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23)화 (123/348)

#123

“참말로 돈 때문이요?”

선사는 인자했고, 부드러웠으며, 깊은 혜안이 있었다. 선사의 말처럼 돈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낙수에 불과할 뿐이다. 윤태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나례청에 위기감을 심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단주의 목적이었다.

“…….”

잠시 침묵하던 윤태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돈이야 사실 없어도 그만이에요.”

윤태희가 픽 웃으며 눈을 내리떴다.

“사실은, 저도 큰물에서 좀 놀아 볼까 해서요.”

큰물이라… 선사가 재차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큰물로 가려는 이유는 뭣이요?”

“용이 되려면 큰물로 가야 하니까요.”

담배를 빨아들이던 선사가 칼칼한 웃음을 흘렸다. 뱃속에 ‘구렁이’를 안고 산다는 선사의 통찰을 응수하는, 제법 그럴듯한 대답이었다.

“허면은 용이 되려는 이유는 또 뭣이요?”

“범을 대적하려면 최소한 용 정도는 되어야겠더라고요.”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마주한 선사가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범과 싸울 생각이요?”

“네.”

“고것은 또 이유가 뭣이요?”

“보다 보다 역해서 참을 수가 없어서요.”

서로를 가늠하는, 알쏭달쏭한 선문답이 이어졌다.

“역하다? …그래, 무엇이 그리 역하여서?”

“이 땅의 주인 행세를 하니 역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선사가 윤태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렇담 이 땅의 주인은 누구라고 생각하시요?”

“글쎄요….”

말을 흐리던 윤태희가 턱을 매만지며 픽 웃었다.

“낮에는 해가 뜨고, 밤에는 달이 뜨는데, 해와 달 중에 어느 쪽이 하늘의 주인이냐고 묻는다면 선생님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실래요?”

윤태희의 대답에 선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선사가 끌끌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렇지. 해도 달도 그저 그곳에 있는 것일 뿐이지.”

은유로 점철된 대화였지만, 지혜로운 선사는 눈앞에 앉은 이 젊은 청년이 감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이 땅에는 인간과 귀신, 신령과 영물, 그 외에 수많은 존재가 살아가고 있건만 어째서 인간이 주인인 양 호령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지긋한 시선으로 윤태희를 바라보던 선사가 말했다.

“당신은 그짝보다는 이짝으로 오는 것이 나았을 것이요.”

으레 무당들이 그러하듯이, 선사 또한 나례청이라면 그닥 달갑지 않았다. 나례청에는 인간 외에는 안중에도 없는 작자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만, 눈앞의 청년은 꽤나 별종이었다. 앞선 선문답으로 미루어 보건대, 청년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로 돌아가는 나례청의 방식에 반감을 품고 있는 듯했다.

“내 반골들 좋아하긴 하오. 허나….”

손에 쥔 장기 말을 굴리던 선사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나는 하늘과 땅을 잇는 무당이요. 범이 주인 행세를 하든, 용이 주인 행세를 하든, 어느 쪽이든 나허고는 하등 상관이 없고, 새우 등 터지기도 싫소.”

선사가 담뱃재를 툴툴 털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긴가민가한 말이었으나, 그 의미를 알아차린 윤태희가 빙그레 웃었다.

“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귀가 어둡고, 뭔 말을 들어도 돌아서면은 금방 잊어 먹소. 좌우지간에 나는 무슨 말인지 코빼기도 알아먹질 못했으니 이 뒷방 늙은이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겄소. 장기 한 판 두고 돌아가시요.”

선사는 몹시 현명한 사람이었다. 선사는 완곡하게 거절의 말을 건네며, 이제까지 나눈 대화는 전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는 배려를 끼워 두었다.

“알겠습니다.”

윤태희가 조용히 대답했고, 마침내 선문답은 끝이 났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장기를 두었다. 어느 순간 윤태희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장군이네요.”

다음 차례가 돌아오면 선사의 ‘궁’을 잡겠다는 의미였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와중에 승패가 났다. 그에 선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랍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껄껄껄 웃었다. 하필이면 외통수라서 피할 곳도 없었다.

“허허이, 포랑 차 뗐으면은 큰일 날 뻔 봤네….”

선사가 한쪽 다리를 세워 앉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젊은 양반이 어째 늙은이를 이겨 먹소?”

“제 할아버지도 저한테는 한 번도 이긴 적 없어요.”

“뭣이요? 그렇게 잘 두면은 포차 떼 불지, 왜 안 뗐소?”

선사가 장난스레 역정을 냈다. 윤태희가 소리 내 웃었다.

