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버스에서 내려 본청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임효문의 연애 상담은 계속되었다. 임효문은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 사람’은 진짜 좀 아니라는 둥, 이제 ‘그 사람’은 만나지 말라는 둥, 연락 오면 그냥 무시하라는 둥,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안타깝게도 하나같이 무용한 훈수들이었다.
“그럴 순 없어. 앞으로 두세 달은 보기 싫어도 봐야 돼… 아무튼 대충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이제 신경 꺼. 그리고 본청 다 왔어. 너는 네 갈 길 가.”
본청 로비에 이르자 재겸은 칼같이 작별을 고했다. 그러나 임효문은 재겸의 뒤를 졸졸 따라 붙더니 “뭐? 왜 계속 볼 수밖에 없는데? 너 혹시 뭐 약점 잡혔어? 아님 돈이라도 꿨냐? 어? 돈이지? 얼만데? 말해 봐. 삼십만 원 이하면 내가 커버 쳐 줄게.” 하며 끝없이 질척거렸다. 이러다가 제1팀 사무실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결국 참다못한 재겸이 “아 좀 꺼져!” 하고 살벌하게 말한 뒤에야, 임효문은 마지못해 발길을 돌려 제 갈 길을 갔다.
재겸은 단지 윤태희가 했던 그 키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그것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니 괜찮겠지 싶어서 편하게 말을 꺼낸 거였는데, 자꾸 알아듣기 힘든 소리만 해 대니 외려 마음만 더 번잡스러웠다. 혹을 떼려다가 혹 하나가 더 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무실 앞에 서게 된 재겸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는데 왜인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막상 윤태희와 대면한다고 생각을 하니 이상한 긴장감이 몰려왔다. 돌연 심장이 쿵쾅거리고 막막한 심정이었다. 이렇게 껄끄러운 감정은 난생처음이다. 재겸 자신도 제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하기만 했다.
겨우겨우 목에 매단 카드키를 찍고 사무실 안에 들어섰다. 제일 먼저 재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수석실이었다. 수석실 문은 어제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사무실 풍경은 여느 때와 같았다.
적어도 재겸이 느끼기엔 그랬다. 재겸은 자신이 들어 온 순간 팀원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는 것도, 또한 몇 초 남짓한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무실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수석실을 향해 온 신경이 쏠렸기 때문이다. 팀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막, 막내 왔어?”
“오, 오늘은 좀 늦었네.”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팀원들이 금세 인사를 건넸다.
“예에… 안녕하세요….”
재겸은 팀원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 배치 구조상 재겸이 제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수석실 앞을 지나쳐서 가야 했다. 재겸은 딴청을 피우며 곁눈질을 했다.
“…….”
가자미 눈을 부릅뜨고 들여다본 수석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도감인지 허탈함인지는 몰라도, 한순간에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재겸은 다리 힘이 빠져서 의자에 철푸덕 앉았다.
“막내….”
그때, 재겸의 옆자리인 고준형이 눈치를 보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수석님 잠깐 어디 가셨는데, 이따 들어오시더라도 절대 기죽을 필요 없어. 알겠지? 뭐,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혼날 수도 있는 거지. 그러니까 당당하게 어깨 펴고….”
재겸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고준형을 바라볼 때였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강이빈이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번쩍 들더니, 고준형을 향해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그에 흠칫한 고준형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닫았다.
“아. 아니야. 미안해. 방금 건 그, 그냥 헛소리였어.”
고준형이 어색하게 미소를 짓더니, 황급히 모니터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건너편에 있던 강이빈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뭐지…?
재겸은 이마를 긁적거리며 팀원들을 힐끔거렸다. 평소엔 이런저런 대화가 끊이질 않는 제1팀 사무실은 오늘따라 조용했다. 팀원들은 저마다 진지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타닥타닥, 열심히 자판을 두들겨 대느라 바빴다.
뭔진 모르겠지만 다들 일이 바쁜가보다, 재겸은 생각했다.
[김시현 : ㅇㅏ.. 고주임님..;;] 16:38
[강이빈 : 준형이 죽고싶니 나대지마] 16:38
그리고 고준형은 메신저로 신나게 야단을 맞는 중이었다.
