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지난밤, 단주는 흑제를 불러 재겸의 꿈에 들어갔다 올 것을 명했다. 꿈속에 들어가서 소년이 석주련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캐내 오라는 것이었다.
그에 흑제는 소년의 집, 마당 한쪽에 심겨 있는 아름드리 뻗은 나무로 가서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소년이 있는 방의 창가 근처까지 뻗어 있는 나뭇가지 그림자가 되어서 은밀히 방 안을 주시했고, 소년이 잠이 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소년은 밤새도록 뒤척이며 좀처럼 잠이 자지 않았다. 꿈을 꾸려면 잠을 자야만 하건만, 흑제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동이 터 오는 것을 보며 이대로 발길을 돌려야 하나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다행히도 소년이 잠깐 선잠에 빠졌다.
흑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소년의 의식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잠의 깊이가 워낙 얕아서, 꿈을 직접 매만지기에는 몹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흑제는 노선을 바꾸어 소년의 의식 속에 ‘씨앗’을 심어 두고 나왔다.
그 씨앗은 흑제의 의식과 이어지는 것으로, 소년이 만약 이다음에 꿈을 꾸게 되면 그 씨앗으로 하여금 흑제는 꿈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소년의 의식이 주체이므로 직접 꿈에 들어가는 방법에 비하면 꿈을 장악하는 힘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래도 몇 마디 대화만 나누면 되므로 충분할 것 같았다.
제아무리 경계심이 강한 사람이라도 꿈속에서는 그 벽이 허물어지기 마련이므로, 집요하게 추궁하지 않아도 거리낌 없이 비밀을 털어놓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몇 시간 전. 낮잠에 빠진 건지 마침내 소년이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흑제는 계획대로 소년이 꾸는 꿈의 일부가 되어서 소년을 만나 볼 수 있었다.
흑제는 소년의 꿈속에서 알아낸 것을 단주에게 털어놓았다.
“나례청장이 그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손에 개암을 쥐고 굴리던 단주가 멈칫하며 흑제를 바라보았다.
“그자가 말하기를, 석주련이 조만간 위에서 호출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 두 사람이 만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단주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느슨히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푹 기대어 앉은 채로, 미동조차 없이 탁자만 노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
단주는 숨을 크게 내쉬더니 눈썹 끝을 매만지며 물었다.
“또? 다른 건 없었니?”
잠시 고민하던 흑제가 조용히 말했다.
“꿈속에서… 그자가 ‘이거 꿈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뭐?”
단주의 눈이 살짝 커졌다. 턱 끝까지 올린 저지 지퍼를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던 손이 우뚝 멈췄다. 단주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더니 상체를 확 일으켰다.
“진짜로?”
단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재차 되물었다.
“예…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인간은 그자가 처음이라서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때문에 장악력이 몹시 약해졌고, 그자가 본인 의지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주도권을 뺏겼습니다. 그래서… 뒤에 가서는 꿈이 다소 깨졌습니다.”
흑제가 시선을 내리며 덤덤하게 말하자, 단주가 곧장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래서? 들켰니?”
“아니요. 들키진 않았습니다.”
흑제의 대답에, 단주는 일시에 힘이 탁 풀렸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들키기 바로 직전에 외부의 방해로 인해 소년이 잠에서 깼고, 동시에 꿈이 뚝 끊어졌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만약 누군가 깨우지 않았더라면, 필시 소년은 자신이 꾸는 꿈이 평범한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 그렇구나.”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단주는 일단 안도한 듯했다. 그러나 꽤나 놀랐던 모양인지,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칼을 손아귀로 헤집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 그리고….”
그때, 할 말이 남았는지 흑제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단주는 말해 보라는 듯 흑제를 바라보았다. 흑제는 무언가 내키지 않는 것처럼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자가 당신에게 입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웬만해선 놀라는 일이 없는 흑제는 그때 정말이지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의식의 줄을 놓아 버릴 뻔했다.
꿈의 일부가 되어 들어갔을 때, 흑제는 자신이 단주가 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흑제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단주인 척 연기를 하거나 흉내를 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소년의 꿈속이므로, 흑제는 소년의 의식 속에 있는 단주의 면면을 긁어모아 그대로 흉내를 냈다. 꿈속의 단주는 소년이 현실에서 경험한 단주를 재구성한 모습이었다. 소년은 별다른 의심 없이 흑제를 단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흑제는 무사히 소년의 비밀을 캐낼 수 있었다.
그러나 흑제는 어느 순간,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걸 깨달은 순간은 단주의 명을 완수한 그 직후였다. 용건을 끝낸 흑제는 소년을 깊게 재워서 꿈속의 꿈에 빠지게 한 뒤, 미련 없이 꿈에서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너는 머리 내린 게 더 잘생겼어.”
