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심각한 상황에 걸맞지 않는 생뚱한 말이었다. 덕분에 재겸에게 집중되었던 시선이, 일제히 윤태희를 향해 우르르 쏠렸다. 이번엔 모두가 윤태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에 잠겨 있던 세미나실 분위기가 몹시 이상해졌다.
“…….”
“…….”
“…….”
제1팀 팀원들은 하나같이 기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다른 나자들 또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에 윤태희는 별안간 손목을 들어 시계를 한 번 보는가 싶더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벽보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섹시? 갑자기 뭔 소리야…?
재겸은 섹시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저번에도 한 번 듣긴 했으나, 당시에 그 뜻을 물었을 때 윤태희가 답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간 앞뒤 맥락을 미루어 보았을 때 칭찬의 의미로 한 말이라는 건 대충 짐작했다.
어쨌든 괜찮다는 뜻인가…?
재겸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윤태희를 힐끔거렸다.
“이름이 김재겸이라고 했던가.”
그때, 내내 침묵하던 석주련이 입을 열었다.
“나이에 비해 한자를 아주 잘 아는구나.”
재겸은 그대로 멍하니 얼어붙었다.
생각지 못한 지적이었다. 도서실에서 고서를 읽고, 옛말에 능통한 모습을 보였다가 윤태희에게 덜미를 잡혔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재겸은 말문이 턱 막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날카로운 석주련의 눈동자는 마치 저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아, 저기, 그게….”
당황한 재겸이 시선을 내리며 말을 더듬거릴 때였다.
“요즘 어린 친구들 흡수력이 빨라서, 한자 같은 거 생각보다 금방 배워요.”
때마침, 윤태희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재겸이 멈칫하며 눈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윤태희가 한쪽 눈썹을 슥 움직였다가 재빨리 제자리에 두었다.
“…….”
재겸은 문득 손바닥이 간지러워지려고 했다. 윤태희는 곤경에 처한 재겸을 아무렇지 않게 쑥 구해 냈다.
나이 어린 신입이 한문을 잘 아는 경우는 흔치 않았지만,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나자를 지망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나자가 되기 전부터 미리미리 한자를 익혀 놓는 이들도 제법 있는 편이었다. 때문에 간혹 1년차 나자보다 갓 입청한 신입이 한문에 더 능통한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리고 글자만 놓고 보면 그렇게 어려운 한자도 아니니까요.”
새삼스러울 게 뭐 있냐는 듯, 윤태희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럼에도 석주련은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으로 재겸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자를 알아도 파자를 짚어 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
그 말대로 한자에 능통한 나자들 중에서 파자를 추측해 낸 사람은 재겸뿐이었다. 어딘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지적에 윤태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그야 그렇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저 ‘아무나’ 골라 올 정도로 안목이 형편없진 않아요.”
옅은 미소를 띠며 능청스레 받아쳤다. 재겸을 바라보고 있던 석주련이 고개를 돌려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윤태희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
석주련의 낯이 일순 미묘해졌다.
찰나였지만 윤태희와 저 사이에 희미한 전류가 튀었기 때문이다. 그건 기 싸움의 체감과 비슷했다. 워낙 순식간이었기 때문에 착각일지도 몰랐다.
“뭐… 우리 수습님이 워낙에 좀 똘똘하세요.”
윤태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윤태희가 데려온 후임이 제법 괜찮은 재목이라는 것은 석주련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얼마 전 본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재겸이 시험 날 사슴을 보았다는 소문은 석주련의 귀까지 흘러든 상태였다.
사실, 석주련은 윤태희에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꽤 일찍부터 재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시험 응시생들의 신상을 정리한 서류를 받아 보았을 때도 석주련은 제일 먼저 재겸의 프로필부터 찾아 읽었었다.
석주련으로서는 재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것이 당연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윤태희의 눈에 든 아이였다. 석주련은 윤태희의 본 얼굴에 근접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석주련이 알고 있는 윤태희는 ‘제 사람’이라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제 후임을 건드렸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윤태희가 시험날 신입을 때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석주련이 놀랐던 이유 역시 그 때문이었다. 윤태희는 노골적으로 ‘제 사람’을 감싸고 돌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언뜻 느끼기에 윤태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느슨한 태도처럼 보였으나, 석주련은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아까부터 자신의 등 뒤로 제 후임을 빼돌려 놓은 채, 아주 자연스럽게 모든 이목을 휘어잡고 있었다.
“…….”
석주련은 얼마간 말없이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석주련 역시 자신의 안목이 나쁘지 않다고 자평하는 윤태희의 말에 이견은 없었다. 일개 수습 나자가 벽보의 숨은 뜻을 찾아냈다. 앳된 소년은 석주련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뛰어났다. 어쩌면, 불쾌할 정도로.
마침내 석주련은 벽보로 시선을 던졌다.
