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언니야… 연옥이를 슬프게 하지 말아죠….”
연옥은 조막만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훌쩍훌쩍 우는 시늉을 했다. 그에 난감해진 단주는 팔짱을 끼며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뒤쪽에 서 있던 패현이 정색을 하며 연옥을 제지했다.
“무엄하다. 어리광은 그쯤에서 끝내라.”
패현의 훈계에, 우는 시늉을 하던 연옥이 우뚝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연옥은 어느덧 돌변하여 표독스러운 눈으로 패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패현 언니야… 연옥이한테 괜히 시비 걸지 말아죠….”
패현은 눈을 가늘게 좁혀 뜨고는, 연옥을 내려다보며 조소했다.
“이게 왜 시비지? 허면 단주님께 지옥도라도 보여 드릴 참이냐?”
영귀, 연옥이 지닌 능력은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환시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패현은 그연옥의 힘이 보여 주는 무언가를 ‘지옥도’라 표현하고는 하였는데, 그 이유는 정말로 지옥 그 자체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겪을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상황을 보여 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저마다의 지옥도는 다르기 마련이었다.
연옥이 들고 다니는 특별한 거문고는, 몇 세기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목을 매달았던 오동나무를 베어서 만든 것이었다. 깊은 원한과 사연이 서린 오동나무로 악기를 만들었으니, 그 선율은 곡소리와 다름없었다.
연옥의 거문고 연주는 듣는 이로 하여금,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장면을 영사기처럼 생생하게 현시하여 주었다. 연주를 들은 대상은 자신이 처할 수 있는 상황들 가운데서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소중한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그것을 실패하는 모습을, 혹은 잊고 싶었던 괴로운 기억이 있다면 그것을 몇 번이고 되돌리고 되돌려서 반복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래도 연옥이의 연주가 눈물겹게 아름답다는 것만 알아죠!”
“그게 대체 뭐가 아름답지? 끔찍하기 짝이 없을 뿐이다.”
연옥의 거문고 연주는 아름답고, 구슬프며, 정신을 무너트린다.
“그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투닥거리는 둘을 바라보던 단주가 부드럽게 중재에 나섰다.
“싫어. 패현 언니야가 먼저 연옥이한테 못되게 말한 거라고 해죠.”
“버르장머리 없는 너를 언제까지고 받아 줄 것이라 생각지 마라.”
그러나 두 영귀는 팽팽한 기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 좋아. 그러면… 사이좋게 혼날까?”
단주가 한쪽 눈썹을 비뚤어 트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
“…….”
다정한 경고였다. 연옥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더니 한껏 토라진 얼굴을 했다. 패현 또한 떨떠름한 낯으로 연옥에게 닿았던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단주님! 일은 잘 끝내셨슴까?”
잠시 붕 뜬 틈을 타서, 눈치를 보던 새로는 후다닥 예를 갖추고 단주에게 인사를 올렸다. 새로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옷 자랑을 했다.
“이거 좀 봐 주십쇼! 이번에 직접 만든 옷임다. 멋지지 않슴까?”
단주가 피식 웃으며 “응, 예쁘네.” 고개를 끄덕였네.
“멋지다! 새로 언니야한테 꼭 어울려.”
“역시 연옥이는 보는 눈이 있슴다.”
“연옥이도 한 번 입어 보게 해죠!”
새로와 연옥은 죽이 제법 잘 맞았다. 활기차면서도 어딘가 엉뚱한 성격이 비슷하였고, 깐깐하고 고지식한 패현을 못마땅해하는 것도 똑같았다.
“연옥이가 이 옷을 소화할 수 있겠슴까? 이건 제 스토리 그 자체임다!”
“스토리가 아니라 스타일.”
단주가 정정하든지 말든지, 새로와 연옥은 옷을 입느니 마느니 꺅꺅거리느라 바빴다. 패현은 소란스러운 두 영귀가 못마땅한 듯 보였으나. 참견은 하지 않았다.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단주가 어느 한쪽에 살랑살랑 손 인사를 건넸다.
