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11)화 (111/348)

#111

“별생각 없다더니, 내 생각 하고 있었어?”

재겸은 멈칫하며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반사적으로 잡아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윤태희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딴, 딴소리하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재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뭘? 아… 나 남색가냐고?”

한 계단 아래에 있던 윤태희가 느슨히 뒷짐을 진 자세로 남은 층계를 딛고 성큼 올라섰다. 한 칸 아래에 있을 땐 비슷했던 눈높이가 평소의 격차대로 돌아왔다. 윤태희가 말했다.

“아닌데. 남색가.”

성의 없이 느껴질 정도로 간결하고 깔끔한 대답이었다.

“그럼 어제는 왜 그런 건데?”

“뭐가?”

“너 어제 나한테 키쓰했잖아.”

윤태희는 말없이 재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재겸이 줄곧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탓에 윤태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재겸의 이마에 박혀 있는 상태였다. 불현듯, 윤태희는 저 삐뚤빼뚤한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동그란 이마에 잇자국을 남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윤태희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고개를 숙였다가, 재겸의 관자놀이 부근에서 우뚝 멈췄다.

“궁금해?”

농담처럼 속삭이는 음성에서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재겸이 고개를 들었다. 기울어진 각도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윤태희는 눈을 반쯤 내리뜨고 재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냐면… 나는 주먹질보다는 키스를 더 잘해서.”

깊숙이 파고든 향수 냄새 때문인지 숨이 막혔다. 어두운 비상계단은 지나치게 조용했고, 쿵쿵 뛰는 맥박이 환청처럼 귓가에 들어찼다. 가까워진 향수 냄새를 의식한 순간부터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재겸은 애써 동요를 억누르며 후다닥 시선을 피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피 터지게 주먹다짐하느니 키스가 낫지 않나?”

윤태희의 말인즉슨, 싸움을 면피하기 위해 입을 맞췄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그렇게 본다면 상황 자체는 윤태희가 의도한 대로 흘러간 셈이다. 예상치 못한 키스에 놀란 재겸이 줄행랑을 치면서 자연스레 싸움은 중단되었으니까. 만약 도망치지 않았더라도 전의가 푹 꺼진 상태였으므로, 이미 그 시점에서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유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다. 물론 윤태희는 천성이 해괴하고 종잡을 수 없는 놈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평소엔 뭔 짓을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겨 왔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윤태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였으면 차라리 싸웠으면 싸웠지, 같은 남자한테 그런 짓 안 해.”

재겸이 머뭇거리며 쏘아붙이자, 윤태희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래? 난 해.”

어두운 비상계단, 비상 유도등에서 은은히 번져 나오는 불빛이 윤태희의 얼굴에 묘한 음영을 만들어 냈다. 잠시 침묵하던 윤태희가 재겸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장난스레 속삭였다.

“모르나 본데, 키스 정도는 별거 아니거든.”

재겸은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마음속에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진 무언가는 알 수 없는 불쾌한 파문이 되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정주가 해 줬던 조언이 떠올랐다. 남자 둘이 입을 맞췄다는 이야기에 정주도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반응했었다. 요즘 세상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그냥 넘기면 된다고 했다.

“너한텐 별거 아닐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그런데 재겸은 그게 잘 안 됐다. 윤태희에게서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자존심이 상했다. 윤태희에게는 별거 아니었던 그 입맞춤에 하루 종일 끌려다녔다는 사실이 새삼 분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왜?”

“기분 나쁘니까.”

“…….”

툭 뱉은 말에, 윤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재겸을 내려다보았다.

“그랬어? 내가 또 그걸 몰랐네….”

한참 만에 성의 없이 중얼거리던 윤태희가 불쑥 손을 들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재겸의 슈트 재킷에 닿았다가, 단추 하나를 툭 건드렸다.

“근데 어쩌지? 나는 네 기분 같은 건 상관없는데.”

윤태희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재겸을 바라보았다.

“…….”

