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같은 시각, 반대편에서 이름 없는 야산을 오르는 또 다른 이들이 있었다. 세강 기업의 장 회장, 그리고 그의 비서인 김 실장이었다. 장 회장과 김 실장은 등산복 차림으로 벙거지를 눌러쓴 채 열심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앞서 걷던 김 실장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인적이 없는 산은 길이 다져지지 않아 체력 소모가 심했다. 제대로 된 등산로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은 산이었다. 산의 초입까지는 왕래가 있었는지 희미하게나마 오솔길이 나 있었지만, 그마저 있던 길마저 끊긴 지 오래였다.
“괜찮네.”
험지에 익숙지 않은 장 회장으로선 상당한 고행이었으므로, 김 실장은 그런 장 회장을 위해 몇 발자국 앞서 걸으며 길을 열고 있었다. 초로에 접어든 장 회장은 그 나이를 보여 주듯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김 실장은 장 회장이 수월하게 산을 오를 수 있도록 풀과 나뭇가지를 헤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나저나 길을 잃은 것은 아닌가?”
안 그래도 김 실장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혜 선사가 일러 준 대로,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받아 적은 메모를 펼쳤다.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잘 들으소. 인적이 없는 산이라 길이 마땅치 않으니 우선은 발밑을 잘 살펴야 할 것이요. 일단은 약수터를 찾아야 하는데, 입구에서 올라가다 보면은 오솔길이 끊기는 부근이 있을 것이요. 거기서 세 시 방향이요. 10분 정도 올라가면 버려진 약수터가 보일 것이요.
틀림없이 여혜 선사가 말한 대로 왔다. 김 실장은 땀을 닦으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솔길이 끊기는 부근에서 10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10분을 훌쩍 지나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봐도 도저히 약수터가 있을 법한 느낌이 아니었다. 산은 점점 울창해졌고, 경사 또한 점점 가팔라졌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전화라도 걸어서 이 길이 맞냐고 물어보면 좋을 테지만, 이 산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통신권 외 지역이라고 떴다. 그것은 정말이지 기이한 일이었다. 산 초입에는 웬 장승 하나가 서 있었는데, 그 장승을 기점으로 휴대폰 전파가 뚝 끊어졌던 것이다. 김 실장은 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저어, 회장님. 설마 선사님께서 길을 잘못 알려 주신 건 아니겠지요?”
미신을 믿지 않는 김 실장으로선 이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그러나 부와 명예를 지닌 인물이 미신을 믿고, 사주팔자에 연연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했다. 가진 게 많으면 그만큼 잃을 것이 많기 마련이라, 앞날을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약점 하나에 발목이 잡히고, 자칫 입지가 위태로워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불확실한 미래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나머지, 역설적으로 불확실한 무속의 영역에 기대는 것이었다.
“아니, 그럴 리는 없네.”
장 회장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세강 기업은 여러 분야에서 탄탄한 기반을 확보하고, 성장세를 이어 나가고 있는 대기업이었다. 초대 경영자 장지용의 차남이었던 장필영은 치열한 경영권 다툼 끝에 회장의 자리를 승계받았다. 장필영은 본디 여혜 선사와 이렇다 할 연줄이 없었으나, 평소 왕래가 잦고 긴밀한 연을 유지하던 허 장관에게 선사와 다리를 놔 달라고 부탁했다.
그 이유는 아들 때문이었다.
장 회장의 아들이 원인 모를 추위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의 일이다. 평소 아픈 곳 하나 없이 건강하기만 했던 그는 언제부터인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오싹한 한기에 시달렸다. 처음엔 으슬으슬한 수준에 불과했으므로 가벼운 몸살 기운 정도로 치부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몸을 휘감은 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에 눈을 뜬 장 회장의 아들은 불현듯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느꼈고,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병석에 누워 자리를 보전하게 된 그는 좀처럼 기력을 되찾지 못했다. 장 회장은 아들의 병을 고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안 다녀 본 병원이 없었고, 수십 번이 넘는 대대적인 검진을 거쳤다. 그러나 돌아온 결과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들으나 마나 한 말뿐이었다.
아들은 흡사 산 송장이나 다름없는 몰골이 되어 하루하루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죽음을 앞둔 자의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니, 장 회장은 도저히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장 회장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병이라면 혹시….
문득 장 회장은 아들에게 귀신이 붙은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원한을 품은 누군가가 망령이 되어 해코지라도 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나례청이었다.
