을 전부 파견해. 벽사단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하도록. ”
불길한 싹은 처음부터 잘라 버리는 게 옳았다.
“벽사단을 잡는다.”
석주련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윤태희의 퇴근은 자정을 훌쩍 넘긴 야심한 시각에서야 이루어졌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다면 끔찍한 야근에 시달린 것일 테지만, 윤태희와 같은 경우에는 정반대로 일찍 퇴근하는 축에 속했다. 제1팀 사무실에는 아직 절반 이상의 인원이 남아 있었다. 직업 특성상 주간 근무보다 야간 근무하는 날이 많기 때문이었다.
출근 3일차 수습은 무단 탈주, 그리고 수석은 제멋대로 조기 퇴근. 딱 두 사람만 빼면 오늘도 평화로운 축역부 제1팀이었다.
윤태희가 평소에 비해 일찍 퇴근한 이유는 단순했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그게 이유였다.
본청을 나온 윤태희는 고개를 꺾고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날이 맑아서 흩어진 별빛이 또렷했다. 관람 시간이 끝난 지 오래인 종묘 주변은 사람 한 명 없었고, 어두컴컴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윤태희는 넥타이 매듭에 손을 끼우고, 넥타이부터 느슨히 풀었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천천히 공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근처에 주차할 데가 마땅치 않아, 다소 떨어진 곳에 차를 대 놓은 상태였다.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가려면 종묘와 이어지는 커다란 공원을 통해야 했다. 출근할 때만 해도 나들이객이며 산책을 즐기는 인파로 북적거렸는데, 같은 장소인 것이 무색할만큼 밤 공원은 한적하고 조용하기만 했다.
공원에 들어서니, 일정한 간격으로 선 가로등 불빛이 어두운 공원을 드문드문 밝히고 있었다. 화단을 따라 걷다 보니 습기 어린 풀 냄새가 났다.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울음 소리가 윤태희의 걸음을 은은히 따라왔다. 퇴근길의 밤 산책이 그리 싫진 않았다. 어두운 공원을 천천히 걷다가, 윤태희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나무들 사이로 곳곳에 내걸린 공원 현수막에는 공공장소에서의 흡연, 음주, 노숙을 금지한다는 안내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으나 윤태희는 그다지 준법 정신이 투철한 편은 아니었다.
담배를 입에 물던 윤태희가 주변을 짧게 둘러보았다. 근처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눈에 띄는 사람이라곤 멀찍이 떨어진 벤치에서 노숙하고 있는 사람 한 명뿐이다. 윤태희는 라이터를 꺼냈다. 한 손으로 라이터를 포위하듯 감싸고, 그대로 부싯돌을 당길 때였다.
윤태희가 담뱃불을 붙이다 말고 우뚝 굳었다.
“…….”
일시 정지했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시선이 어느 한곳으로 향했다. 아까 보았던 벤치에 노숙하고 있는 사람을 다시 바라보았다. 윤태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물고 있던 담배가 툭 떨어졌다. 웅크리고 자는 뒷모습이 묘하게 익숙했다.
노숙자는 바로 재겸이었다.
***
깊은 밤, 어둠에 잠긴 공원은 적요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이따금 공원 바깥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낮게 깔린 풀벌레 울음소리가 전부였다. 벤치에 웅크리고 누워 있던 재겸은 어슴푸레 번져 오는 주황색 가로등 불빛을 이불 삼아 선잠에 빠져 있었다. 불현듯,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겸은 누운 자세 그대로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휴대폰을 꺼냈다.
윤태히
며칠 전인가 어설프게 입력해 놨던 이름이 떠올랐다. 가만히 액정을 응시하던 재겸은 무심한 손길로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딱히 놀랍진 않았다. 대충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주에게는 일이 많이 늦어져 오늘은 못 들어갈 것 같다고 연락을 해 둔 참이었다. 정주를 제외하면 전화를 걸어 올 사람은 보나마나 딱 한 명뿐. 역시나 제일 받기 싫은 그 전화였다.
띠로롱, 띠로롱….
재겸은 시끄러운 휴대폰 벨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팔짱을 끼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재겸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니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즉, 누군가 저의 등 뒤에서 가로등 불빛을 가리고 서 있다는 것이다.
재겸이 흠칫하며 고개를 훽, 돌렸다.
“…….”
재겸의 눈을 크게 뜨였다. 이번엔 살짝 놀랐다. 등 뒤에 서 있는 것은 바지 주머니에 한쪽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윤태희였다.
띠로롱, 띠로롱….
기척 없이 서 있던 윤태희가 귓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떼어 냈다. 그제서야 벨 소리가 뚝 끊겼다. 재겸이 손을 짚으며 누였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
“…….”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돌하듯 부딪쳤다. 제법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안녕.”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윤태희였다.
“전화 왜 안 받아?”
윤태희는 물끄러미 재겸을 응시했다. 재겸은 시선을 떨쳐 내듯 고개를 돌렸다.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무신경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받기 싫으니까.”
“왜?”
“너도 안 받았잖아.”
“…….”
그건 그렇지만…. 윤태희는 어쩐지 말문이 막혔다. 재겸이 삐딱한 시선으로 윤태희를 올려다보았다. 윤태희는 얼마간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내 공원을 빙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그러는 넌 여기서 뭐 하는데?”
“지나가는 길이야.”
“그래? 그럼 계속 지나가면 되겠네.”
재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쌀쌀맞고 무심하기만 했다. 대화를 나누고는 있지만, 이건 대화가 아니었다. 재겸은 윤태희의 말을 모조리 튕겨 내고 있었다. 마치 예전에 사서 선생과 학생 관계였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
결국 윤태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재겸이 본청을 나간 건 초저녁 무렵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바깥을 떠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이유야 알 만했지만… 설마 공원 벤치에서 노숙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밤이 늦었어.”
윤태희가 마음을 다잡듯 눈을 꾹 감았다가 뜨더니, 다시 말을 건넸다.
“가자, 데려다줄게.”
허리를 낮추며 재겸의 어깨 위로 손을 얹을 때였다.
“건드리지 마.”
어깨에 손이 닿자마자 재겸은 탁, 소리가 나도록 윤태희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내쳐진 손은 허공에서 그대로 굳었다.
“내가 언제 데려다 달랬어?”
마침내 재겸이 눈꼬리를 세우고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꺼져. 신경 끄고 네 갈 길이나 가. 나는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앞으로 다신 네 차 안 타. 그러니까 이제 데려다주지도 말고, 데리러 오지도 마.”
매몰차게 선을 긋는 말에, 윤태희의 얼굴이 한순간에 무표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