“에이, 한 수만 물렀으면은 대추값 안 깎아 줘도 됐을 판인디….”

약속대로 선사는 대추값을 깎아 주려고 했다. 허나 윤태희는 고개를 저으며 ‘그냥 해 본 소리였어요.’ 하며 제값을 치렀다. 체면상 손사래 한 번 칠 법한데 선사는 군말 없이 돈을 받더니 비닐봉지에 대추를 한가득 담아 주었다.

그런데, 선사가 담아 준 대추는 하나같이 멍들고 벌레 먹은 것들뿐이었다.

“정 못 먹겠다 싶으면은 퇴비로 쓰든지 알아서 하시요.”

봉투를 들여다보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

윤태희가 고개를 들었다. 선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노쇠한 나이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혜 선사의 눈에서는 총명한 안광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신기허지. 한쪽으로 꼭 치우치게 된다는 것이….”

‘쭉정이’만 골라 담아 건네준 선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다음번에는 포차 떼 달람 떼 주시요. 무슨 말인지 알어들었소?”

***

그때부터 여혜 선사는 단주와 은밀히 내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위험 부담이 높거나, 무당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의뢰를 벽사단으로 넘겨주기 시작했다.

영검한 만신 여혜 선사는 벽사단에 손님을 이어 주는 가교이자 브로커였다.

단주는 깊은 산중에 벽사단의 본거지를 꽁꽁 숨겨 두고, 오직 선사를 통해서만 고객을 받았다. 선사의 고객들 대부분이 고위층 인사들이었고, 단주는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터무니없는 액수를 불러 제꼈다.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해 주는 안하무인 수전노라는 인상은 정반대로 기묘한 신뢰를 주었다.

단주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한 달에 두세 번은 산중에 들러 손님을 맞았고, 지난 몇 해 동안 벽사단을 거쳐 간 사람 수만 해도 어느덧 이백 명 가까이 되었다. 벽사단의 소문이 암암리에 돌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선사가 벽사단을 부려 일을 시킨다더라, 벽사단의 주인은 마음대로 외양을 바꿀 수 있다더라, 단주의 적색 두루마기를 만지면 귀감이 뜨인다더라, 와 같은 풍문들이었다.

그 소문들은 죄다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에 불과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윤태희가 일부러 흘린 가짜 정보였기 때문이다.

“참, 아까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단주는 잊고 있던 김석철과 서정탁의 존재를 기억해 냈다.

“옆방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둘 다 기절해 있는 상태입니다.”

“손은?”

단주의 두루마기에는 아주 사특하고, 강력한 원념이 깃들어 있었다. 악한 기운이 짙게 밴 물건이니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김석철은 범인이 아니라 귀재이기는 했으나 신을 받고도 몇 년째 귀감을 열지 못한 것으로 보아 딱히 특출난 그릇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연약한 그릇에 한계 이상으로 내용물을 담았으니 그릇이 깨질 수밖에 없다. 김석철의 손이 떨어져 나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금방 처치하였기에 망정이지, 시간이 조금만 늦었어도 김석철은 그대로 손을 잃었을 것이다.

“원래대로 붙여 두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단주는 상체를 뒤로 슬쩍 젖히고 목청을 높였다.

“흑제야.”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끼익, 열리며 새하얀 백의를 입은 흑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털 같은 걸음으로 단주 앞에 선 흑제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부르셨습니까, 단주님.”

“날파리가 들어왔어. 기억을 뒤섞어 줘.”

단주가 손가락을 들어 옆 방을 가리켰다.

“꿈을 몇 겹씩 겹쳐서 꾸게 해. 뭐가 현실이고 꿈인지 분간 못 하도록.”

단주가 헛소문을 낸 이유는 나례청의 정보망에 혼란을 주기 위함이었다. 제 정체를 미궁 속에 빠트리려는 전략이었다.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다들 벽사단의 우두머리가 설마 인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듯했다. 어느새 소문 속의 단주는 오래 묵은 영귀가 되어 있었다.

“그다음 적당한 곳에 버려.”

“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설마하니 그 소문을 듣고 직접 여기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소문이 잘 퍼졌다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벽사단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바깥으로 새어 나갔거나 혹은 보안에 취약점이 생겼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흑제가 겹겹이 꿈을 덧씌워 기억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으로 대충이나마 뒷수습을 할 수 있겠으나, 한번 침입자에게 뚫린 이상에야 이곳은 이제 안전하지 않았다.

“아, 그리고….”

단주가 턱을 괴고 옆방을 응시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 내가 어제 부탁한 건.”

흑제는 단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지난밤, 단주는 흑제를 불러 소년의 꿈에 들어갔다 올 것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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