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30)화 (130/348)

#130

“바보지, 바보! 너는 천치다, 천치.”

윤기 나는 검은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크크크, 웃어 댔다.

“넌 어디서 왔어?”

“글쎄. 나는 처음부터 여기 있었는걸? 크크크.”

꾸물꾸물 신령의 몸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아래로 내려온 검은 뱀은 선오가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더니, 똬리를 틀고 앉았다.

“내가 왜 바보인데?”

“고작 저 정도 문도 못 열고 있으니, 그게 천치지. 누가 천치냐! 크크!”

“아무리 힘을 줘도 문이 열리질 않아. 할아버지가 부적을 붙였어.”

“아니야. 아니야. 너는 힘을 준 적이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힘을 쓸 줄 모른다는 거지. 크크크.”

힘을 쓸 줄 모른다고? 선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볼 때였다.

“본향의 표식이 아깝다. 아까워. 크크.”

“본향? …본향이 뭔데?”

“나보고는 어디서 왔느냐고 묻더니, 정작 너야말로!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구나. 으이구. 크크크. 역시 바보야. 바보. 크크.”

선오는 뱀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검은 뱀이 혀를 날름거릴 때마다 잇새로 시시,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가 났다.

“본향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본향은 모든 것이야. 크크크.”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

“본향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야. 크크.”

검은 뱀은 선명하고 새빨간 눈을 가지고 있었다. 좁쌀만 한 붉은 눈이 선오를 응시했다. 검은 뱀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선오의 앞으로 다가왔다.

“본향은 본향이지. 그리고 너에게는 본향의 표식이 있어.”

“…그게 뭔데?”

“본향이 너를 아낀다는 뜻이지! 크크크!”

선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릴 때였다.

“잘 생각해 봐. 네가 화를 내면 잡귀들이 벌벌 떨지 않았어? 근처로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지? 크크크.”

“맞아.”

“내일 날이 맑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열에 여덟은 정말로 날이 맑고. 직감이나 예감이 눈에 띄게 들어맞는 순간이 있지는 않았고?”

“있었어.”

“그래, 그게 바로 본향의 표식이 있다는 증거야. 본향의 표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호령하는 힘이 있거든. 그래서 ‘군림자’, ‘명명자’라고도 불러.”

“군림자… 명명자….”

선오가 조용히 단어를 곱씹으니, 뱀이 키득키득 웃었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크크.”

뱀은 한참을 키득거리며 웃다가, 선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를 이곳에서 꺼내 줄 수 있어?”

“꺼내 달라고?”

“그래. 나를 이곳에서 꺼내 주면 너의 가신이 되어 줄게.”

“가신?”

“너의 권속이 되어 주겠다는 뜻이야.”

선오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뭐 하는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뱀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싫지 않았다. 윤 노인은 오락가락했기에 웬만해선 대화가 제대로 통하지 않았고, 잡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쓰레기장에 못 박힌 선오에게 유일한 말벗이라고 할 만한 이는 가끔 찾아오는 복지사뿐이었다.

그러나 윤 노인은 선오가 사람과 말을 섞는 것을 싫어했으므로, 복지사는 선오의 말동무가 되어 줄 수 없었다. 말 몇 마디 주고받았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이렇게 신방에 갇히고 말았으니까.

이곳에 있는 뱀이라면 윤 노인의 시선을 피해서 가끔 대화를 나누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만에 하나 들키더라도 사람이 아니니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널 꺼낼 방법을 모르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테니까. 크크.”

뱀은 시시,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을 이곳에서 꺼낼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선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선오는 뱀이 일러 준 대로 무신도 앞에 가서 섰다. 서랍장을 뒤적거리다 제법 쓸 만한 날붙이 하나를 찾아냈다. 선오는 날붙이를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천천히 손바닥을 그었다. 손바닥 위에 상처가 생기며 피가 솟아올랐다. 선오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 전체를 피로 물들인 뒤, 무신도로 손을 뻗었다. 도장을 찍듯 손바닥으로 무신도 속 뱀을 덮었다.

“좋았어. 그럼 이제 손의 감각에 집중해 봐. 크크.”

선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뱀이 조언한 대로 머릿속에 한자의 획을 떠올렸다. 어느 순간, 선오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깨트릴 파破.”

말이 끝나자마자, 무신도를 누르고 있는 손바닥 아래에서 신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촛불이 거세게 흔들렸다. 선오는 한참 동안 부동자세로 있었다. 하라는 대로 했으나 잘됐는지 어쨌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천천히 손바닥을 떼어 보았더니, 아까까지만 해도 그림 속에 있던 뱀이 온데간데없었다. 선오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볼 때였다.

“…어?”

손바닥의 상처를 타고 들어온 검은 뱀이 살갗 속에서 스르르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주 작고 가느다란 실뱀은 선오의 손목에 한 바퀴 감겼다.

“크크크! 역시! 역시 좋은 그릇이야, 좋아! 너무 좋아!”

손목에 녹아든 뱀은 문신처럼 보이기도 했고, 검은 실 팔찌처럼 보이기도 했다. 신기한 광경에, 선오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손목을 내려다보던 선오가 손톱을 세워 손목을 긁적거렸다. 그러자 뱀이 작게 키득거렸다.