윤태희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싸우기 싫다면서 걸핏하면 심기를 건드리고, 다치게 하기 싫다면서 매번 상처 주는 말을 한다. 평소엔 허락도 없이 몸에 손을 대면서, 막상 싸울 땐 손끝 하나 대지 않는다. 재겸이 눈을 꾹 감았다. 분위기가 뒤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넌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뭐가?”

“왜 항상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고.”

재겸은 스르륵 눈동자를 들어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싸우는 게 싫다면 처음부터 싸울 일을 만들지 마. 어제도 마찬가지야. 애초에 네가 먼저 날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어.”

사실 싸워서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은 재겸도 잘 알고 있었다.

아까 전, 석주련은 윤태희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때 재겸은 처음으로 경각심을 느꼈다. 석주련의 반응을 보아하니 윤태희가 크게 다쳐서 나타났다면 뒷수습을 하는 데 골치가 아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만약 싸움이 붙었다고 해도 전처럼 고삐 풀고 뒤지게 패지는 않았을 테지만, 어쨌든 윤태희는 지금보다는 훨씬 크게 다쳤을 것이라는 사실은 불 보듯 훤했다. 어제의 감정이 희석된 상태에서 차분히 생각해 보니 결과적으로는 어제 싸우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었다.

“내가 얼마나 참고 넘어가는지, 내가 널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 넌 몰라.”

재겸은 남의 단추를 멋대로 만지작거리는 윤태희의 손을 탁 쳐 냈다. 내친 손은 그대로 허공에 머물렀다. 윤태희는 허공에 떠오른 제 손에 스르륵 시선을 주었다.

“아니, 알아. 네가 날 봐주고 있다는 거. 예전 같았으면 진작에 뼈 하나 부러졌을 건데….”

윤태희는 얼굴 근처로 손을 가져오더니, 마치 물건을 살피는 양 앞뒤로 돌려 가며 제 손을 구경했다. 보란 듯이 능청을 떠는 행동에서 무게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근데, 혹시 그거 알아?”

윤태희가 픽 웃으며 재겸에게 시선을 던졌다.

“봐주고 넘어가는 건 너만 그런 게 아니야.”

윤태희가 눈을 가물거리며 장난스레 눈매를 좁혔다.

“아까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곤란해.”

“뭐?”

“석 부장은 눈치가 귀신처럼 빠른 사람이거든.”

“…….”

뜬금없이 날아든 화제에 재겸은 말문이 막혔다. 윤태희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윤태희는 세미나실에서 파자를 짚어 내고, 석 부장을 비롯한 나자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았던 이전 상황을 말하고 있었다.

“이번엔 대충 수습하긴 했지만, 꼬리가 점점 길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밟힐 거야. 그러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해 줬으면 좋겠는데.”

윤태희는 아주 능숙하게, 그리고 손쉽게 대화의 흐름을 가져갔다.

“아…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짚고 넘어갈까?”

윤태희가 고개를 숙이더니, 소중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것처럼 속삭였다.

“석주련이랑 별 얘기 안 했다… 이딴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넘어가 주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윤태희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다정했으나 ‘부장님’이라는 호칭은 어느새 ‘석주련’으로 바뀌어 있었다. 분명히 잘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순순히 떠내려간 줄 알았던 화제가 불시에 뒤통수를 쳤다. 윤태희는 때때로 게으른 수렵꾼이 된다. 보란 듯이 빈틈을 내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려는 함정일 뿐이고, 지금처럼 기회를 노려서 올가미를 당긴다.

“나한텐 별 얘기 아니라서 별 얘기 안 했다고 말했을 뿐이야.”

재겸이 낯을 굳히며 윤태희의 말을 받아쳤다.

“아니,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이 된 윤태희가 고개를 저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말은 허락 없이 선을 넘지 말라는 거야. 그게 별 얘기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내가 할 일이야. 그리고 네가 할 일은 내가 정해 준 자리에서, 정해 준 대로 움직이는 거고.”

재겸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왜 내 옆에 붙어 있는지 잊지 마. 넌 내 장기말이야.”

마치 스스로에게 되뇌는 듯이….

“그러니까 네 기분이나 생각 같은 건 필요 없어.”

재겸은 한순간에 머리 위로 구정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이 되었다.

“…….”