방상시가 이 땅에 돌아오리라.
벽보를 노려보는 석주련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석주련이 아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동시에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선대 나례청의 주인이던 방상시는 오래 전에 사멸했다. 그 증표가 현재 나례청장의 손에 있었다. 방상시의 탈, 이른바 황금사목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재겸의 추측대로라면 벽사단의 단주는 방상시가 다시 돌아올 것을 암시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단주는 방상시에 대해 어떻게,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불현듯 석주련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편린이 떠올랐다. 십수 년전의 기억이 두통처럼 관자놀이를 파고 들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때 그 예언은 피했어. 그러니까 이건 그저… 방상시를 참칭하여 나례청에 혼란을 일으키려는 귀신의 술수일 뿐이다.’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석주련이 입을 열었다.
“한 선임.”
석주련의 호명에 뒤로 물러나 있던 한주영이 다가왔다.
“벽보 가져가서 파쇄해.”
갑작스러운 명령에 한주영은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묵묵히 상관의 말을 따랐다. 벽보를 챙겨 세미나실을 벗어나는 한주영의 뒷모습을 나자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볼 때였다. 석주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벽보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알겠나?”
그것은 명백한 함구령이었다. 벽보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이 안에서 나온 모든 이야기를 바깥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래야 하는 이유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으나, 석주련의 태도가 워낙 고압적이라 나자들은 뭐라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재겸은 윤태희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재겸은 사고를 쳤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복잡한 상태였다. 괜히 벽보를 해석하는 바람에 자칫 사달이 날 뻔했다. 윤태희가 어찌어찌 상황을 수습하고 대충 무마해 주었으나 재겸은 가슴이 조마조마했었다.
벽보의 숨은 뜻을 찾아내서 뭔가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눈치라도 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석주련은 표정이 좋지 않았고, 재겸이 꺼내 놓은 해석에 대해 어떠한 의견도 달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입도 뻥끗하지 말라고 못 박으니, 어떻게 보나 상당히 찝찝한 마무리였다. 여러모로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벽보 인멸, 그리고 함구령을 끝으로 오늘 소집은 별다른 결론 없이 흐지부지되었다. 한껏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나자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제1팀 팀원들이 문간으로 향하자, 재겸도 쭈뼛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김재겸. 잠깐 남아서 얘기 좀 하지.”
석주련은 세미나실을 나가려는 재겸을 불러 세웠다. 붙잡힌 순간 재겸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설마 뭔가 눈치챈 건가? 아까 윤태희가 수습해서 의심을 거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체 무슨 용건이기에…
덜컥 불안해진 재겸은 저도 모르게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윤태희가 뭐라 핑계를 대고 함께 남아 주기를, 아까처럼 난관에서 구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문간을 나서던 윤태희는 재겸을 힐끔 돌아보는가 싶더니 이내 일언반구 없이 세미나실을 훌쩍 빠져나갔다.
***
석주련과 면담을 마치고 복도로 나온 재겸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복도 한쪽에 쪼그려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릎 위로 팔꿈치를 걸친 헐렁한 자세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윤태희였다.
눈이 마주치자 윤태희는 손에 쥔 휴대폰을 흔들었다.
“안녕.”
때늦은 인사에, 재겸은 윤태희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
재겸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엔 개미 한 마리 없이 휑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재겸은 다시 윤태희에게 눈길을 주었다. 쪼그려 앉아 있는 탓에 눈높이가 낮아서, 메산이를 볼 때처럼 시선을 내려야만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재겸이 입을 열었다.
“…안 갔어?”
“같이 가려고 기다렸지.”
깔끔한 대답과 함께 윤태희가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갈까?”
먼저 간 줄로만 알았던 윤태희는 알고 보니 복도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태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재겸은 한 발자국 뒤에서 윤태희의 등을 보며 따라갔다.
“…왜 기다렸어?”
재겸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길 잃어버리실까 봐요.”
앞서 걷는 등에서 농담기 섞인 대답이 흘러 나왔다.
“…….”
재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윤태희도 뭐라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텅 빈 복도에 두 사람의 구두 굽 소리가 뚜벅뚜벅 교차하며 울려 퍼졌다.
둘은 그렇게 얼마간 말없이 걸었다.
윤태희는 걷는 내내 줄곧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티나게 거리를 두는 재겸과 달리 윤태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해 보였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윤태희는 오늘따라 지나치게 말이 없었다.
재겸 또한 묵묵히 윤태희의 등을 바라보며 걸었다. 분명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없다. 뒤에서 보니 윤태희는 살짝 구부정한 자세로 걷는 게 습관인 듯했다. 딱 맞는 셔츠 덕분에 날개뼈의 윤곽이 어렴풋이 비쳤다.
재겸이 입을 연 것은 복도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어디 가?”
