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어제 말한 그 사람 말야.”
신문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재겸의 손이 멈칫했다. 하필이면 개꿈을 꾸고 난 직후라 더 심란한 상황이었다. 재겸의 미묘한 표정을 읽은 임효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헐. 뭔데 뭔데. 연락 왔나 본데? 뭐래? 무슨 얘기 했어?”
재겸이 신문지 모서리를 손끝으로 굴리며 잠시 머뭇거렸다. 연락이 온 건 아니고 직접 만난 거지만 어쨌든 그게 그거였다. 말을 안 해 주면 찰거머리처럼 계속 달라붙을 것 같아서, 먹고 떨어지라는 심정으로 재겸은 입을 열었다. 물론 세세하게 말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나한테 키쓰 왜 했냐구 물어봤어.”
임효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뭐?”
그걸 그렇게 대놓고 물어봤다고?!
“그랬더니 지한테 키쓰 정도는 별거 아니래.”
“뭐…?”
역시나! 임효문은 게거품을 물 듯이 뒤로 넘어갔다.
“야! 그걸… 그렇게 물어보면은, 아오, 야…!”
물어보는 이쪽이나 대답하는 저쪽이나 쌍으로 환장이다. 임효문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뒷목을 잡았으나, 임효문이 무얼 상상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재겸은 무덤덤했다.
“아주 어장에 제 발로 들어갔네! 들어갔어!”
“그게 뭔 소리야.”
“야,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그걸 그 사람한테 왜 물어봐?”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키쓰한 사람한테 물어보지, 누구한테 물어보냐.”
“아니, 넌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알아? 어?”
참담한 전개에 임효문이 탈색모를 쥐어뜯었다. 이건 확인 사살이었다. 칠칠이야 뭣도 몰라서 대놓고 물어봤다고 치지만, 스물여섯 살이나 먹어 놓고, 뭐? 키스가 별거 아니야?! 어떻게 봐도 인성 말아먹은 인간일 게 뻔한데, 칠칠이는 아직도 감을 못 잡은 게 분명해 보였다.
“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어. 앞으로 걔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런 게 아니라면, 저렇게 생각에 잠긴 낯으로 진지하게 중얼거릴 리가 없다.
“야! 내가 말했잖아. 넌! 그 사람한테 너는…!”
임효문은 답답해 미치겠다는 얼굴로 울컥 내뱉으려다가, 잠시 숨을 골랐다. 이건 목소리를 키워서 설명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칠칠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이해를 시켜야만 했다.
“칠칠아. 이해하기 쉽게 얘기해 줄게. 봐, 너보다 어린 애가 있어. 근데 걔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아이스크림을 안 먹어 봤어. 그래서 네가 난생처음으로 걔한테 아이스크림을 사 줬다고 쳐. 그럼 걔 반응이 어떨 것 같아?”
뜬금없는 가정에 재겸이 눈을 끔뻑거렸다. 반응이 어떨 것 같냐고? 그건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언젠가 집 앞 슈퍼에서 메산이에게 처음으로 메루나를 사 줬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메산이는 당시 처음 먹어 본 메루나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메루나를 처음 먹고 난 뒤로 메루나에 빠져 며칠 동안 메루나 얘기만 할 정도였다.
‘나리 나리, 메루나는 왜 이름이 메루나인가요? 메루나는 왜 연두색인가요? 메루나는 왜 동그랗지 않고 네모난 건가요? 메루나는 하루에 하나만 먹어야 하나요? 두 개 먹으면 혹시 배탈이 나나요? 왜 사람들은 더 커다란 메루나를 만들지 않나요?’
“야. 한동안 그 아스크림 얘기만 주야장천 하더라.”
“그래! 그럼 그 모습을 바라보는 네 기분은 어때?”
“그야….”
뭐, 귀여웠지. 괜히 놀리고 싶기도 하고. 근데 메루나가 맛있긴 맛있어….
심드렁한 대꾸였지만, 임효문은 아주 명쾌한 대답이라는 듯 손뼉을 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이제 알겠어?”
“뭐?”
“그러니까 칠칠아. 그 사람한테 너는 태어나서 아이스크림 처음 먹어 본 그 꼬마애인 거야. 어? 너 봐 봐, 키스 한 번 했다고 펄쩍 뛰는데. 그 사람 눈에는 이런 네 반응이 얼마나 재밌겠어? 완전히 갖고 노는 거라니까. 반응 보고, 재밌어하고, 널 좌지우지하는 게 즐거운 거야!”
임효문의 비유를 들으니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난 이제 어떡해야 하냐?”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이 심각하게 낯을 굳히며 물었다.
“어떡하긴? 앞으로 만나지 말라니까!”
“말했잖아. 당분간은 봐야 한다니까.”
아 그랬지, 임효문이 끙끙거리며 머리를 쥐어짜 냈다.
