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제정신이야?”
잠시 침묵하던 석주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너는 제정신이 아니다, 라는 뜻도 되었고, 설사 농담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라면 이 또한 제정신은 아닐 것이다, 라는 뜻도 되었다.
그에 윤태희는 별말 없이 픽 웃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벽보는요?”
윤태희가 테이블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테이블을 에워싸고 있던 나자들이 알아서 양옆으로 자리를 비켰다. 강이빈과 재겸도 그 틈을 타서 팀원들 사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간신히 테이블 끄트머리에 끼어들고 나서야 재겸은 나자들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吾周遊四方
不可以木目
人子不爲始
再臨於穢土
辟邪團主白
커다란 테이블 위에 하얀색으로 된 두꺼운 한지가 펼쳐져 있었다. 벽보는 테이블을 반절 이상 덮을 정도로 크기가 컸으며, 먹으로 쓴 한문이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윤태희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겁니까?”
어느새 모두가 벽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태희와 대각선 방향에 자리를 잡고 서 있던 재겸은 보라는 벽보는 안 보고 윤태희만 훔쳐보았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오는 행동이었다. 윤태희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재겸은 벼락같이 벽보를 쳐다보았다.
석주련와 윤태희를 비롯해 수석급 이상인 나자들은 벽보의 글자가 정면으로 읽히는 목이 좋은 위치에 서 있었지만, 재겸이 서 있는 위치에선 고개를 옆으로 눕혀야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팀원들 역시 아까 전부터 기예를 부리듯 고개를 꺾은 채로 글자를 읽고 있었다.
그때, 윤태희가 삐딱하던 자세를 바로 세우는가 싶더니 불현듯 입을 열었다. 한 줄씩 한문의 독음을 읽으며 나지막이 해석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吾周遊四方 오주유사방
“온 세상을 돌아 다녀보아도.”
不可以木目 불가이목목
“나무가 보이지 않는구나.”
人子不爲始 인자불위시
“사람은 근본이 될 수 없으니.”
再臨於穢土 재림어예토
“다시 이 땅에 돌아올 것이다.”
辟邪團主白 벽사단주백
“이하 벽사단의 주인이 말하다.”
소리 내어 독해를 끝낸 윤태희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생각에 잠긴 듯한 눈이었다. 나자들 대부분이 한자에 익숙하기에, 먼저 벽보를 들여다보고 있던 이들 대부분은 벽보에 적힌 내용을 각자 눈치껏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윤태희가 대표로 독음을 한 것은 일종의 신호탄에 가까웠다. 세미나실 안은 보다 본격적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윤태희가 벽보를 가리키며 느릿느릿 물었다.
“이거 어디서 발견했어요?”
석주련을 보좌하며 서 있던 한주영이 대답했다.
“본청 후문에 붙어 있었다고 해요. 한 시간 전쯤 축역부 나자들이 연락을 받고 직접 확보해 왔고요. 범인들 눈에는 그냥 하얀색 종이로만 보일 뿐이고, 귀재의 눈에만 문자가 보이도록 무언가 수를 써 놓은 모양입니다.”
최초 발견자는 종묘 관리 사무소 직원으로, 직원은 후문에 커다란 백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종이를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런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노릇인지, 무슨 수를 써 봐도 한낱 종잇장에 불과한 것이 당최 떨어지질 않았다. 그에 소식을 전해 들은 나자들이 손에 귀기를 실어서 종이를 건드려 보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손쉽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한주영의 설명을 들으며, 윤태희는 테이블에 한 손을 짚고 비스듬한 자세로 벽보를 내려다보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묵묵히 벽보를 바라보는 얼굴이 무표정했다. 어느덧 세미나실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벽사단주. 벽사단의 주인이라….”
석주련이 싸늘한 얼굴로 말을 곱씹었다. 조용히 머리를 쓸어 올리던 윤태희는 테이블 한쪽에 반쯤 걸터앉더니 차분히 입을 열었다.
“우선… 이 벽보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아마 세 가지겠죠. 첫째, 벽사단이 실재한다는 것. 둘째, 벽사단을 이끄는 수장 격이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셋째… 단주는 이 모든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다는 것.”
축역부 제4팀 수석 오기웅이 동의를 표하며 곧바로 말을 받았다.
“예, 맞습니다. 더불어 이렇게 한문을 쓴 것, 사람을 ‘인자人子’라고 지칭해 쓰는 걸 보면 벽사단의 주인 또한 당연히 오래 묵은 영귀일 거고요.”
은유로 이뤄진 내용은 모호하면서도 의미심장했다. 그러나 본청 후문에 벽보를 붙인 의도쯤은 불 보듯 명확하게 보였다. 벽사단의 주인은 이 벽보를 통해 벽사단,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본청에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
오기웅이 턱을 매만지며 의견을 더했다.
“본청에서 벽사단을 상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저쪽에서도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저희 보라고 이렇게 할 리가 없으니….”
윤태희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진작 알았겠죠. 여혜 선사를 불러다가 직접 물어봤잖아요. 이쪽 동향을 그대로 갖다 바친 꼴입니다. 그게 가장 큰 패착이었어요. 이게 바둑이라면 우린 지금 백돌로 대국을 시작한 겁니다. 암행부가 실수한 덕분에요.”
암행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듯한 어조에, 순간 당황한 오기웅이 저도 모르게 세미나실 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축역부 나자만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암행부 나자가 있나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도발이네요. 대담한데요.”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한주영이 정확한 한 줄 평을 내놨다. 마침내 석주련이 어둡게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술래잡기를 하자는군. 아예 판을 깔겠다는 거야.”
