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키쓰하자.”
윤태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재겸이 이불을 확 젖히며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윤태희의 몸 위에 올라가 앉았다. 거침없는 움직임에 침대가 출렁이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너도 네 맘대로 하는데 나라고 안 될 거 없잖아.”
재겸이 무심히 말을 뱉었다.
“…….”
윤태희는 매우 당황한 얼굴로 재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재겸은 왜인지 아주 짜릿한 기분이 되었다. 그때, 윤태희가 도망치듯이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뭐 해.”
재겸은 윤태희의 뺨을 붙잡아 저를 보게 했다. 윤태희는 아주 난처해하는 기색이었다. 재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이리저리 시선을 옮겼다.
“눈 감아.”
심드렁한 명령에 윤태희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 것 같기도 했다. 재겸은 그림 같은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야.”
재겸의 부름에, 코끝이 닿은 상태에서 윤태희가 눈을 떴다.
“너 윤태희 아니지?”
윤태희의 낯이 싹 굳었다. 양손으로 윤태희의 뺨을 부여잡고 있던 재겸은 한 손으로 윤태희의 머리맡을 짚는가 싶더니, 반대쪽 손으로는 윤태희의 하관을 강한 악력으로 틀어쥐었다.
“너 누구야?”
그때였다. 움켜쥐고 있던 윤태희의 하관이 순식간에 젤리처럼 물컹해지더니, 갑자기 손이 푹 들어갔다. 재겸은 숨을 덜컥 들이쉬며 손을 확 뗐다. 당황하여 제 손을 내려다볼 때였다.
…어?
“칠칠아!”
***
“칠칠아!”
갑자기 쑥 끌려 나오는 느낌이 들면서 눈이 번쩍 뜨였다. 열린 시야로 새하얀 빛이 불쾌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임효문의 얼굴이었다.
“뭐, 뭐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야에 들어찼던 얼굴과 전혀 다른 생김새에, 재겸은 기겁하듯 몸을 확 내뺐다가 그대로 의자와 함께 뒤로 우당탕 넘어졌다.
“야! 괜찮아?”
놀란 임효문이 후다닥 손을 내밀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재겸은 임효문의 손을 잡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얼떨떨한 기색으로 임효문을 쳐다보던 재겸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내가 왜 여기….”
이곳은 본청 3층에 있는 휴게실이었다.
재겸은 지난밤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내가 키스를 하면, 넌 뺨을 때리면 된다는 소리야.’
어제 윤태희는 예고한 대로 키스를 했다. 그리고 키스가 끝나자마자 재겸은 윤태희의 뺨을 때렸다. 경황이 없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손길을 의식할 정신 정도는 있었기에 귀기는 싣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충분히 매서운 손길이어서 윤태희는 잠깐 휘청거렸고, 윤태희의 입술은 또 한 번 터졌다. 간신히 피딱지가 내려앉았던 그 자리였다.
뺨을 얻어맞은 윤태희는 세차게 고개가 돌아간 상태에서 눈동자만 스르륵 굴려서 재겸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터진 상처가 아프지도 않은 것인지, 피가 스며 나오는 자리를 이로 잘근거리며 제 입술을 쪽 한 번 빨아 먹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비상계단을 훌쩍 빠져나갔다.
어두운 비상계단에 혼자 남은 재겸은 얼마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 재겸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땐, 윤태희는 이미 퇴근하고 자리에 없었다.
재겸이 윤태희의 뺨을 때린 것은 순전히 자존심 때문이었다. 키스를 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으나 윤태희는 그 경고를 보란 듯이 짓밟았다. 때리라면 못 때릴 것 같냐는 심정에서 오기에 치받쳐 한 행동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재겸은 도발에 넘어간 것 같다는 생각에 밤새 분했다.
지난밤 재겸을 가장 괴롭힌 생각은, 앞으로 윤태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밤새도록 재겸을 뒤척이게 만든 이 질문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게다가 하필이면 재겸은 오늘 오전 출근이었다.
재겸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출근한 인원은 표지호와 강이빈, 단 두 명뿐이었다. 축역부는 업무 특성상 밤에 바쁘고 낮에는 한가했다. 특히나 아침은 하루 중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간대이자 상주하는 인원이 제일 적은 시간대였다. 동이 트고 나면 귀신의 활동량이 급격히 줄어드는데, 줄어든 활동량만큼 발생하는 사건 사고 수도 감소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대부분의 나자들은 오전에 출근하는 것을 선호했다. 웹서핑을 하거나 개인 공부를 하는 등 비교적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 달 스케줄표를 짤 때면 오전 출근하는 날을 한 번이라도 더 늘리려고 치열한 눈치 싸움이 벌어질 정도였으니, 신입인 재겸이 오전 출근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팀원들이 양보하고 배려한 덕분이었다.
