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12)화 (112/348)

#112

첫 키스의 여파가 수마의 형태로 나타났다면, 두 번째 키스의 여파가 온 오늘은 정반대였다.

평소 머리만 대면 드르렁 곯아떨어지던 재겸은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다 결국은 제대로 자지 못했다. 차라리 저번처럼 혼곤하고 깊은 잠 속으로 내몰리길 바랄 지경이었으나 두 번째 키스는 재겸에게 끔찍한 불면의 밤을 안겨 주었고, 동 틀 녘이 되어서야 겨우 선잠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재겸은 또다시 잠결에 비몽사몽 눈을 떴다.

커튼을 쳐 둔 탓에 방 안은 어두웠고, 새벽인지 아침인지 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옆으로 누워 새우잠을 자던 재겸은 몸을 뒤척이며 정자세로 바르게 누웠다. 익숙한 천장을 몽롱하게 응시하던 눈이 다시금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몇 시지? 그만 자고 일어나야 하나….

“더 자도 돼, 아직 새벽이야.”

그때, 누군가 곁에서 소곤거렸다. 몹시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어?

잠기운에 파묻혀 있던 오감이 단번에 선명해졌다. 재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홱 틀었다. 저의 방, 저의 침대 위에 누군가 머리를 기댄 채 모로 누워 있었다.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건 다름 아닌 윤태희였다. 재겸은 잠기운이 싹 가셨다.

“뭐, 뭐야? 너….”

재겸은 깜짝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어째선지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정자세로 누운 그대로, 고개만 돌려 윤태희를 바라보는 지금의 상태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집채만 한 바위에 몸이 깔린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느낌이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주 편안하고 나른해서 어느새 몸을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이 스르륵 사라졌다. 재겸은 몸에서 완전히 힘을 빼고, 침대가 끌어당기는 힘에 얌전히 파묻혔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재겸이 묻자, 윤태희가 말했다.

“네가 직접 데려다 놓은 거 아니었어?”

아 맞다. 그랬었지….

그 말을 들으니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제는 회식이 있었고, 술에 취해 잠이 든 윤태희는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않았다. 나 몰라라 할 순 없는 노릇이라 결국 제 방에 데려와서 재웠더랬다. 재겸은 눈을 흘기며 생색을 냈다.

“너 길에 버리고 오려다가 데려온 거야.”

“그랬어? 나 길에서 자도 상관없는데.”

태평한 말에 재겸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야, 요즘 같은 날씨에 길에서 자면 너 풍 와.”

풍? 머리를 비스듬히 괴고 있던 윤태희가 팔에 얼굴을 묻더니 큭큭거리며 웃었다.

“왜 웃어? 그냥 겁주려고 하는 말 같냐? 진짜야.”

재겸은 윤태희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 오래전, 어느 마을에 갔다가 입 돌아간 사람을 보았던 일화를 얘기해 주었다. 그러다 샛길로 빠져 엉뚱한 화제로 이어졌지만, 윤태희는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둘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나란히 누워서 도란도란 대화를 주고받았다.

“야. 근데….”

멀뚱멀뚱 천장을 올려다보던 재겸이 불쑥 입을 열었다.

“혹시 이거 꿈이냐?”

재겸은 고개를 홱 돌려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

윤태희는 잠시 숨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 눈을 반쯤 뜨고 저를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을, 윤태희는 아주 신기하다는 듯이 들여다보았다.

“…아니, 꿈 아니야.”

그래? 재겸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다시금 방 안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는가 싶었다. 이번엔 윤태희가 침묵을 깼다.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

뜬금없는 윤태희의 질문에 재겸이 눈을 반짝 떴다. 윤태희는 여전히 모로 누운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겸이 인상을 쓰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내가 뭔 거짓말을 했다 그래?”

“석주련이랑 별 얘기 안 했다고 나한테 거짓말했어.”

아, 맞다….

석 부장과 단둘이 면담을 했었고, 윤태희한테는 별 얘기 안 했다고 둘러댔었다. 그 말을 들으니 아까처럼 갑자기 기억이 번뜩 되살아났고, 재겸은 왜인지 살짝 억울한 심정이 되었다.

“그게 왜 거짓말이야?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그냥 말을 안 한 거지. 나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비밀을 만든 거야. 속이는 거랑 숨기는 게 같냐? 너야말로 입장 바꿔서 생각….”

천장을 노려보며 따박따박 따지던 재겸이 대뜸 입을 다물었다.

“…….”

순간 발끈하여 성질대로 말을 내뱉다 보니, 뭔가 숨기는 게 있음을 순순히 자백해 버린 꼴이었다. 뜨끔한 재겸은 윤태희의 눈치를 살폈다. 웃음기 섞인 숨결이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윤태희는 뭐라 캐묻지도 않고, 그저 별말 없이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냥… 아까는 말하고 싶지 않았어.”

잠시 침묵하던 재겸은 결국 눈썹을 꿈지럭거리며 실토했다.

“왜?”

“너한테는 좋은 이야기가 아니니까.”

윤태희가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럼 지금은?”

어째선지,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벽이라서 그런가? 닫힌 문이 활짝 열린 것처럼, 재겸은 지금 이 순간 어떤 비밀이든지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

석주련과 한 공간에 단둘이 남은 것은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재겸은 잔뜩 긴장한 채로 대화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를 눈치챈 석주련이 저를 심문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초면이긴 했으나 석주련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용건을 알 수가 없으니 촉각이 곤두서는 것은 당연했다.

