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26)화 (126/348)

#126

윤태희는 생각했다.

본디 신(神)이란 있다가도 없으며, 없다가도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어느 마을이든 당목(堂木)이 있었고, 마을 어귀마다 천하 대장군이 있었다. 어떤 산이든 고갯마루에는 돌무더기를 쌓아 두고 서낭신을 모셔 두었으며, 터가 좋은 집이면 가정을 돌보는 가택신이 있었다. 지금껏 무수한 신들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이 땅에 좌정하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따라서 신이란,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결국은 인간에게 속박되는 존재였다. 인간에게 잊힌 신은 힘을 잃고 쇠락하는 법이었다. 그것은 악귀를 쫓는 신으로 군림하던 방상시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상시는 선대 나례청을 세운 시조이자, 한때 나자들을 이끌던 영웅이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금은 뚜렷한 실체 없이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방상시는 선대 나례청을 세운 뒤, 인간에게 자신의 자리를 선양하고자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현대 나례청은 과거 방상시가 이룩해 낸 위업을 이어받고, 그의 의지를 계승하여 인간을 수호한다….

방상시의 정보는 나례청 안에서도 극비로 다루어졌으며, 나자들에게 공개된 내용은 이것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나례청의 연혁을 훑을 적에나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수준에 그쳤다.

현대 나례청에서 방상시는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아 있었다. 어느덧 그 드높은 이름은 빛바랜 지 오래였고, 찬란하던 존재감 역시 흐릿해져 있었다.

입청 당시만 해도 윤태희는 나례청의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례청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나례청을 세운 이가 누구인지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고리타분하고도 불필요한 정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불현듯 윤태희의 뇌중을 때린 생각이 있었다.

나례청의 시조이자 우두머리였던 방상시는 인간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이 땅을 떠났다고 했다. 그러나 사라진 줄 알았던 방상시가 다시 돌아온다면?

선대의 주인이 나타난다면 나례청은 틀림없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권좌는 하나뿐이다. 따라서 본래 주인이었던 방상시가 돌아왔다는 풍문을 흘린다면, 사실 여부를 떠나서 소문만으로도 나례청장의 입지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커다란 사안이 될 것이었다.

이것이 윤태희가 방상시를 들먹이게 된 이유였다. 윤태희는 벽사단을 설계하던 그 순간부터 방상시라는 이름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방상시의 재래는 나례청의 근간을 뒤흔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될 것이었다.

‘방상시가 이 땅에 돌아오리라.’

본청 후문에 붙인 벽보는 단주가 벌인 자작극이었다. 벽보로 하여금 벽사단의 존재를 드러내고, 선대의 주인이 돌아왔음을 만천하에 포고한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승부수이자, 떠보기였다.

그리고 윤태희의 예상은 적중하였다. 방상시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석주련의 반응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석주련은 벽보의 진의를 알게 된 순간, 벽보를 나례청장에게 가져가지 않고 즉시 파쇄케 했다. 벽보에 담긴 내용, 즉 방상시의 재래를 장차 나례청이 존속하는 데 있어서 큰 위협으로 여긴다는 것을 단번에 증명해 보인 꼴이었다.

“소문을 퍼뜨려 줘. 나례청의 원주인, 방상시가 돌아왔다고.”

***

단주가 다시 긴 복도를 걸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아까만 해도 개암을 집어 던지며 새침을 떨던 뚜뚜는 탁자 위에서 개암을 갉아 먹고 있었다.

“화 풀렸어?”

단주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뚜뚜는 갑자기 세수하는 시늉을 하더니 마치 딴청이라도 피우는 듯이 탁자 위에 올려 둔 장 회장의 명함에 관심을 보였다.

잠깐 한눈판 사이에 뚜뚜는 툭하면 종이를 찢어발겨 놓곤 했는데, 금방이라도 입으로 가져갈 듯하여 단주는 잇새로 씁, 소리를 내며 명함을 낚아챘다.