이렇듯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오전 출근이었으나, 이것은 애석하게도 재겸에겐 불행이었다. 밤새 상념에 시달린 재겸으로선 여백이 괴로웠다. 생각이 솟아날 틈을 메꾸고 싶었다. 그러나 재겸은 입청한 지 얼마 안 된 풋내기 나자였고, 선배들은 신입에게 일을 시킬 생각이 없었으며, 거기다 하루 중에서 가장 일이 없는 시간대였으므로, 재겸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오늘 윤태희가 휴무라는 것이다.
“재겸이. 어디 아파? 오늘 안색이 안 좋네.”
재겸의 건너편 자리에 앉은 강이빈이 파티션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넸다. 재겸은 호출기에 쓰이는 술식을 이면지에 끄적거리며 애써 생각을 떨쳐 내려고 노력 중이었다. 새하얗던 이면지는 어느새 깜지처럼 빽빽해져 있었다.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
강이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겸에게 다가오더니 등을 떠밀었다. 그에 재겸은 괜찮다고 연거푸 사양했지만 등을 떠미는 손길이 완강했다. 재겸은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쫓겨나듯 사무실에서 나온 재겸은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같은 층에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본관 건물에는 각 층 끄트머리마다 탕비실 겸 휴게 공간으로 마련된 장소가 있었다. 재겸은 커피 머신, 전자레인지 등을 기웃거리다가 한쪽에 비치된 신문을 챙겨서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휴게실에 와서는 분명히… 신문을 보고 있었는데….
신문을 보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다.
“씨발… 무슨 이런 꿈을….”
상황 파악을 마친 재겸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살다 살다 별 개꿈을 다 꾼다. 어제 윤태희에게 별 얘기 안 했다고 둘러댄 것이 계속 마음에 남았던 걸까? 꿈속에서라도 마음 편히 털어놓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아무리 꿈이어도 그렇지, 막판에 윤태희한테 키쓰를 하자고 하다니….
물론, 꿈에서는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재겸은 꿈속의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일단 꿈이라도 너무나 생생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칠칠아, 너 밤새웠냐? 어우, 눈 밑 시꺼먼 거 봐.”
황망한 얼굴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재겸이 고개를 들었다. 까먹고 있던 임효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임효문은 어느새 재겸이 앉은 테이블의 맞은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근데 넌 여기서 뭐 하냐?”
재겸이 마지못해 아는 척을 했다.
“엉? 나 음료수 뽑으러 왔는데.”
임효문은 휴게실 구석에 놓인 음료 자판기를 가리키며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너 끙끙거리면서 자고 있길래 혹시 가위눌렸나 싶어서 깨웠어.“
음료를 뽑으러 왔던 임효문은 아침부터 누군가 테이블에 엎어져 자는 것을 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느낌이라 자세히 봤더니 다름 아닌 칠칠이였다. 축역부 참 한가하다 싶어 부러워지려는데, 자는 꼴을 보아하니 마치 어딘가에 묶인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냥 흔들어 깨웠을 뿐인데, 격렬한 반응에 임효문이 더 놀랐다.
“악몽이라도 꿨냐? 무슨 꿈이길래?”
임효문의 질문에 재겸이 헛기침을 했다.
“…너, 너네 층에는 휴게실 없어? 왜 여기로 와?”
재빨리 화제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엉? 아, 우리 층에 있는 자판기 고장 났거든.”
빨랑 고쳐 주지, 왜 안 고쳐 주나 몰라. 재겸은 툴툴거리는 임효문을 흘겨보았다가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심란한 마음에 한숨을 푹푹 쉬며 신문을 맥없이 뒤적거릴 때였다.
“너도 오늘 오전 출근이었구나. 어? 근데 왜 버스에 너 없었지? 몇 시에 나왔어?”
아니나 다를까 아침부터 촉새가 활개를 쳤다. 오늘 아침, 재겸은 7212번 버스를 몇 대나 떠나보내고 다른 버스를 탔다. 굳이 다른 버스를 타고 출근한 보람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시끄러워. 말 걸지 마.”
“동기 사이에 만난 김에 수다 좀 떨자구.”
“난 너랑 할 얘기 없어.”
“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없기는 왜 없냐?”
임효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뭐가.”
다짜고짜 날아든 맥락을 알 수 없는 질문에 재겸이 불퉁하게 되물었다. 그에 임효문은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어제 말한 그 사람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