***
어젯밤, 제1팀 팀원들은 수석과 막내를 빼놓고 단체 채팅방을 개설했다.
팀원들은 막내가 사무실을 무단 탈주한 건을 두고,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가열찬 토론을 벌였다. 여러 의견이 오갔으나, 최종적으로는 ‘수석님이 막내를 혼냈으며, 한창 치기가 넘칠 나이인 막내는 화가 나서 뛰쳐나갔다.’라는 의견이 우세하게 되었다.
물론 팀원들이 아는 윤 수석은 팀원을 혼낸다거나, 싫은 소리 한번 한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당사자 둘 다 입을 열지 않는 상황에서는 가장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그에 팀원들은 막내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평소처럼 대해 주자며 뜻을 모았다. 막내는 사회생활이 처음일 테고, 당장은 분위기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힘들 것이었다.
평소와 비교하면 분위기가 다소 뻣뻣하긴 했지만, 팀원들은 약속한 대로 제법 태연하게 재겸을 대하고 있었다. 때때로 지나친 배려는 오히려 독이 되는 법이요, 관심을 주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가끔은 모른 척해 주는 미덕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런데 고준형이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강이빈 : 준형아 눈치 좀] 16:40
[고준형 : 전 그냥 막내가 신경쓰는것같아서ㅠ] 16:40
[강이빈 : 지금 여기서 니가 제일 신경 쓰고 있어] 16:40
[김시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6:40
[강이빈 : 너만 잘하면 돼ㅡㅡ] 16:40
[고준형 : ㅈㅅ;;] 16:41
그때, 자동문이 열리며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순간 윤태희가 왔나 싶어 재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은 표지호였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꼴이 어딘지 급해보였다. 표지호가 헉헉거리며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 축역부 긴급 소집 떴어요!”
갑작스러운 공지에, 팀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 바로 대기 중인 내근자 전원, 세미나실로 모이랍니다.”
“네? 표 선임님, 무슨 일인데요?”
표지호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벽사단에서 벽보를 붙였어.”
***
세미나실로 이동하는 동안, 강이빈은 재겸에게 벽사단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해 주었다. 월례 보고에 불참했으니 당연히 벽사단에 대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재겸은 이미 임효문에게 설명을 들었지만, 얌전히 강이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강이빈에게 기가 눌려 ‘저 이미 아는데요.’라고 차마 말을 못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냥 복습하는 셈 친 것이다.
설명을 듣는 사이에 세미나실 앞에 도착했다. 재겸은 팀원들의 뒤를 졸레졸레 따랐다. 세미나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파뿌리처럼 자연스럽게 흰머리가 섞인 머리. 고요하고 매서운 눈매. 팔짱을 끼고 있던 상대가 빤히 재겸을 응시했다. 그에 재겸도 부딪쳐 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자 상대가 이것 봐라, 하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허리 숙여 인사하던 강이빈이 급히 손을 뻗어 재겸의 뒤통수를 내리눌렀다. 소 닭 보듯 멀뚱히 서 있는 막내를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아, 이 친구는. 저희 팀 신입입니다.”
간단히 소개를 마친 강이빈은 재겸에게 다급하게 속삭였다.
“재겸이 뭐 해! 인사드려! 석주련 부장님이셔!”
강이빈의 성화에 못 이겨 재겸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석주련은 무표정한 얼굴로 재겸을 꼼꼼히 살펴보는가 싶더니 한참 만에야 “그래.” 하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옆에 있던 나자와 뭐라 뭐라 말을 나눈다. 재겸은 곁눈질로 석주련을 조용히 힐끔거렸다.
나자가 된 이후로 석주련과 대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호랑이 같은 기백을 지닌 사람이다. 재겸이 석주련에게 느낀 첫인상은 이러했다.
세미나실은 사무실의 절반쯤 될 법한 다소 협소한 크기였다.