명함을 챙겨 든 단주는 곧장 병풍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풍과 벽 사이에는 통로처럼 폭이 좁은 공간이 나 있었는데, 큼지막한 책장이 병풍과 마주 본 채 벽 한 면을 이루고 있었다. 단주는 누각에 올 때마다 책을 가져와서 읽고는 했는데, 그러다 놓고 간 책들이 쌓이고 쌓이며 자연스레 작은 서고가 만들어졌다. 책장에는 온갖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단주는 뒷짐을 지고 서가 앞에 서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종처럼 곁에 따라붙은 패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대로 말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대충 아무 책이나 빼 들던 단주가 힐끗 패현을 쳐다보았다.

“뭘?”

“벽사단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자도 이제 계획의 일원이 되지 않았습니까.”

어렴풋한 지칭이었지만, 단주는 패현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눈치챘다.

“…….”

단주는 말없이 책 페이지를 사라락 넘겼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뭘 믿고 말을 해.”

고개도 들지 않고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단주가 짧게 대답했다.

“그자가 불안하십니까?”

단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겸이 자꾸만 ‘변수’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윤태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례청 후문에 붙인 벽보는 나례청장의 수위까지 올라갔어야 했다. 단주는 시간이 지나면 ‘방상시 재림어예토’라는 글자만 남고, 나머지는 사라지도록 손을 써 두었다. 석주련은 나례청장에게 벽보를 가져가서 이런 것이 붙었노라 보고를 할 것이었고, 그때쯤 되면 남은 글자는 저절로 휘발되었을 것이므로, 나례청장이 직접 글자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벽보는 나례청장에게 보내는 도전장이자, 경고장이었다.

그러나 변수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이건 파자예요.”

재겸이 그 자리에서 벽보에 숨겨 둔 말장난을 알아본 것이었다. 덕분에 그 자리에서 벽보의 진의가 탄로 나고 말았다. 그에 석주련의 선에서 벽보는 파쇄되었고, 벽보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라 함구령을 내리며 호도하였으니, ‘방상시 재림어예토’라는 메시지는 나례청장에게 가닿지도 못하고 버려졌다.

단주가 영귀들에게 소문을 퍼뜨리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바깥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어찌 됐든 나례청장의 귀에도 흘러 들어갈 테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원래의 계획에서 다소 틀어진 셈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재겸 덕분에 두 번 일하게 되었다.

“그래도, 모처럼 엮인 인간이니 태희 님께서도 그를 믿을 만한 친구로….”

패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단주가 피식 웃었다.

“친구?”

책 페이지 사이에 명함을 끼워 넣던 단주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죽을 날 받아 놓은 사람이랑 친구 할 생각 없어.”

필요 이상으로 선을 긋는 냉담한 반응에, 패현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단주는 태연한 얼굴로 책을 뒤적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책을 넘기던 단주의 손이 우뚝 굳었다. 그에 가만히 눈치를 살피던 패현이 의아한 기색으로 단주의 표정을 살폈다.

책을 휘리릭 넘기는 와중에 페이지는 어느 즈음에서 저절로 멈춰 있었다. 언젠가 책갈피처럼 꽂아 두었던, 폴라로이드 사진이 한 장이 끼어 있던 탓이다.

이영신이 소년을 포박하기 위하여 일회용 카메라로 찍었던 사진이었다. 당시 상황을 파악할 법한 증거를 치우면서 따로 챙겨 두었다가, 아무 책에나 대충 끼워 두었던 모양이었다. 사진 속 소년은 피투성이가 된 채 활을 들고 있었다.

“…….”

윤태희는 좀처럼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단주는 숨을 멈춘 채, 흐릿한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피를 뒤집어쓴 소년의 생김새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단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사진을 매만졌다. 홀린 듯이 소년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 보던 손끝이, 어느 순간 불에 덴 듯 짧게 흔들렸다.

단주가 숨을 크게 들이켜는가 싶더니, 스르륵 눈을 감았다.