벽보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싸우자, 혹은 나 잡아 봐라, 일 것이다. 이로써 석주련의 직감은 틀리지 않은 셈이다. 처음 벽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불길하고 위험한 싹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 땅에 돌아온다는 건 누구를 얘기하는 거죠?”
그때, 고준형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온 세상을 두루 다녀 보아도 나무를 볼 수가 없고, 인간은 대표가 될 수 없으니 다시 이 땅에 돌아올 것이다. 벽사단의 주인이 말하다.
다시 이 땅에 돌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러고 보니 내용상으로는 누가 이 땅에 돌아온다는 것인지 명확한 주어가 적혀 있지 않았다. 벽보를 붙인 의도, 혹은 벽사단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던 나자들은 고준형이 던진 질문에 하나둘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야 당연히 귀신, 즉 단주 스스로를 얘기하는 게 아닐까요?”
“그렇지. 사람은 근본이 될 수 없다고 했으니까요.”
“그럼 반대로 벽사단. 귀신이 근본이 되겠다는 뜻이겠죠.”
“한낱 귀신 주제에 이제는 인간 흉내까지 내겠다는 건가.”
그렇게 단주, 즉 귀신을 의미한다는 의견이 우세할 때였다.
“방상시.”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
“…….”
“…….”
찬물을 끼얹은 듯, 세미나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석주련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테이블에 걸터앉아 가만히 나자들의 웅성거림을 듣고 있던 윤태희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세미나실 안, 모든 이의 시선이 우르르 쏠렸다.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재겸이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방상시. 난데없는 호명은 모두를 당황케 만들었다. 석주련은 테이블 끄트머리에 서 있는 소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재겸은 뚫어져라 벽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문제를 푸는 것처럼 몰두한 얼굴이었다. 집요한 시선이 한자의 획을 따라 돌아다녔다. 재겸이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건 파자(破字)(한자의 자획을 풀어 나눔. ‘李’ 자를 분해하여 ‘木子’라 하는 따위이다.)예요.”
그 말과 동시에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던 윤태희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찰나의 순간, 윤태희의 눈동자에 선명한 이채가 휙 스쳐 지나갔다.
윤태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파자?”
그에 재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팔을 뻗어 벽보의 어느 한 부분을 가리켰다. 재겸이 검지로 짚은 곳은 ‘不可以木目’ 두 번째 줄이었다.
“보통 뭔가를 본다고 할 때… 목目자는 잘 안 쓴다고요. 아니, 쓰긴 쓰는데… 아무튼 만약 저였다면 굳이 이거 안 쓰고 그냥 다른 한자로 썼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뭔가 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재겸은 아주 열중한 얼굴로, 뭔가에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여기… 목木에 목目을 붙여서, 상相자를 만들려고 했던 거라면 이해가 돼요. 그럼 목目자를 꼭 써야만 하는 이유가 생기니까요.”
이어진 설명에, 곁에 서 있던 팀원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재겸을 쳐다보았다. 다른 나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재겸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재겸은 오로지 벽보만 바라보느라 남들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여기. 각 줄에 제일 마지막 글자를 보면….”
재겸이 손끝으로 한자를 차례차례 짚어 나갔다.
吾周遊四(方) 오주유사(방)
세상을 두루 돌아보아도
不可以(木目) 불가이(목목)
나무를 볼 수가 없으니
人子不爲(始) 인자불위(시)
사람은 근본이 될 수 없다
“이렇게 한 글자씩만 세로로 독음만 떼어서 읽어 보면 ‘방상시’가 되고. 그리고 여기서 만약에, 방상시만 남겨 두고 글자를 다 지운다면….”
方 木目 始 방 상 시
再臨於穢土 재림어예토
내내 조각을 짜맞추듯 집중해 있던 재겸이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방상시가 이 땅에 다시 돌아오리라.”
그 말을 끝으로, 세미나실은 죽음과도 같은 침묵에 휩싸였다.
벽보를 노려보던 재겸은 얼마간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만. 방상시가 돌아온다고?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탈은? 방상시는 선대 나례청의 주인이고, 오래전에 사라진 거 아니었나? 아니, 잠깐. 그럼 벽사단의 주인이라는 그 귀신하고 방상시는 무슨 연관이….
“…….”
재겸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현실로 돌아온 눈동자에는 선명한 낭패감이 서려 있었다. 재겸은 그제서야 모든 사람들이 저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갑자기 모든 사고가 정지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개 수습 나자가 방상시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의심을 받을 게 아닌가?
재겸은 맹세컨대 이렇게 나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계속 윤태희를 향해서 신경이 쏠리기에 일부러 벽보만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벽보의 내용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그렇게 눈에 띈 것일 뿐이었다.
몹시 당황한 재겸은 저도 모르게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세미나실에서 마주친 이후로 내내 눈을 피하기만 하다가, 제대로 시선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헌데 윤태희는 아주 이상한 표정으로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태희는 드물게도 희미하게 인상을 쓴 채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윤태희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아주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에 힘을 주고 있었으나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았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물끄러미 재겸을 보고 있었다.
“…….”
재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윤태희를 바라보던 재겸은 ‘뭐라도 좋으니 말 좀 해라.’ 염원을 담아서 눈빛을 보냈다.
신호가 통했는지, 윤태희가 홀연히 말을 뱉었다.
“방금 끝내주게 섹시했어.”
윤태희가 재겸에게 오늘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