세미나실 중앙에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된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먼저 와 있던 축역부 나자들은 흡사 울타리처럼 테이블을 에워싼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내근 중인 인원만 모였다더니 세미나실에 모인 나자들은 고작해야 서른 명 안팎이었다. 어제 있었던 월례 보고에 비하면 꽤나 소박한 인원이었다. 이곳에서 재겸이 아는 얼굴이라곤 동행한 팀원들, 딱 네 명뿐이었다.
몇몇 초면인 나자들은 재겸이 소문으로만 듣던 그 신입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기도 했으나, 그뿐이었다. 세미나실 분위기가 자못 심각했기 때문이다. 따로 말을 걸거나 담소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고준형과 표지호는 먼저 세미나실 안쪽으로 들어가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이리 오라는 듯 눈짓을 보내 온다. 그러자 강이빈이 “재겸이. 누나 따라와.” 하며 재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안녕하세요.”
그때, 불현듯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에서 요, 자를 길게 늘인 탓에 지나치게 태평하게 들리는 인사였다. 세미나실 분위기와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재겸은 직감했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아는 얼굴이 하나 더 늘었음을. 재겸의 심장이 활어처럼 펄떡거렸다.
제1팀 팀원들을 비롯하여 세미나실에 있던 나자들이 우르르 인사를 건네자, 차례차례 정중하게 인사를 받아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윤 수석님, 오셨어요?”
석주련을 보좌하던 한주영도 가볍게 인사를 했다. “한 선임님도 계셨네요.” 잠시 그대로 굳어 있었던 재겸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마자 타이트한 진회색 셔츠를 입은 윤태희와 눈이 마주쳤다.
재겸은 저도 모르게 바닥으로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눈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맨얼굴로 나타난 윤태희는 오늘따라 앞머리를 내렸고, 입술에는 자그마한 피딱지를 매달고 있었다. 어제 재겸이 손찌검을 한 흔적이었다.
일단은 보는 눈이 많으니 인사하는 척이라도 하자. 재겸이 어정쩡하게 묵례하는 시늉을 할 때였다. 윤태희의 눈동자가 스르륵 미끄러졌다.
윤태희의 시선이 닿은 곳은 강이빈의 손아귀에 얌전히 붙들려 있는 재겸의 손이었다. 윤태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시선을 거두고, 아무렇지 않게 재겸의 눈을 쳐다 보았다.
‘안녕.’
입 모양만으로 간단히 인사한 뒤, 윤태희는 곧바로 재겸을 지나쳤다.
“…….”
재겸은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어제의 키스에 연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재겸과는 달리, 윤태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해 보이기만 했다. 입술에 붙어 있는 저 피딱지만 아니었다면 ‘아, 어제는 내가 웬 개꿈을 꿨지.’ 하고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윤태희는 태연자약했다. 내내 곱씹고, 신경을 쓰고 있었던 건 저뿐이었나….
그렇게 생각하니, 재겸은 왜인지 살짝 약이 올랐다. 윤태희의 등을 맹렬히 노려보다가, 일단은 강이빈이 잡아끄는 대로 졸졸 따라갔다.
윤태희는 어느새 석주련의 곁에 가 있었다.
“벽사단에서 벽보 붙였다면서요.”
석주련이 옆에 선 윤태희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얼굴은 왜 또 그 모양이야?”
“다쳤어요.”
“어쩌다가.”
“글쎄요….”
윤태희는 무감한 얼굴로 말을 흐리는가 싶더니,
“상대방 허락 없이 키스했다가 싸대기 맞았어요.”
입술에 붙은 피딱지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대꾸했다. 강이빈에게 손을 잡혀 끌려가던 재겸은 순간 발이 꼬여 엉거주춤한 자세로 휘청거렸다.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져 강이빈의 뒤통수에 그대로 박치기를 할 뻔했다.
“…….”
“…….”
“…….”
세미나실에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석주련은 윤태희를 미친놈 바라보듯 쳐다보았다. 윤태희를 어려워하는 다른 팀 나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윤태희와 가까운 편에 속하는 팀원들도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윤태희는 평소 농담을 자주 하지만 저런 류의 농담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윤태희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웃으라고 한 얘긴데. 아무도 안 웃네.”
쟤 혹시 지금 날 엿 먹이는 건가…?
어느새 재겸의 목덜미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