“그으럼… 어… 무반응!”
“뭐?”
“무반응이 답이야.”
“무반응?”
“재미없는 반응만 보이라는 거야. 여기선 생각 많은 사람이 지는 거거든.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무조건 태연한 척해. 그럼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걸.”
그렇다. 듣고 보니 그렇다. 지렁이를 건드렸는데 꿈틀한다면, 어쩐지 그 움직임을 계속 들여다보게 되지 않는가? 어쩌면 비슷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슬쩍 건드려도 반응이 없다면 이내 흥미가 식어 관심을 끄고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재겸은 제 처지가 지렁이와 같음을 이해했다. 돌이켜보면 윤태희가 건드릴 때마다 꿈틀거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게다가 조금 전에 꾼 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윤태희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재겸은 솔직히 기분이 좀 좋았다. 입장 바꿔서 한 번 겪어 보고 나니 대충 어떤 심리인지 알 것 같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생각에 잠겨 있던 재겸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이제부터 그렇게 할게.”
재겸은 임효문이 해 준 말을 속으로 되새겼다. 그래. 이제부터는 윤태희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면 되는 거다… 처음엔 피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는데, 임효문과 대화를 나누다가 나름의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마음이 한결 후련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사실, 나는 걔랑 잘 지내보고 싶었어.”
그래서 재겸은 저도 모르게 허심탄회하게 속을 털어놓았다.
“왜냐면… 솔직히 싫진 않았어. 유일하게 서로를 안다고 생각했거든. 어쩌면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도 했어. 근데 이젠 알겠어. 내가 혼자 바보같이 기대를 했던 거야.”
그리고 임효문은 평소에 본 적 없는 진중한 얼굴로 재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말을 마친 재겸은 불현듯 머쓱해져서, 괜히 불퉁하게 시선을 내렸다. 애먼 신문을 바스락거릴 때였다.
“칠칠아, 근데… 뭔가를 기대하는 건 잘못이 아니야.”
임효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뭐, 물론 기대를 안 하면 실망할 일도 없긴 해. 나는 그래도 계속 뭔가를 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안 그럼 뭐랄까 좀, 사는 게 너무 재미없지 않겠냐?”
재겸은 멈칫하며 임효문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번 건 꽝이었다 생각하고 ‘그럼 씨발 다음 기회에.’ 이런 마음가짐으로, 훌훌 털어 내면 되는 거야. 어?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러니까 내 말은,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얘기야.”
엉? 알겠냐? 다음엔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 임마! 대신 다음엔 연상 말고 또래로!
임효문이 힘있게 덧붙였다. 어째 결론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긴 했지만, 재겸은 기분이 묘했다. 말에 담겨 있는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마음을 울리는 위로였다.
임효문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녀석이었다.
“…….”
재겸은 말없이 신문 모서리를 굴렸다.
‘나자가 싫다.’
사람 일이라는 게 늘 그렇지만, 여태껏 살아오면서 자신이 나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나자가 된 것뿐이었다. 나자는 전부 수작질을 일삼는 협잡꾼이고, 상종도 못 할 족속들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는데….
불현듯 혼란스러워진 재겸이 임효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임효문이 묻자, 재겸이 말했다.
“야. 넌 왜 나자가 됐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임효문이 눈을 끔뻑거렸다.
“뭐? 그게 갑자기 무슨….”
“나자가 된 이유가 뭐야?”
그렇게 묻는 재겸의 표정은 몹시 심각했다. 재겸이 대뜸 정색을 하며 공격적인 투로 질문을 던지자, 임효문은 살짝 당황하여 피어싱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가?
“왜 나자가 됐냐니, 그야 당연히….”
말을 흐리던 임효문이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에 재겸은 왜인지 살짝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삿된 귀신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인간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으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하여? 선하고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나중에 늙으면 연금 주잖아.”
“…뭐?”
“철밥통 몰라? 공무원이 짱이야.”
그렇게 말하는 임효문의 눈빛이 무척이나 단단했다.
“원래 나자 시험 떨어지면 그냥 9급 준비하려고 했거든? 내 동기들 지금 다 공시 준비해… 칠칠아. 나중에 대학 가게 되면 무조건 공대로 가라. 특히 문사철은 절대 안 돼. 몇 년 더 산 사람으로서 진짜. 이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야. 졸업하면 그냥 백수 되는 거라고. 내가 왜 하필 철학과를 가서, 학문은 자고로 집에서 책 펴 놓고 혼자 갈고 닦아야 하는 건데….”
임효문이 미간을 틀어쥐며 말을 줄줄 이었다.
“…….”
취업난이 극심한 마당에 공무원만큼 좋은 직업이 어디 있으랴….
“어, 그래. 잘해 봐….”
결국, 재겸은 급격한 피로감에 머리를 싸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