장기말. 그 단어를 듣자마자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얼어붙는 듯했다. 재겸은 저와 윤태희의 관계가 살가운 친구 사이는 아닐지언정 서로를 지켜 주는 동료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재겸은 지금 이 순간 깨달았다.

“맞아. 나는 네 장기말이야.”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데, 혹시 그거 아냐?” 재겸은 또렷한 시선으로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입꼬리는 삐뚜름히 올라가 있었다.

“너도 나한텐 장기말이야.”

순간, 윤태희의 눈가 한쪽이 설핏 떨렸다.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 나는 너랑 손을 잡은 거지, 네 손바닥 안에 들어가 준다고 한 게 아니야. 네가 놓는 수대로 움직여 주길 바란다면 나한테 이딴 식으로 굴지 마.”

재겸이 한 걸음 성큼 다가오더니, 구둣발을 들어 윤태희의 구두 앞코를 콱 눌러 밟았다. 그에 윤태희의 눈이 살짝 커질 때였다. 재겸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아까 실수한 건 미안한데. 여기에 날 데려온 건 너니까 그 정도 수습은 당연히 네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설마 입청하고 나서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너는 수를 제대로 못 읽은 거네.”

재겸은 불현듯 말을 멈추는가 싶더니,

“그래서 장기나 제대로 두겠냐?”

삐딱한 눈으로 윤태희를 올려다보았다.

“…….”

윤태희는 말없이 재겸을 내려다보았다. 재겸 또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윤태희를 응시했다. 서로를 쳐다보는 시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원래 이렇게 말을 잘했었나?”

윤태희가 한참 만에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입만 열면 개 같은 누구한테 배웠어.”

비아냥을 끝으로 말을 마친 재겸은 그대로 미련 없이 윤태희의 곁을 지나쳤다. 왔던 길을 거슬러 계단을 오르니 윤태희가 어김없이 팔을 붙잡아 왔다.

“손대지 마.”

재겸은 손길을 떨쳐 내듯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뿌리치는 힘의 반동으로 작게 휘청거리자, 윤태희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다시 손을 뻗어 재겸을 확 끌어당겼다. 미처 중심을 잡기 전에 층계를 딛던 발걸음이 꼬였다. 당기는 힘에 끌려온 재겸은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

“비켜.”

어느새 등 뒤에는 벽이, 눈앞에는 윤태희가 있었다. 벽과 윤태희 사이에 끼어 버린 재겸은 윤태희를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강한 악력이 팔을 아프게 움켜쥐었다. 윤태희가 말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재겸은 윤태희의 말을 무시하며 팔을 강하게 뒤틀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 치우고, 비키라고.” 재겸은 팔을 움켜쥔 손을 떨쳐 내기 위해서 윤태희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윤태희의 가슴팍에 손을 댈 때였다. 가슴을 짚고 그대로 힘을 실어 밀어 내려는데, 재겸은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

셔츠 한 겹 너머로, 윤태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래. 너는 계속 이렇게 밀어 내.”

손바닥으로 생생히 옮아 오는 느낌에, 재겸은 저도 모르게 손을 확 뺐다. 아니, 빼려고 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태희가 재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러자 맥동하는 감각이 진해졌다.

“정해 준 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면, 그래. 네 맘대로 해. 계속 그렇게 제멋대로 굴어. 밀어 내고 도망가. 내가 널 믿지 못하게 해. 그게 네가 할 일이야.”

윤태희가 음영을 담은 얼굴로 재겸을 내려다보았다. 음영이 드리운 이목구비가 묘하게 쓸쓸해 보였다. 멍하니 굳어 있던 재겸이 멈칫하여 고개를 들었다.

“지금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번엔 윤태희가 재겸의 구두 앞코를 지그시 눌러 밟았다.

“내가 키스를 하면, 넌 뺨을 때리면 된다는 소리야.”

그 말을 끝으로, 윤태희는 재겸의 턱을 가볍게 쥐더니 곧장 고개를 틀었다. 그대로 입술을 빨렸다. 비상구 안은 어두웠고, 적막했으며, 익숙한 향기가 났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재겸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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