“어차피… 한때야.”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단주는 책을 덮었다. 제자리에 책을 꽂아 넣은 단주는 얼마간 그렇게 눈을 감고 서 있다가, 힘없이 마른세수를 했다.

“…지쳐 보이십니다.”

패현이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좀 피곤하네.”

어제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이마를 만져 보니 미열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마를 짚어보던 단주는 책 한 권을 챙겨서 창가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좀 쉬어야겠다.”

창문 아래에는 물건을 넣어 두는 커다란 반닫이가 놓여 있었다. 장방형으로 된 길쭉한 반닫이는 사람 한 명은 족히 누울 수 있는 크기여서, 가끔은 간이 침상으로 쓰였다. 단주는 종종 그 위에 누워 낮잠을 자곤 했다.

반닫이 위에 한쪽 팔을 베고 누운 단주는, 이내 다리를 꼬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에서 부드러운 산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단주가 보는 책은 아주 낡은 동화책이었다. 잔뜩 손때가 묻은 탓에 닳도록 읽은 책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묵묵히 곁을 지키던 패현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계획이 전부 끝나면, 태희 님께서는 무얼 하고 싶으십니까?”

“글쎄….”

이후의 삶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디 한적한 섬에나 들어가서 바람이나 좀 쐬고 싶어.”

단주가 책 페이지를 사라락, 넘기며 조용히 대꾸했다.

“산은 이제 지긋지긋해….”

갱지에 적힌 활자가 반쯤 감긴 눈 위로 자장가처럼 스며들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책이었다. 모든 문장을 외우고 있으니 구태여 읽을 필요가 없는데도 단주는 언제나 그 책을 곁에 두었다. 습관처럼 읽고, 또 읽고는 했다.

가장 최초의 증오이자, 유품과도 같은 것….

테오는 바다에 가고 싶었습니다. 에메랄드빛 물결이 햇살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섬에 가고 싶었습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수 있도록, 외로운 테오는 외로운 바다로 가서 외롭지 않고 싶었습니다….

졸음이 몰려왔다. 단주는 읽던 책을 얼굴에 덮고 배 위로 손을 올렸다.

“좀 잘게. 해 지면 깨워 줘.”

“네, 알겠습니다.”

다람쥐는 어느새 단주의 배 위로 올라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단주는 왼손으로 다람쥐를 감쌌다. 그러자 다람쥐가 흠칫하며 단주의 손을 물리쳤다. 다람쥐는 단주가 왼손으로 만지는 것을 싫어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본능처럼 천적의 기운을 알아차리는 듯해서 매번 신기했다. 단주는 팔을 쓱 들어 올리더니 제 왼손을 바라보았다.

단주는 언제 어디서든 반드시 왼쪽 손목에 시계를 찼다. 그가 차고 있던 시계를 천천히 풀었다. 은색 메탈 시계로 가리고 있던 자리에는, 흉터와 함께 손목을 감싸고 있는 가느다란 검은 뱀이 문신처럼 녹아들어 있었다. 얼핏 보면 실 팔찌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시.”

단주는 맥을 짚듯이 손목 위를 더듬어 보았다. 몇 번이고 조용히 불러 보았지만, 역시나 시시는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창문을 닫을까요?”

어느 순간, 곁에 서 있던 패현이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둬.”

패현은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열린 창문으로 흘러드는 바람결에 희미한 라일락 향기가 풍겼다. 단주는 그대로 팔을 축 늘어트렸다.

“…….”

깊게 숨을 들이쉬자, 오래 묵은 갱지에서 그리운 냄새가 났다.

“어차피 한때야.”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윤태희는 모처럼 깊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차피 한때야….”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미풍이 부드럽게 나부끼며, 책과 이마 사이에 걸쳐 있던 앞머리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책 표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름이 쓰여 있었다.

윤선오

윤태희는 인생의 절반을 ‘선오’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그리고 선오라는 이름은, 윤태희가 저지른 죄악의 증명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