“뭐 하는 거야! 간지러워, 간지러워! 크크크!”

뱀이 헥헥 숨넘어가게 웃어 댔다. 선오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너는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은 선오고… 우리 할아버지는 윤원중이야.”

“글쎄? 난 이름이 없어. 마음대로 불러. 이제 네가 내 주인이니까. 크크.”

선오는 제 손목에 감긴 뱀과 눈을 마주쳤다. 살갗에 새겨진 검은 뱀은 먹물이 마른 것처럼 살짝 흐릿했지만, 눈만은 여전히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그럼 넌 이제부터 시시야.”

“시시?”

“혀를 날름거릴 때마다 시시, 소리가 나니까.”

“좋아. 난 이제부터 너의 시시다.”

시시는 선오의 외로움을 단번에 파고들었다.

***

시시는 불러도 말을 하지 않는 때가 있었고, 며칠에 한 번 눈을 뜰까 말까였다. 시시의 말에 의하면 그릇이 아주 편안하고 좋아서 자꾸만 잠이 온다고 했다.

시시는 영리하게도 윤 노인 앞에서는 입을 열지 않았고, 윤 노인이 집 밖으로 나가야만 말을 붙였다. 시시는 선오가 물어보는 모든 것에 대답을 해 주었다.

“결계 치는 방법 알아?”

그날 선오는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윤 노인이 나가고 난 뒤, 선오는 옥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글씨를 끄적이며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옥편에 집중하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수살귀가 자신이 아끼는 책에 낙서를 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잡귀들은 선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아 따라 하고는 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었다.

시시는 순순히 선오에게 결계를 치는 법을 알려 주었고, 똑똑한 선오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금세 간단한 결계 정도는 뚝딱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선오는 일부러 잡귀들 보란 듯이 수살귀를 발로 걷어찼다. 구석으로 몰아넣고, 좁다란 결계를 쳤다. 선오는 싸늘한 눈으로 잡귀들을 노려보았다. 잡귀들은 선오의 눈빛을 보고 겁에 질려서,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꺼… 내… 줘….”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가둬 놓으니, 수살귀가 결계에 쿵, 몸을 부딪쳤다. 그러다가 결계에 닿은 곳이 쓰라리다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답… 답… 해….”

바보 같은 수살귀는 결계 안에서 같은 자리를 맴맴 돌다가, 이내 지쳐서 주저앉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어차피 내일이면 모든 일을 다 잊고 헤헤거리며 자신의 주변을 맴돌 것이었으므로,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날이 추워지면서, 연례행사처럼 선오의 몸에 감기가 찾아왔다. 더러운 환경에서 지내는 선오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큰 열병을 앓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선오의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오한이 들고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나중에는 열이 펄펄 끓어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숨도 쉬기 힘들었다.

집에 돌아온 윤 노인은 몸져누운 선오를 흐리멍덩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마를 한 번 짚어 보고는 차가운 물수건을 얹어 주었다. 그러나 뚜렷한 차도는 없었다.

윤 노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윤 노인은 선오를 한 번도 병원에 데려간 적이 없었다. ‘놈들에게 뺏기고 말 것이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게다가 선오는 출생 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아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병원에 가 봤자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윤 노인은 밖에 나가서 약을 사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좁은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선오는 땀을 쏟으며 끙끙 앓다가 힘겹게 눈을 떴다.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에 잡귀들이 동그랗게 모여앉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오 눈 떴다.”

“선오 눈 떴어.”

“선오 아프대.”

“아프지 마….”

윤 노인이 얹어 둔 물수건은 이미 뜨끈해진 지 오래였다. 선오는 어서 윤 노인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약이야 구하든 말든 상관없으니, 윤 노인이 얼른 돌아와서 제 이마에 시원한 수건을 얹어 주기를 바랐다.

근데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에 차가운 기운이 닿았다.

선오는 끔뻑끔뻑 눈을 떴다.

“…….”

이마에 닿은 것이 무엇인지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수살귀가 요지부동 자세로 선오의 이마에 손을 짚고 있었다. 선오는 눈을 굴려 물귀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역처럼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이 음산했다.

눈이 마주치자 수살귀가 움찔하더니, 작게 입을 뻐끔거렸다.

“미… 안… 해….”

평소 선오는 수살귀가 손만 갖다 대도 화를 냈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화를 낼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선오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차갑고 축축한 수살귀의 손길이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서늘하고 시원한 느낌이 좋았다. 물귀신의 한기가 처음으로 싫지 않았다.

선오는 눈앞의 수살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다 보니 몸 군데군데 살갗이 살짝 벗겨져 있었다. 문득, 생각해 보니 화풀이로 쳐 두었던 결계를 며칠이 지나도록 풀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

사람이 가시덤불을 뚫고 나오듯, 제힘을 다해 억지로 결계를 뚫고 나온 귀신은 몸 곳곳에 흉한 상처가 나 있었다. 수살귀가 헤실헤실 웃었다.

“…….”

그 순간, 선오는 처음으로 죄의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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