세미나실은 별관 3층에 있었다. 강이빈과 함께 이곳에 왔을 때는 엘리베이터를 탔었다. 그런데 윤태희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그 옆에 있는 비상 계단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열고 있었다.
“나 여기 엘리베이터 안 타는데.”
윤태희가 문을 반쯤 열다 말고 재겸을 돌아보았다.
“너 저번에 옷 사러 갔을 땐 탔잖아.”
“거긴 백화점이라, 본청에선 안 타.”
“뭐가 다른데?”
“여기선 쓸데없이 안면 트게 되니까.”
복도나 로비는 오가는 사람도 많고 서로 갈 길이 있으니 무관심하게 지나치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선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가볍게 말을 섞거나 인사를 주고받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게다가 윤태희는 지금 맨얼굴이었다. 윤태희는, 자신의 맨얼굴을 보고 ‘윤태희’라는 걸 알아보는 이가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본청 안에서 탈을 쓰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
윤태희를 응시하던 재겸의 낯이 살짝 미묘해졌다. “왜?” 윤태희가 묻자 재겸은 고개를 저었다. “엘리베이터 타고 싶으면 타도 돼.” 본인은 계단을 통해 따로 가겠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럴 거면 뭐 하러 기다렸냐…. 재겸이 됐다는 듯 가만히 턱짓을 했다.
윤태희는 문을 열고 먼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재겸이 들어올 때까지 팔을 뻗어 문을 잡아 주었다. 문을 잡고 선 윤태희의 곁을 지나쳐서 재겸은 비상구 안으로 들어섰다. 스치듯, 예의 향수 냄새가 훅 끼쳤다.
재겸이 뒤따라 들어오자 윤태희가 잡고 있던 문을 놓았다. 텅, 소리와 함께 철문이 무겁게 닫혔다. 비상구 안은 어둑어둑했다. 윤태희는 재겸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비상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재겸도 계단 난간을 손으로 붙잡고 터벅터벅 층계를 밟았다. 복도를 걸을 때보다 구두 굽 소리가 훨씬 더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비상 유도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초록색 불빛이 어딘지 은밀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둘은 묵묵히 계단을 내려갔다. 재겸은 윤태희보다 서너 칸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복도에서 그랬듯 일부러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체감상 한 층 정도 내려온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윤태희였다.
“부장님이랑 안에서 무슨 얘기 했어?”
계단을 내려가던 발걸음이 멈칫했다. 갑작스러운 면담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재겸은 석주련이 무언가 눈치채고 자신을 취조하거나, 벽보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석주련과 나눈 대화는 재겸이 우려했던 것과는 전혀 무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
얼마간 침묵하던 재겸이 입을 열었다.
“별 얘기 안 했어.”
간결한 대꾸에 윤태희는 잠시 말이 없다가,
“그래…?”
더는 묻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또다시 구두 굽 소리만 났다. 정적이 깊어지려고 할 때였다. 윤태희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 해?”
“별생각 안 해.”
윤태희는 이번에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 방금 건 거짓말이었다. 재겸은 현재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았다. 석주련과 나눴던 대화도 신경이 쓰였고, 벽보에 관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 벽보는 뭘까. 벽사단과 방상시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석주련이 벽보를 없애라고 한 이유는 뭘까. 방상시가 다시 돌아온다는 건 뭘까.
그리고 너는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지.
“야.”
재겸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너 남색가냐?”
재채기처럼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
계단을 걸어 내려가던 윤태희가 우뚝 멈춰 섰다. 윤태희가 멈추자 재겸도 똑같이 멈춰 섰다. 재겸은 층과 층을 잇는 평지 구간에 서 있었지만 윤태희는 그로부터 서너 칸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작은 소리조차 크게 울리는 비상 계단 내부는 구두 굽 소리가 끊기자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적막해졌다.
윤태희가 입을 연 것은 한참 만의 일이었다.
“남색가….”
윤태희가 혼잣말처럼 단어를 곱씹었다.
“그거 사어 아닌가?”
마침내 윤태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몇 칸 떨어진 거리에서 마주한 윤태희의 표정은 어딘지 오묘했다. 눈을 살짝 찡그린 상태였지만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농담처럼 들려온, 질문과 동떨어진 답에 재겸이 미간을 좁혔다.
재겸은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요즘은 안 쓰는 옛말이라도, 벽보에 적힌 한문을 막힘없이 해석한 윤태희가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재겸이 단칼에 쏘아붙였다.
“알아들었으면서 딴지 걸지 마.”
윤태희는 재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현듯 가볍게 뒷짐을 지었다. 천장이나 벽을 슥 둘러 보는가 싶더니,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윤태희가 가까이 다가오자 재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어제의 위압감이 스멀스멀 살아났다. 갑자기 심장이 조여들고, 손발이 저릿해지는 느낌이었다.
“…….”
“…….”
마침내 한 계단 아래서 멈춰 선 윤태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별생각 없다더니… 내 생각하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