그러나 소년은 자라는 잠은 자지 않고 계속 흑제에게 쫑알쫑알 말을 붙였던 것이다. 처음에 꿈이냐고 물었을 때만 해도 그저 신기한 인간이구나 감탄하고 말았는데, 그제야 흑제는 소년에게 꿈의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소년이 건넨 말들은, 현실의 단주에게는 한 번도 건넨 적이 없었던 말들이었다. 미지의 상황이 닥치자 흑제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그때부터 조금씩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꿈의 주도권을 완전히 뺏겼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은 소년이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였을 때였다. 소년은 단주의 몸 위에 올라와서 앉았고, 그때부터 완벽하게 상황이 역전되어 외려 흑제 쪽에서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어졌다. 몽마(夢魔)인 흑제로서는 자존심이 상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흑제는 몹시도 황망한 심정이어서 분할 겨를이 없었다.
소년이 자신에게 입을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에 매우 놀란 흑제는 저항하려고 시도했으나, 무거운 돌에 짓눌린 것처럼 사지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이런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물 같은 인간이 있나 싶었다.
흑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눈치껏 상황을 파악하기로 두 사람이 전에도 입을 맞춘 적이 있는 듯해서 더 놀랍기만 했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으며, 태희 님께서는 혹시 그자를….
“응. 그리고,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흑제는 끝내 말을 삼켰다. 그에 패현과 단주는 의아한 눈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흑제가 말을 뭉뚱그리는 것은 몹시 드문 광경이기 때문이었다. 얼마간 흑제를 응시하던 단주는 뭐라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흑제는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자리를 떴다.
“조만간 위에서 호출이 내려온다, 라….”
흑제가 떠난 뒤, 단주는 곰곰이 흑제의 전언을 되새겼다. 손끝으로 탁자 위를 톡톡 건드리며, 생각에 잠긴 눈으로 창밖 풍경을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오늘따라 누각이 조용했다.
“나머지 애들은? 다 어디 갔어?”
“아마 제일 끝 방에 모여 있을 겁니다.”
“그래?”
단주는 입고 있던 저지의 지퍼를 턱 끝까지 채워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패현이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라붙었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단주의 움직임을 따라 무릎까지 내려오는 적색 두루마기 자락이 부드럽게 펄럭였다. 긴 보랑 끝에 가까워질수록, 두런거리는 영귀들의 목소리 또한 점점 가까워졌다.
단주는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
널찍한 방 안에는 영귀 셋이 있었다.
“단주님 언니야-!”
가장 먼저 단주에게 달려온 것은 아이의 외양을 한 영귀였다. 헬멧을 뒤집어쓴 듯한 바가지 머리에, 꽃무늬 티셔츠를 입은 영귀는 예닐곱 살쯤 되어 보였다. 뺨에는 앙증맞은 주근깨가 뿌려져 있었고, 앞니 두 개가 빠져 있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등에는 제 덩치보다도 훨씬 큰 거문고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하나도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가벼운 가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메고 있었다.
단주는 저에게로 달려오는 영귀를 보고는, 삐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연옥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다가 단주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게 누구야. 우리 귀여운 연옥이네.”
단주가 빙그레 웃으며 연옥을 한쪽 팔에 훌쩍 안았다.
“언니야! 연옥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이제 왔어!”
연옥은 단주를 탓하듯이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어깨를 통통 때렸다.
“그랬어? 그동안 많이 바빴어.”
“언니야, 단주님 언니야.”
“응.”
“연옥이 보고 싶었어? 얼른 보고 싶었다고 말해죠.”
연옥이 떼를 쓰듯이 단주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응, 단주님도 연옥이 많이 보고 싶었어.”
대답에 만족한 연옥이는 꺄르륵 웃으며 조막만 한 손으로 단주의 턱을 문질거렸다. 깔끔하게 면도를 했기 때문에 겉보기엔 평범한 살결처럼 매끈해 보였으나, 손으로 직접 만지면 까끌까끌한 느낌이 났다. 연옥은 이 까끌까끌한 느낌을 좋아해서 툭하면 단주의 품에 안겨서는, 이렇게 턱을 만지작거리고는 했다.
단주는 연옥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냇동생 대하듯이 예뻐하였다.
“언니야, 나 그동안 실력이 엄청 많이 늘었어!”
연옥은 이내 단주의 품에서 내려오더니 등에 메고 있던 거문고를 주섬주섬 내렸다. 연옥은 거문고 줄을 띠링! 띵! 튕기며 해맑게 단주를 올려다보았다.
“자! 그럼 이제부터 연옥이의 연주를 들어죠.”
연옥은 손에 술대를 쥐고 거문고 연주에 돌입할 모양새였다. 단주는 그닥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눈썹 끝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음… 나중에.”
순간, 줄을 튕기려던 연옥의 손이 삐끗했다.
띠로리링….
거문고에서 이상한 삑사리가 나는가 싶더니,
“…뭐?”
연옥의 얼굴 위로 애처로운 먹구름이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