‘나이가 열여덟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석주련이 입을 열었을 때, 재겸은 내심 놀랐다. 뜻밖에도 석주련이 건넨 첫 마디는 미지근한 인사치레였던 것이다.

‘진작에 자리를 만들어야 했는데 일이 바빠서 인사가 늦었어. 그래, 축역부 일은 할 만하던가? 면신례에서는 지박령을 상대했다고 들었는데….’

아까 전까지만 해도 석주련은 인간미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냉엄한 상관이었다. 비유하자면 바늘로 살갗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차가운 강철 같았다. 그런데 딱딱하게만 들리던 목소리는 어느샌가 한결 누그러져 있었고, 관심 어린 깊은 시선이 재겸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일대일로 마주한 석주련에게는 묘한 온기가 있었다.

‘시험날에 사슴을 봤다고 들었어. 혹시 가족 중에 귀재가 있나?’

재겸은 눈치를 보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신상 조사에 들어갈 느낌이라, 재겸은 머릿속으로 윤태희가 꾸며 준 서류에 적혀 있던 신상을 떠올려 보았다.

‘송곳이구나.’

그러나 다행히 석주련은 필요 이상으로 깊은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너 같은 귀재는 혼자서 툭 튀어나왔다고 해서 송곳이라고 부르지.’

한자를 어디서 배웠냐든가, 방상시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든가, 필시 무언가 중대한 용건이 있어서 저를 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평이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 네 추천자하고는 지낼 만하던가?’

‘…예?’

‘윤 수석 말이야.’

뜬금없는 질문에 재겸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마음만 같아선 하루하루가 고비라고 사실대로 고충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재겸은 고민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예에… 친, 친절하고 다정한 분이세요.’

언젠가 강이빈이 했던 말을 훔쳐 온 것이었다. 제법 그럴싸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석주련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낯으로 저를 물끄러미 응시할 따름이라, 재겸은 뭔가 말실수를 했나 싶어 석주련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잘해 준다니 다행이구나….’

석주련은 한참 만에 벽으로 시선을 내돌리며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다정한 인간은 알고 보면 누구보다도 무정한 인간이지.’

재겸은 저게 무슨 말인가 싶어 석주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석주련이 무슨 의도로 저에게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재겸의 속내를 읽었는지, 석주련이 말했다.

‘잘 지내보라는 얘기야.’

미지근하고 무덤덤한 당부였다.

‘…….’

그리고, 그제야 재겸은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석주련이 윤태희를 마음 깊이 아끼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재겸은 왜인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차갑게만 보였던 석주련은 생각보다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잘 지내보라는 당부를 끝으로, 면담은 싱겁게 끝이 났다. 석주련은 이만 가 보라며 대화가 끝났음을 알렸고, 재겸은 그대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문간으로 향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긴 했지만 ‘별 얘기’랄 것은 없었다. 재겸은 그대로 문을 열고 세미나실을 빠져나갔다.

‘아, 참… 그리고 말인데.’

아니,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석주련은 아까처럼 재겸을 불러세웠다.

‘청장님께서 너를 궁금해하시더군. 시험날 사슴을 봤다는 소문을 들으셨던 모양이야.’

문고리를 잡고 있던 재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만간 위에서 호출이 있을 테니, 만나 뵙고 인사드리도록 해.’

지나가듯이, 대수롭지 않게 날아든 말이었다.

‘…….’

그래서 재겸도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내고 싶었다.

***

“나례청장이 나한테 관심이 있대.”

세미나실에서 석주련과 나누었던 대화를 되짚어 보다가, 재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윤태희가 멈칫하며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재겸은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조만간 나를 부를 거라고 그랬어.”

윤태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딴생각이 있어서 숨긴 건 아니었어.”

변명 같지만 사실이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어쩌면 윤태희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윤태희에게 불유쾌한 화제를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재겸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재겸은 어느샌가부터 윤태희의 기분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랬구나.”

한참 만에야 윤태희가 조용히 말했다.

“얘기해 줘서 고마워.”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몹시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천장을 보고 있던 재겸은 고개를 슬쩍 돌려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눈에 익어서, 윤태희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멀뚱멀뚱 윤태희를 응시하던 재겸이 무심결에 불쑥 입을 열었다.

“너는 머리 내린 게 더 잘생겼어.”

윤태희가 멈칫하더니 재겸을 빤히 쳐다보았다.

“…….”

윤태희는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재겸의 칭찬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얼떨떨한 기색으로 제 낯을 슥 쓸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고마워.” 하고 어색하게 대답했다.

“좀 더 자도 돼, 잘 자.”

내내 옆으로 누워 있던 윤태희는 재겸의 이불을 끌어 올려 주더니, 머리를 괴고 있던 손을 풀고 바른 자세로 누웠다. 그에 재겸은 별 대답 없이 천장만 멀뚱히 쳐다보았다.

“…….”

재겸은 도로록 눈을 굴려 윤태희를 곁눈질했다. 윤태희는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조각 같은 얼굴선을 훔쳐보던 재겸은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켰다. 웬일인지, 손 하나 꿈쩍하지 않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의지대로 몸이 움직였다. 재겸은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하며 코앞에서 윤태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기척과 시선을 느낀 윤태희가 스르륵 눈을 떴다.

“왜?”

윤태희가 묻자, 재겸이 말했다.

“키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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