“형운, 안녕.”
형운이라 불린 영귀는 덩치가 몹시 우람했다. 커다란 황소 같은 몸집에 앞섶 저고리를 풀어헤쳐 가슴을 드러낸 그는 망나니, 혹은 산적처럼 보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
“오옷!! 단주!! 이게 얼마 만이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영귀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사자후나 다름없는 목청이어서 단주도 잠시 휘청하였다.
“응, 그래… 잘 지냈어?”
“잠을 잘 잤냐 물었소?! 와하하!! 그럼 그럼!! 푹 자고말고!!”
“…….”
듣는 귀가 어두운 형운은 그만큼 목소리가 컸다.
“단주!! 요번에 새로 담근 술이 있는데 한잔하시겠소?!”
형운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술 동이를 가리켰다.
“나중에.”
단주는 빙그레 웃으며 사양했다.
“한 잔은 괜찮지 않소!! 오늘은 가볍게 맛만 보시오!!”
“어, 다가가 없네. 다가는 어디 갔어?”
형운이 재차 술을 권하자, 단주가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다가는 요 앞에 산책하러 나갔소!!”
형운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기다려 보시오!! 내가 다가를 불러오겠소!!”
형운은 직접 다가를 찾으러 나가는 대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풀었다. 두꺼운 가죽 주머니 안에는 술을 빚고 남은 술지게미가 들어 있었다.
형운은 술지게미를 한 줌 쥐어서 조물거리기 시작했다. 솥뚜껑만 한 손으로 힘을 줘서 꽉꽉 눌렀다. 형운은 술지게미를 단단히 뭉쳐 사지를 만들어 냈다.
“얘야. 가서 다가를 데려오너라.”
형운의 손안에서 탄생한 지게미 인형이 꾸물거리며 일어섰다. 영귀 형운은 술을 무척 좋아하여 직접 술을 빚곤 하였는데, 술지게미를 뭉쳐 수족처럼 부릴 줄 알았다. 술지게미 병정은 반나절이 지나면 그대로 스러져 흙이 되었다.
형운의 심부름을 받은 지게미 인형이 깡총깡총 어디론가로 뛰어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댕기 머리를 곱게 땋은 영귀가 치마폭을 휘날리며 나타났다.
“다가. 안녕.”
“단주님… 불러 주시기를 기다렸어요….”
다가라 불린 영귀가 빙그레 웃더니, 다소곳하게 무릎을 굽혀 보였다.
“저는 어젯밤, 단주님을 생각하며 밤하늘의 별을….”
“다가!! 산책은 잘 하고 왔소이까?!”
다가는 형운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형운과 눈이 마주치자, 다가는 수줍게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이내 연옥이에게 뭐라 뭐라 귓속말을 소곤거렸다. 그러자 연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형운에게 다가가 옷 소매를 잡아당겼다.
“형운 언니야. 다가 언니야가 한 번만 더 말 걸면 죽여 버리겠대. 뒈지고 싶지 않으면 다시는 말 걸지 말라고 전해 달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형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를 쳐다보자, 다가는 발그레 웃으며 손을 들더니 목을 찍 그어 버리는 시늉을 했다.
마침내 의미를 알아차린 형운이 울먹거리며 단주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가는 여전하구나….
단주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골이 지끈거리는 듯하여 이마를 짚었다.
다가는 단주를 제외한 남자와는 절대 말을 섞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연옥을 통해서 말을 옮기게 했는데, 그 내용이란 전부 험악하고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가는 벽사단 영귀들 가운데 가장 말이 없었지만, 가장 입이 걸었다. 말의 폭력성으로만 따지면 웬만한 시정잡배 저리 가라였다.
“내가 뭘 잘못했소!! 다가는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하는 것이오!!”
다가는 특히 형운을 제일 싫어했다. 산적과도 같은 생김새였지만, 겉모습과 달리 마음만은 여리디여린 형운은 남몰래 수없이 눈물을 훔쳐야만 했다.
