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17)화 (117/348)

#117

그렇게 해서 오게 된 산이었다.

장 회장에게는 애초에 선사가 거절했으면 했지, 거짓으로 소개해 주진 않았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장 회장은 일단은 조금만 더 올라가 보자고 했다.

고된 산행이 재개되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더 산을 올랐을까, 김 실장의 뒤를 따라가던 장 회장은 갑자기 몸을 우뚝 세웠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흥얼거리는 소리였다. 장 회장은 김 실장이 내는 소리인가 싶어서, 앞서가는 김 실장을 불러세웠다.

“김 실장.”

헉헉거리며 산을 타던 김 실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장 회장은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김 실장의 입술이 꾹 다물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희미한 허밍은 여전히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좌우를 훑어보던 장 회장이 귓가 근처로 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지금 이 소리, 안 들리나?”

뒤늦게 소리를 알아챘는지, 김 실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거, 거기 누구 있습니까?”

목청 높여 던진 질문에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잠시 얼어붙었던 김 실장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내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어느 한곳으로 시선이 꽂혔다. 장 회장이 눈짓했다. 김 실장은 침을 꿀꺽 삼키며 콧노래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했다. 길섶을 해치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소리가 가까워졌고, 김 실장은 긴장감에 목이 졸리는 듯한 심정이었다.

그 산을 오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일 수도 있고, 희한한 소리가 들려올 수도 있는데, 웬만하면 그냥 그러려니 하시오. 대신 만약 누군가를 만나게 되거든, 발밑을 한 번 보시오. 그림자가 붙어 있으면 인간이고, 없으면 귀신이니. 그림자가 없더라도 놀랄 필요는 없소. 그저, 못 본 척하고 잊으시게.

소리의 정체는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마지막 남은 베일을 거둬 내는 것처럼, 떨리는 손으로 울창한 수풀을 조심스럽게 젖혔을 때였다. 제일 눈에 들어온 것은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키가 큰 남자였다.

김 실장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남자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키가 큰 남자는 볼 캡을 눌러 쓰고, 어깨선을 따라 삼선이 그어져 있는 남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김 실장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라도 사람이 아니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발밑엔 그림자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게다가 옷차림을 보아하니 명백히 사람이다. 볼 캡 위로 헤드셋을 끼고 있는 것을 보아선 음악을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손에는 너덜너덜한 검은색 비닐봉지가 걸려 있었는데, 허리를 반쯤 수그린 채 뭔가를 줍는 데 열중한 모습이었다. 김 실장의 낯이 살짝 밝아졌다. 길을 헤매던 차에 다행이었다. 저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될 것 같았다.

“저기, 실례합니다.”

김 실장은 남자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남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헤드셋 바깥으로 희미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김 실장은 남자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톡톡 건드렸다. 그제야 남자가 멈칫하더니 훽, 뒤를 돌았다.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남자는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더니 그대로 목에 걸쳤다.

“무슨 일이세요?”

가까이서 보니, 젊은 청년이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청년은 얼떨떨한 얼굴로 김 실장과 장 회장을 번갈아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세요.”

그때, 뒤쪽에 물러나 있던 장 회장이 말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평일 대낮, 그것도 마을과 거리가 먼 야산에 젊은 청년이 혼자 있는 것이 어딘지 수상했다. 혹시 뒤를 따라붙은 언론사 끄나풀은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반말에, 고압적이고 무례하게 들리는 말투였지만 청년은 딱히 개의치 않는지 “아….” 외마디 소리를 내다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펼쳐 보였다.

“개암 좀 줍느라요.”

개암? 김 실장과 장 회장이 시선을 주고받을 때였다.

“제가 다람쥐를 키우는데, 다람쥐가 개암을 좋아해서요.”

“아, 그러시군요. 다람쥐를 키우시다니 특이하시네요….”

김 실장이 미소를 지으며 힐끔, 장 회장을 쳐다보았다.

“집이 근처이신가 봅니다.”

“네, 근처예요.”

청년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근데 어디서 오셨어요? 등산 오신 거예요?”

청년의 질문에, 장 회장은 자연스럽게 벙거지를 푹 눌러쓰며 얼굴을 숨겼다. 등산복 차림으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기업 회장이 인적 드문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담 같은 것이 떠도는 건 곤란했다.

“네. 공기가 맑다고 아는 분이 소개를 해 주셔서.”

김 실장은 장 회장을 슬쩍 가리며 반듯하게 미소를 지었다. 적당히 둘러댔으나 청년은 “어? 그래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여긴 동네 분들도 잘 안 오는 산인데… 등산로 개발이 안 돼서 위험하거든요. 조심하셔야 해요. 휴대폰도 안 터져서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큰일 나요.”

젊은 놈이 말꼬리가 길군. 김 실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 그렇군요. 하하, 조언 감사합니다. 사람 많은 산을 안 좋아해서 온 건데, 등산로가 없으니 확실히 힘들긴 하네요. 저기, 어, 그래서 말인데….”

김 실장이 짐짓 태연한 말투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혹시 여기 잠시 쉬어 갈 만한 곳이 있을까요? 약수터… 라든지.”

“아, 약수터요? 있어요.”