그러나 장 회장은 나례청에 일을 맡기는 것이 꺼려졌다.
비록 음지에 숨겨져 있으나 나례청은 엄연히 국가 기관이었다. 공적인 시스템을 통하면 당연히 기록이 남을 수밖에 없다. 국가 기관에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었다. 훗날 정치적인 목적으로 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혹여 약점이 잡힐까 두려운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장 회장을 비롯한 고위층 인사들은 나례청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무속의 영역에 속하는 일을 해결할 때면 나례청을 통하기보다 민간의 무당을 찾아가는 것을 선호했다. 어떤 이들이 경찰을 찾아가지 않고 사설 흥신소에 의뢰하는 것과 비슷했다.
장 회장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나례청을 통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자리까지 오기 위해 짓밟은 사람들도 많았고, 지은 죄도 컸다. 자칫하다간 애써 감춰 둔 과거의 허물이 줄줄이 들춰질까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장 회장은 허 장관의 주선을 받아 여혜 선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굵직한 인사들과 왕래하는 대단한 무당이니 믿음이 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몇 달을 기다려 가며 어렵사리 선사를 만난 장 회장은 자신이 찾아온 사연을 털어놓고, 고사를 지내든 부적을 써 주든 뭐가 됐든 좋으니 손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말없이 장 회장의 사연을 듣고 있던 여혜 선사는 한참 만에 담뱃불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귀신이 붙은 것이라면 차라리 낫지.”
장 회장의 아들을 살펴보던 선사는 해괴한 소리를 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은 산 사람이 살을 날리고 있는 것이요.”
살(煞)은 불행을 초래하는 무형의 힘, 즉 인간을 해치거나 사물을 파괴하는 기운을 말했다.
따라서 말 그대로 ‘살을 날린다’, ‘살을 쏜다’라는 것은 이러한 악한 기운을 특정 상대에게 날린다는 것으로, 쉽게 말하자면 저주를 내리는 것과 비슷했다.
“만약 귀신이 붙은 것이라면 어르고 달래든가 내쫓든가 하여 어떻게든 쫓아낼 수 있겄지만, 이것은 당신한테 깊은 앙심을 가진 웬 사람이 무당을 시켜서는 저주를 하는 것이요.”
선사의 말에 따르면, 장 회장의 아들은 귀신이 붙은 게 아니라 산 자가 보내는 살에 맞아서 죽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 장 회장이 희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그럼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선사가 담뱃불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까다롭긴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요. 산 사람이 쏘아 보낸 살을 막아 내려면 비슷한 크기로 받아쳐서 상쇄하는 것이 제일이요. 저짝서 날리는 살에 버금가도록 이짝서도 살을 날리면 된다는 것이지. 한마디로 맞불을 놓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요.”
선사는 담배를 뻑뻑 피우며 진단에 맞는 해결 방안을 꺼내 놓았다. 과연, 몇 달을 기다려 선사를 찾아온 보람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한 장 회장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때였다.
“허나, 그것은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요.”
선사가 대뜸 발을 빼자, 장 회장이 당황하여 물었다.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요. 그게 무슨….”
“산 사람에게 살을 날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옳지 못한 일이요. 신성한 신명을 받드는 무당이라면 응당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 이 말이요.”
무속에서 누군가에게 살을 날린다는 것은 이른바 흑주술이라고 불리는, 사술(邪術)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선사가 거절하는 이유였다.
“옳지 못한 일에 사술을 썼다간 필시 신명님께서 노하실 것이요. 나는 신령님 이름 앞에 부끄러운 일은 일절 하지 않소. 그리고 그건 내 소관이 아니요. 해 주기 싫은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요. 보소, 오늘내일하는 뒷방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어 그런 숭악한 살을 받아치겠소.”
선사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안됐지만 사람 잘못 찾아오셨소.”
“…….”
완강한 태도에 장 회장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성미가 대쪽 같은 양반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한참 동안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던 장 회장은 별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몇 달을 기다려서 겨우 얻은 기회가 이대로 허탈하게 날아가는가 싶었을 때였다.
“이보시요.”
장 회장의 뒷모습에 대고, 여혜 선사가 갑자기 목소리를 냈다.
“내 인제사 생각해 보니, 암만 그래두 여까지 왔는데….”
문을 열고 나가려던 장 회장이 멈칫하며 뒤를 돌았다.
“그냥 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그만한 적임자를 소개해 드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