“형운 언니야. 다가 언니야가 네놈의 못생긴 쌍판때기 꼴도 보기 싫으니, 그 더러운 가슴 털을 불로 그슬러 버리기 전에 세 발자국 멀리 떨어지래.”
그렇게 오늘도 다가는 형운의 눈물샘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 언니야… 다가 언니야가, 오늘 저놈의 옷차림은 영귀의 수치라고, 거적때기를 입어도 그보단 낫겠다고 전해… 어? 이건 말하지 말라구?”
난데없이 패션을 지적당한 새로가 발끈하여 다가를 쳐다보았다.
“다가! 방금 뭐라고 했슴까? 제 옷이 뭐가 어때서….”
통신 오류였다. 진심이긴 했지만 새로에게 시비를 걸 생각은 아니었던 다가는 난처하게 웃다가 치맛자락 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서슬 퍼렇게 날이 벼른 손작두였다. 다가는 큼지막한 작두칼을 양손에 쥐고 철컥철컥 작두질을 하다가 팔을 슬쩍 뻗었다. 작두를 펼치자 날과 날 사이로 세모꼴의 빈 곳이 생겼다. 그 세모꼴 안에는 새로가 있었다. 다가는 철커덕, 소리와 함께 작두를 한 번 닫았다. 길길이 날뛰던 새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을 멈췄다.
“어…? 방금 제가 뭔 말을… 하려고 했었… 슴까?”
다가가 수줍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새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껌뻑였다. 그러다 다가의 손에 들려 있는 가위를 보고는,
“다가, 설마 또… 왜 남의 생각을 함부로 끊어 놓슴까!”
그제야 비로소 상황을 눈치챘다. 방금 다가가 생각을 싹둑 자른 것이다.
다가는 작두 칼로 상대의 생각을 절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가가 칼날 사이에 상대를 집어넣고 작두를 닫으면, 상대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가도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거나, 혹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뭘 하려고 했는데 찰나 사이에 그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까먹어 버리는 답답한 상황이 발생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변했다면 다가가 작두를 닫은 것이었다.
“단주님, 머릿속이 복잡하실 때는 언제든지 저를 불러 주시어요.”
“다가! 딴소리하지 말고 얼른 저한테 사과하십쇼.”
“새로 언니야. 다가 언니야가 작두로 썰어 버린 게 네놈 모가지가 아닌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래.”
“뭐라구욧? 지금 말 다 했슴까! 같은 영귀들끼리 이래도 되는 검까?”
영귀들이 아웅다웅하는 소리로 방 안이 시끄러워졌다. 어느새 단주는 뒷전에 밀려나 있었다. 그에 눈치를 살피던 패현이 뒤늦게 상황 정리에 나섰으나,
“그만들 하여라. 단주님께서 한 달 만에 오셨는데 볼썽사나운 꼴을….”
영귀들은 패현의 말이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각자 제 할 말을 늘어놓느라 정신없었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들이… 패현이 한숨을 쉴 때였다.
“자, 대충 다 떠들었으면. 주목….”
저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관망하고 있던 단주가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왈왈대던 소란이 일시에 뚝 그쳤다. 영귀들의 시선이 단주에게 꽂혔다. 단주가 팔짱을 끼더니 문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공지 사항. 다음 주에 누각을 다른 곳으로 옮길 거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티격태격하기 바빴던 영귀들의 눈빛이 일변했다. 차갑고 고요한 귀기가 서린 눈동자로, 영귀들은 눈앞에 서 있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누각으로 올 수 있는 동선이 바깥으로 샜어. 여기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다가랑 새로는 오늘부터 가능한 빨리, 옮길 만한 인적 드문 산을 알아봐 줘.”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형운, 연옥이는 새로운 소문을 흘려 줘.”
말을 멈추고 눈앞의 장기말을 휘 돌아보던 단주가 입을 열었다.
“나례청의 원주인, 방상시가 돌아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