청년은 곧바로 손가락을 들더니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비탈 따라서 올라가면 금방 나올 거예요.”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었으므로, 김 실장은 고개를 꾸벅거리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그대로 청년이 알려 준 방향을 향해 등을 돌릴 때였다.

“아, 저기. 근데….”

두 사람의 발길이 우뚝 멈췄다.

“실례지만 혹시, 세강 기업의 장필영 회장님 아니세요?”

“…….”

“…….”

김 실장은 잇새로 짜증을 억누르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어디서 많이 뵌 것 같아서요. 혹시나 했는데.”

청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맑게 물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김 실장은 청년의 말을 자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 아니에요? 티비에서 본 얼굴이랑 비슷해서….”

“네, 비슷해서 착각하신 것 같군요.”

그때, 장 회장이 김 실장 앞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김 실장.” 잠시 물러나 있으라는 의미를 알아차린 김 실장은 입술을 깨물며 그대로 말을 삼켰다. 청년에게 가까이 다가간 장 회장은 김 실장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뒤,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를 건넸다.

“생각해 보니 말로만 인사할 게 아니라, 성의 표시가 부족했어.”

두툼하게 내민 지폐에, 청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어, 이러실 필요까지는….”

“젊은 친구들이 요즘 참 고생이 많아.”

장 회장은 사양하는 청년의 손에 지폐를 덥썩 쥐여 주더니,

“요새 취업난이다 뭐다 해서 힘들 텐데, 용돈이라도 하게.”

돈을 쥐여 준 상태 그대로 청년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그리고, 입은 함부로 놀리지 않는 게 좋을걸세.”

청년은 붙들린 손을 쳐다보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장 회장은 매서운 눈으로 청년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장 회장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를 리 없었다. 이것은 경고였다.

“…….”

초로에 접어든 나이였음에도 장 회장의 악력은 상당했다. 짧은 정적이 산중을 휩쓸었다. 장 회장이 손에 힘을 풀자, 청년의 손이 스르륵 떨어져 나갔다.

“그럼, 이만 가 보겠네.”

잠시 침묵하던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살펴 가세요….”

***

두 사람은 청년이 일러 준 방향으로 향했다. 비탈을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래전에 버려진 약수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년이 말한 대로였다.

약수터 뒤쪽에는 녹이 슨 우물이 하나 있을 것이요.

그리고, 정말로 녹슨 우물이 있었다.

우물을 찾았다면 다 온 것이요. 적당한 솔방울을 하나 주워서, 이 부적으로 솔방울을 똘똘 감싸고, 우물 안에 솔방울을 던지는 것이요.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나거든, 손뼉을 쳐 합장하고, 이렇게 주문을 외우는 거요.

김 실장은 선사의 말을 떠올리며 손뼉을 짝, 마주쳤다.

“나그네의 발길이 닿지 않으니 길잡이가 되어 주소서.”

허면, 누군가 마중을 나올 것이요.

여혜 선사가 하라는 대로 전부 끝냈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게 맞나 싶어서 장 회장과 김 실장이 우물 안을 들여다볼 때였다.

“안녕하세요?”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낡은 철봉 위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다. 김 실장은 무심코 아이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가,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림자가 없어. 인간이 아니다.’

아이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아이가 철봉에서 훌쩍 내려오더니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 장 회장과 김 실장은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당황한 눈으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길이 험할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 눈길을 주지 마세요.”

어린아이는 또박또박 당부를 마친 뒤, 척척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치고 걸음이 무척이나 빨랐다. 그에 장 회장과 김 비서는 뭐라 말을 붙일 새도 없었다. 숨을 헉헉 들이켜며 정신없이 아이의 꽁무니를 쫓았다.

점점 산세가 험해졌다. 이름도 없는 외진 산일 뿐이었다. 산의 초입에서 볼 땐 산봉우리가 손에 닿을 것처럼 보였고, 절대 이렇게까지 높은 산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가파르다는 게 이상했다.

“다 왔습니다.”

아이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아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커다란 암벽 앞이었다. 김 실장은 눈을 끔뻑거리며 암벽을 쳐다보았다. 다 왔다고? 여기가? 그때, 아이가 빙글 몸을 돌리며 장 회장과 김 실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제 눈을 보십시오.”

장 회장과 김 실장은 홀린 듯이 아이의 말을 따랐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이는 도장을 찍는 것처럼 꾹, 눈을 세 번 감았다가 떴다.

“이제 뭐가 보이시나요?”

장 회장과 김 비서가 허옇게 질린 낯을 했다. 조금 전까지 암벽이었던 자리에 건물이 생겼다. 오래전에 지은 듯한 커다란 전통 가옥이었다.

“문을 두드리시면 안에서 누가 나올 겁니다. 그럼 만나서 반가웠어요. 수고하세요.”

아이는 허리를 꾸벅 숙이더니, 그대로 다다다 달렸다. 아이가 향한 쪽에는 절벽밖에 없었다.

“어! 잠, 잠깐…!”

두 사람의 눈앞에서 아이는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김 실장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

“…….”

고된 산행에도 끄떡없던 김 실장은, 결국 다리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정녕 이곳이 내가 사는 곳과 같은 땅이 맞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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